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 7장 보러가기


"엄마 오늘 좀 늦는다. 밥 해놨으니까 대원이랑 차려먹어."

"어디 가는데?"

"부녀회에서 태릉에 꽃놀이 간다고 했잖아."

"엄마는 돈 없다면서 맨날 놀러다녀."

"내가 언제 맨날 놀러다녔냐? 맨날 가게에 죽치고 앉아 있었는데. 다녀온다."

"응. 잘 다녀 와."


연희는 이제 중학교 2학년생이 된다. 일주일 후면 방학이 끝나버리기에 아침의 여유를 좀 더 만끽하고 싶다. 달리면 3분 내로 도착하던 학교였지만 이제는 고개를 넘어가야 학교가 나온다. 일주일 후부터는 6시에는 일어나야 하기에 방학이 끝나기 전까지는 잠을 푹 자둘 생각으로 다시 이부자리로 돌아간다.


"지금 몇 시지? 곧 있으면 교문 닫을 텐데!"


종종걸음을 걷던 연희는 달리기 시작한다.


"어?"

아무리 뛰어도 교문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뭐지?"

"왜 교문이 아직도 저렇게 멀리 남은 거야!"


"아아아아악!"


"아 뭐야... 꿈을 꿔도 이런 꿈을 꾸냐..."


우우우우우우웅ー


"뭐야. 이것도 꿈이야?"


"국민 여러분. 여기는 민방위 경보통제소입니다. 실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현재 시각,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실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현재 인천이 폭격 당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침착하게 행동해 주십시오."


"뭐래... 뜬금 없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밖으로 나가보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우왕좌왕할 뿐 평소와 다름 없었다.


"오늘 장사 접어야 되는 거 아니예요?"

"아, 별 일 아니예요. 배가 새로 들어왔어요. 싸게 드릴 테니 사세요."


동생은 아침 일찍 놀러 나갔고, 집에는 연희 뿐이다. 설마하던 마음이 진짜 전쟁이 난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바뀐다. 이대로 우리 가족 모두가 흩어진다면...


가게로 뛰어갔지만 오늘 가게는 문을 닫았다. 아빠는 어제 고향에 삼촌을 보러 내려가서 없다.


"대원아! 대원아!"


길거리의 대원이 또래의 아무 아이나 붙잡고 대원이의 행방을 묻는다.


"너 대원이 어디 있는지 알아?"

"대원이 교회 올라가는 쪽에 있을걸?"

"고맙다."


교회 입구에 가 보아도 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6.25를 직접 겪진 않았지만 생생하게 기억을 더듬어 말해주던 엄마의 이야기 덕분에 연희에게도 6.25는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줌마, 혹시 여기 대원이 왔어요?"

"아니. 엄마는 어디 가셨어?"

"오늘 태릉에 간다고 했는데, 어떡해..."

"큰일이구나. 일단 지금은 도로가 통제돼서 못 움직여. 집에 계시면 엄마 오실 거야. 대원이는 내가 대문 앞에서 보고 있다가 지나가는 거 보이면 집에다 데려다 줄게."

"네. 고맙습니다."


"연희야! 연희야!"

"미선아!"

"너 집에 갔더니 없더라. 대원이가 집 문이 잠겼다고 누나 혹시 여기 있냐고 우리 집으로 왔어."

"정말? 아, 다행이다. 동네를 계속 돌아다녔네."




"야. 니네 누나가 너 한참 찾아다녔어."

"엄마는?"

"오늘 태릉에 갔어. 나 혼자 집에 있었는데 지금 공습경보 때문에 나온 거야."

"누나, 이거 진짜 전쟁 아니지?"


"혹시라도 너희 둘이 있다가 무슨 일 생기면 안 되니까 집에다가 너희 여기 있다고 쪽지 붙이고 와. 다음 방송 나올 때까지는 일단 여기 있자. 아, 배 고프지? 아줌마가 점심 해놓고 있을게."

