네오서울 2063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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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이 도착한 아파트는 원래 집에서 야트막한 산 하나를 넘으면 있는 거대 빌딩이었다. 삼성 메가타워 12단지라는, 심히 삭막한 이름과 함께 하늘 끝까지 뻗은 콘크리트 타워는 주변의 유리궁전과 대비되어 삭막한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지하 주차장 적절한 자리에 오토바이를 주차한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51층에 내리자 고층 입주민들을 위한 작은 구멍가게나 간이 헬스장, 오락실에 심지어 총포사까지 있었다. 한 층에만 수십개의 집이 있는 복도를 걸으며 하나하나 세어가던 지원은 5114호에서 멈춰 서더니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작게 덜컹거리는 문을 지나 집에 들어오자, 이전에 머물던 낡은 주택과 다른 냄새가 풍겨왔다. 관리가 잘 된 집 특유의 향기 사이에서 사춘기 남학생의 체취가 옅게 풍기는 것으로 보아 준용이 있는 것 또한 실감났다. 지원은 신발을 벗으며 반년도 더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뱉었다.


“다녀왔어.”


잠깐의 침묵이 흐르더니, 안쪽 방 문이 열리며 준용이 나타났다.


“오… 오셨…어요?”


준용은 이런 상황이 너무나도 어색한 듯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지원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치셨다고 들었…어요.”


“그랬지. 이젠 괜찮아. 하루 이틀만 쉬면 나을 정도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지원의 미소에 준용은 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원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밥은 잘 먹고 있었어?”


“네… 네! 그 남자분이 도와주셨어요.”


“잘했어. 여기 음식에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으니까.”


지원은 다른 방도 몇번 들락날락 거리더니 적당히 큰 방에서 외투를 벗었다.


“여기가 내 방이야. 아까 네가 나온 방이 네 방이지?”


“네.”


잠시 후, 몸을 씻은 지원이 옷까지 갈아 입고 나오자 준용은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건 어디서 구한 거야?”


“그 분이 구해 주셨어요.”


‘호오… 조 씨가 기업 꼬마한테 저런 선물을 줬다고? 대단한데.’


“저기… 저… 음…”


준용이 뭐라 말을 하려다가 한참을 망설이자, 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날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


준용은 미안한지 고개를 푹 숙였다.


“네…”


“너 마음대로 불러. 이름으로 불러도 되고, 누나라고 불러도 돼. 하다 못해 이모나 아줌마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할머니만 아니면 말이지.”


그러고 또 긴 침묵과 망설임의 시간이 지났다. 확연히 티가 날 정도로 얼굴이 붉어진 준용은 몸을 비비 꼬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누…나.”


지원은 그런 준용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누나…의 목표는… 삼성의 ‘몰락’이죠?”


갑자기 지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삼성을 무너뜨리는 것. 그게 내 목표야.”


준용은 무언가 다짐을 하는 듯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다른 건 몰라도 삼성을 붕괴시키는 건… 하지 마요. 아니, 하면 안 돼요.”


지원은 그런 준용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너는 삼성의 최정상에 있거나, 아니면 이 집안에 틀어 박혀 있을 뿐이니 잘 모르겠지… 사람들이 삼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야.”


“알아요. ‘악의 축’이라던가, ‘자본주의의 악마’라던가! 그 외에 삼성이 우리나라에 끼치는 악영향이나 서울의 어두운 면이나… 알고 있다고요.”


“그럼… 왜 내가 삼성을 무너뜨리는 것에 반대하는 거지? 너도 결국 삼성이라서? 아니면… 나를 이용해서 그 패륜아를 때려잡고 네가 그 자리를 먹기라도 할 거냐?”


준용은 양 팔로 다리를 감싸더니 얼굴을 반쯤 집어넣었다.


“누나는… 삼성의 직원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알아요? 550,000명이 넘어요. 계열사, 자회사, 해외 협력사까지 다 합하면? 100만은 가볍게 넘죠. 누나가 하려는 건… 그 사람들을 모두 실업자로 만들려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도 삶과 미래를 잃겠죠.”


