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의 원한을 오늘로 끝내자."


청명이 암향매화검을 땅에 드드득 끌며 가부좌를 튼 장포의 사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청명의 말을 들은 천마의 공허한 눈이 천천히 청명을 향해 돌아갔다. 티없이 맑고 투명한 눈이었으나,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그것은 자연의 순수함이 아니었다. 인공의 순수함이었다.


전장은 청명의 발소리 이외에는 울리는 소리가 없어 조용했다.


"보이는구나."


천마의 하얀 입술이 위 아래로 나뉘었다.


"네 운명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천마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염라의 칼날이 그의 생사부를 찢어발기려고 하는 데도,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처럼 침착했다.


"다시 마도천하가 열릴 거라는 개소리를 할 거라면, 닥쳐."


청명이 천마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단전이 파괴되고 사지육신의 근육들이 난자당한 이상, 설사 천마라 할지라도 지금 상태로는 양민만 못했다.


청명이 천천히 은빛으로 반짝이는 암향매화검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별이었고, 스스로를 태울 촛불이었으니, 가히 어둠을 가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런 것이 아니다, 어린 화산의 제자여."


천마가 청명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청명의 얼굴이 격노로 가득 차 있었다.


"너의 운명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너 역시 나처럼..."


"내 운명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콰앙!




그 주인의 의지에 따라 곧게 날을 세운 암향매화검에서 폭음이 터져나왔다.


피가 튀고, 무수한 악의를 담은 핏방울 하나하나를 베어가르며 매화가 피어오른다.


마지막으로 더없이 화사하게 피어오른 매화. 술과 법을 넘어, 예에 올라 학에 달하였고 도를 이어간 검.


최후의 헌화. 최후의 조의.




청명의 모든 회한, 청명의 모든 후회, 청명의 모든 죄책감, 청명의 모든 속죄.


청문. 청진. 청공. 명도. 현종. 현상. 현영. 운암. 운검. 백천. 유이설. 윤종. 조걸. 당소소. 위립산. 위소행. 그리고 당보.


죽은 자의 영전 앞에 목을 베어 바치며, 산 자의 얼굴 앞에 명예 베어 바치니, 그저 흐르리라, 언제까지나.




투욱.




천마의 목이 힘없이 떨어졌다. 신의 목이 떨어졌다. 신인 줄 알았으나 결국 인간의 목이다. 인간인 줄 알았으나 결국 신의 목이다.


천마의 새하얀 목에서 흐른 붉디 붉은 피가 백 년 전 결사대의 묘지이자, 백 년 후 무림맹의 묘지이기도 한 이 땅을 적셨다.


그것은 죽은 이들에게 하사되는 술이요, 제물일지니. 이제 평화롭게 눈을 감아라.


"이제 평화롭게 눈을 감아라..."


청명이 조용히 되뇌였다. 미련 없이 천마의 시체를 일별한 그가 검에 내력을 불어넣어 피를 털어냈다. 본디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조용했고, 이곳 역시 그랬다.


청명이 얼굴에 흐르는 핏물을 슥슥 닦아냈다.


"처, 청명아...!"


주변을 짓누르는 무겁디 무거운 중압감에 꼼짝 못 하고 있던 이들이 청명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사숙."


"소소, 확인해. 사질, 괜찮은지."


"네, 사고!"


"... 청명아."


"시주, 괜찮으십니까?"


"처, 청명 도장...!"


"괜찮으냐, 화산검협?"


소림부터 종남까지. 한때 반목했던 모든 이들이 함께 서 있는 이 곳에서, 청명은 자신을 부르는 이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가부좌를 틀었다.


"거기 계십니까, 반선라마."


청명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라마승 특유의 승포를 입은 반선라마와 달뢰라마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포, 포달랍궁의 궁주다...!"


"여기는 왜...?"


청명을 둘러싼 사람들이 소곤거렸다. 청명이 다시 눈을 떴다.


"저 분들께 길을 비켜주세요. 이게 마지막 싸움이 될 거니까."


"마, 마지막 싸움이라니?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더냐?"


태상장문인 현종이 청명에게 물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들 물러나세요."