"감사합니다."


"전쟁 났다고 하는데 진짜 조용하다."

"원래 같으면 어디로 대피시켜야 하지 않아? 어디로 대피하라는 말도 없어."






"저, 전화 좀 빌려주세요!"

"자, 여기요."


뚜루루루루루루ー


집 전화는 아무도 받질 않는다.


도로는 통제되어 아무 차량도 움직일 수 없다. 모든 교통이 멈췄다.


"경찰 아저씨!"

"왜 그러세요?"

"미안한데, 사근동까지 경찰차 좀 태워주세요."

"안 됩니다. 지금 비상사태라 경찰차도 함부로 못 움직여요."

"제발요. 지금 집 안에 아이들만 있어요... 집에 전화를 걸어도 아무도 받질 않아요. 부탁드립니다."

"지금 사정 없는 사람 없어요. 아주머니만 초조한 거 아니예요. 좀만 기다려 보세요."


6.25가 터진지 33년. 덮어놓았던 8살 때의 기억이 자꾸 흘러나온다. 아비규환의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어버리고 우는 아이, 기차 지붕 위에서 갓난아기를 떨어뜨리는 부모들... 사람에게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었다. 그 일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려 하고 있다.


청량리에서 사근동까지는 걸어서 1시간 남짓. 이 1시간, 멀다고 기다린다면 수십년을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우우웅ー

"공습경보를 해제합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공습경보를 해제합니다."


"끝났나 보다."

"연희야! 대원아!"

"얘들아 엄마 오셨다."


현관 앞에 선 명자의 모습은 말이 아니다. 평소와 달리 넝마주이가 된 엄마의 모습이 낯설다.


"도로도 다 통제됐을 텐데 태릉까지 갔다가 언제 이렇게 왔어?"

"가다가 중간에, 아이고, 숨 차. 청량리에서 글쎄 뛰어왔다니까."

"아이고, 자기는 체력도 좋아."


아침에 꽃단장을 하고 나갔건만,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얼굴이 녹아내린듯 보였다.


"아이고, 나 물 한 잔만 줘."

"어, 알았어. 아이고~ 나는 지금 피난 갈 준비한다고 지금 가방을 다 싸고 있었네. 자. 여기 물."




"오늘 자유를 찾아 귀순한 이웅평 씨는 미그기를 끌고 수원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이 일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는 공습경보가 발령되었고..."


"얘들아. 엄마가 생각해 봤는데, 만약에 전쟁이 났는데 오늘 같이 우리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만날 장소를 정해 둬야 할 것 같아. 우리 만약 흩어지면 매달 1일에 왕십리역 앞에서 만나는 거다?

"알았어."

"엄마가 아까 태릉 가는 길에 갑자기 공습경보가 나서 차가 다 멈추는데 만약에 너희 둘만 남겨지면 어디 가서 니네가 눈칫밥이나 먹고 그럴까 봐..."


만일 아까 그 일이 진짜여서 모두 헤어지게 됐을 일을 생각하니 아찔해 눈물을 보인다.


"엄마, 왜 울어..."




"옛날에 6.25 때, 논두렁에서 노는데 저기 끝에께 있는 논에 폭격기가 폭탄을 하나 떨구니까 그냥 논물이 해일처럼 넘쳐서 나를 덮치는데..."

"엄마 또 시작했다... 그 얘기 내가 태어나서 열 몇 번도 더 들었어."

"내가 이 얘기했나? 그럼, 그... 6.25 때 괴뢰군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와서 너희 외할아버지를 끌구 가구..."

"그것도 얘기했어. 할아버지 징용 갔다가 탈출한 얘기."

"어, 그러면..."

"아, 엄마!"

"좀 들어 봐ー 내가 피난 갈 적에..."


83년 초봄의 어느 날, 공습경보는 소동으로 끝났다. 악몽과도 같았던 하루,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저녁밥 짓는 냄새가 악몽을 물리치고 하루를 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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