지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또, 삼성에 의해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지겠죠. 지금은 한직에 있지만, 저희 일가 경호원을 하던 분은 영양군 출신 빈민이었어요. 우연히 아버지의 눈에 띄어 경호실장까지 올랐죠. 그런 사람들도 적잖게 많아요. 그 모든 걸 말살하려는 거예요?”


지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고 가만히 준용을 보다가 또 창문 너머로 비치는 스카이라인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버릇처럼 담배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 넣었다.


“넌… 모르겠지. 내가 왜 이렇게 집착해대는지 말이야… 이건 단순한 복수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과 관련된 문제기도 하니까.”


“네?”


지원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준용이 말했다.


“그리고… 누나가 없는 동안 개인적으로 이리저리 접선을 시도했어요.”


그 말에 지원의 표정이 돌변했다.


“접선? 야, 꼬마. 너 미쳤어?! 그러다가 역추적이라도 당하면 어쩔 거야!”


지원의 표정이 어찌나 험악했는지 준용은 진심으로 겁에 질렸다가 금세 진정했다.


“그, 그 정도는 막을 수 있어요… 그 분도 도와주셨고요. 아무튼, 아까 이야기했던 경호실장과 연락이 닿았어요. 그분은 경호실장이면서 제 스승님이기도 했죠. 만나자고 했어요, 내일 새벽 6시 30분, 구룡시장 마운트 칠리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그 경호실장이라는 사람… 믿을 수 있는 거지?”


“네! 스승님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예요!”


지원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믿어볼 게.”


그때, 조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세스 리, 당신이 훔쳐온 불법 BDV 말이야. 내용물을 살피다가 재밌는 걸 찾았어.”


“재밌는 거? 그 막장 BDV에 재밌는 내용이 있었어?”


“막장 맞아. 첫번째가 웬 여자를 고문하는 거였고, 두번째가 소아 성폭행, 세번째는 살인이었지. 그런데 네번째가 스너프이기는 해도 의외의 작품이었어.”


“자꾸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여기선 말 안 할 거야. LAD로 와, 직접 보여주는 게 더 재밌을 거니까. 그 꼬마도 데려오면 좋고.”


연락은 그렇게 끊겼다.


“들었지? 가 볼래?”


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 보자. 무슨 기묘한 이야기를 할 지 기대되는 걸?”


준용을 태우고 LAD에 온 지원은 건물 내부가 아니라 곧바로 건물 뒤편 지하 계단을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는 알리샤와 레나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조 씨는 다른 쪽에서 BDV 플레이어와 의자를 정비하고 있었다.


“빨리 왔네? 기대가 됐나 봐?”


“운 좋게 차가 안 막혔거든.”


알리샤가 물었다.


“저 아이는… 아들 분?”


지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냐… 말하자면 길어. 하지만 내 아들은 아니야.”


레나가 물었다.


“저 망할 도련님은 왜 데려온 거예요?”


“말이랑 표정이랑 전혀 안 맞거든? 그리고 손 대지 마라, 경찰에 신고해 버릴 거니까. 조 씨, 그래서 그 네번째 BDV가 뭐야?”


“미세스 리, 혹시 경찰 시절에 광인이랑 싸운 적 있어?”


지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작년 연말. 진짜 고생했었지. 죽을 뻔했으니까.”


“그때 날뛴 광인의 시점에서 기록된 BD야. 훑어보다가 미세스 리가 나오더라고. 물론, 이거 때문에 부른 건 아니야. 그 안에서 더 중요한 자료를 찾았거든. 어때, 한번 볼래? 물론 감각은 차단시켰어. 그저 광인의 시점에서 그날의 사건을 볼 뿐이란거지.”


“해보지 뭐, 줘 봐.”


지원은 치과의자 같은 의자에 눕더니 BDV 플레이어를 쓰자 곧바로 빛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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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드디어 전작인 푸른 방패의 전설과 똑같이 60화를 찍고야 말았습니다. 물론 앞으로 한참 남았으니 완결까지 더더욱 힘내서 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