청명이 조용히 말했지만, 그 말 한 마디로 충분했다. 청명을 둘러싼 이들이 뒤로 몇 발자국 움직였고, 그 사이 틈으로 달뢰라마와 반선라마가 들어와 청명을 마주보고 섰다.




"경의를 표합니다, 윤회자여."


달뢰라마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승포가 바람에 펄럭였다.


"화산파 십삼 대 제자, 천하삼대검수, 매화검존 청명이여. 화산파 이십삼 대 제자, 천하제일검, 화산검협 청명이여."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대부분은 달뢰라마의 언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또한 몇몇은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였다. 그것은 불행일까, 길사일까.


이윽고 그 침묵을 깬 것은 현종이었다.


"사, 사, 사조시여....!"


현종이 쾅, 하고 바닥에 머리를 찧었으나,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리지 못했다.


이윽고 운암과 법정 역시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허도진인도 머리를 찧었다. 종리형. 당군악. 남궁도위. 곽환소. 자오개 능삼. 종리곡. 각 문파의 장문인들과 세가의 가주들을 시작으로, 모두가 덜덜 떨며 머리를 찧었다. 오검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영 태상장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오직 달뢰라마와 반선라마, 그리고 매화검존만이 서 있을 뿐.


"이 미천한 제자, 이제야 알겠나이다... 어, 어찌 화산을 구원하셨는지... 어찌 가시밭길을 걸어오셨는지... 그 무공들... 그 재물들... 그 영단들... 모두...!"


현종의 주름진 얼굴, 빛 바랜 회색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매, 매화검존이셨기에...! 검존이셨기에...! 그런데 이 미련한 제자는.... 화산을 지키지 못하고..."


계속해서 쾅쾅 머리를 찧는 현종의 이마에서 피가 붉은 혈선을 그리며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만하세요, 태상장문인."


청명이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태상장문인과 현자 배의 노고를 알아요... 어찌 혼자 버티려 하셨습니까. 어찌 홀로..."


청명이 다가가 현종, 현상, 현영을 차례로 안아주었다. 사조의 품은 따뜻했다. 다시는 느껴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것이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왔다.


"화산오검."


청명이 다음으로 오검의 이름을 불렀다.


"예, 사조시여...."


그들이 일시에 대답했다. 그들의 이마에서도 역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잘 해주었어. 고마워, 진심으로."


청명의 입술이 비뚜름해지며 얕은 웃음이 피어났다.


"당군악 가주."


"예, 암존의 친우 매화검존이시여."


"일전 사천에서 일러주었던 것은 당보 녀석의 유진이었고, 심득이었어요. 잘 이어나가도록 하세요. 그래야 암존 녀석도 기뻐할 테니까."


이어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불리었다. 그 광경은 성스러웠고, 축복스러웠다. 그것은 모든 일이 끝난 이후의 해후였다.


청명이 마지막으로 입을 뗐다. 그의 얼굴에 잠시 분노가 새겨졌으나,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구파의 장문인들."


"...예."


"제가 여러분에게는 따로 해 줄 말이 없으나, 여러분을 이해해요. 제 문파가 소중했겠지. 제 문파가 가장 귀했겠지. 나도 그랬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거죠. 하늘 아래 모두는 벗이니까요. (天友) 기억하세요."


구파의 장문인들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때 강호의 북두로써 협을 버리고, 화산을 버렸던 속죄의 의미였다. 청명이 그것을 알아보고는 다시 얕은 웃음을 띄웠다.


"사, 사조시여. 하, 하지만 포달랍궁주는 왜..."


"마저 끝내야만 할 것이 있어요."


"예...?"


"그리고 저를 사조라 부르지 마세요. 난 그럴 자격이 없어요. 난 아무것도 이어주지 못했고, 지키지 못했어요. 저는 화산의 이십삼 대 제자, 청명이지 십삼 대 제자 청명이 아니니까요."


청명이 말을 끝내고 몸을 움직였다.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그곳의 모두를 안아주었다. 마치 어딘가로 곧 떠날 사람처럼.


"... 청명이가 왜 저런답니까?"


조걸이 말했다.


"걸아, 사조시다. 사조 매화검존이시다. 기사멸조야, 그거..."


"하, 하지만 사조께서 그리 부르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청명이 그 장면을 보고 풋, 웃었다. 그가 다가가 오검과 당소소를 꼭 안아주었다.


"정말 고생 많았어, 사숙, 사고, 대사형, 사형, 사제."


"처, 청명아... 청명아...!"


백천의 눈에서 끝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이설도 그랬다. 윤종도, 조걸도, 당소소도 그랬다.


곽회, 진태, 종회, 도인명, 염진, 청화, 임평, 종학, 청봉, 청공, 곽평, 백상, 백문, 백공, 백현, 운검, 운암, 운진, 운각, 운방, 운공, 현종, 현상, 현영, 백아까지...


모두의 눈에서 눈물이 끝없이 흘렀다. 왜 우는지, 그들은 몰랐다. 알 수 없었고, 영영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저 울었다. 그저...




한 순간 한 순간이 꿈결과도 같았다. 지난 몇 년 간의 세월이 그들의 머릿 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제 다 끝났습니까, 화산검협?"


"네."


청명이 다시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반선라마가 그 옆에 서고, 달뢰라마가 품에서 족자를 꺼내들었다.


긴 족자를 펼친 그가 소리 높여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관음보살께 고한다. 죄인 청명은 자의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세계의 인과율을 깨뜨린 죄가 있고 운명을 뒤틀어버렸으며 또한 그것만도 모자라 흐름을 뒤튼 악귀를 직접 처단하는 대죄를 범했다. 이에 관음보살과 모든 부처께 알리노니, 이로 하여금 현세의 깨달음 없는 윤회를 깨어부수고 시간선을 벗어난 사건들을 다시 재정렬하기 위해..."


".... 이게 무슨 소립니까, 사숙?"


조걸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화산파 이십삼 대 제자, 화산검협 청명을 사형에 처한다."


분위기가 다시 싸늘해졌다. 청명이 담담히 눈을 감았고, 반선라마가 웅혼한 불광을 담은 수도를 펼쳤다.




"미친 거냐!"


백천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매화검을 뽑았다. 나머지 화산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의 기수식을 취해 포달랍궁의 궁주에게 그것을 겨누었다.


순식간에 평화로웠던 화합의 장이 살의로 짙어졌다. 하지만 청명은 여전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청명아, 이게 무슨 소리냐? 이게 무슨 소리냐!"


현영 역시 검을 빼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청명은 침착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다시 조용히 입을 뗐다.


"제가 여기 계속 있는다면, 어떠한 위험이 또 있을지 모르니까요."




파앙!




파공음이 십만대산의 정상에 퍼졌다. 단단한 기막이 청명의 주위를 둘러쌌다.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천마도 결국 깨달음 없는 윤회로 저리 미쳐버린 것, 저 역시 그리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모두가 흘렸던 피는 개죽음이 되는 거니까요. 저는 괜찮습니다, 태상장로님. 이건 제가 직접 부탁드린 것이고, 윤회를 끊어내면 결국 중원에 평화가 찾아올 거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괜히 쪽팔리잖아요? 다시 안 볼 사이도 아닌데."


가볍게 웃어넘긴 청명이 다시 눈을 감았다.


반선라마가 그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의 좌수에 맺힌 수도가 밤하늘 홀로 떠 있는 별처럼 번득였다.


"안 된다! 청명아! 안 된다! 청명아....!!"


기막을 쾅쾅 두드리는 백천과 오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 외에도 몇몇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특히 청명을 아꼈던 현영은 어린 아이처럼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으며 현종은 끊임 없이 머리를 바닥에 짓찧었다. 그리고...




푸욱.




반선라마의 수도가 청명의 단전을 꿰뚫었다.


"쿨럭.... 쿨럭!"


청명의 입에서 선지피가 흘러나와 입가를 적셨다.


"미안합니다, 화산검협."


반선라마가 차마 청명을 바라보지 못하며 사과했다. 달뢰라마도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찌 선택하셨습니까... 검협..."


"안 된다... 안 된다..."


흐느끼기 시작한 백천이 백색 영웅건을 찢어버렸다. 산발이 된 머리가 바람에 흩날려 기이한 형상을 만들었다.


"제발... 제발...."


"사형들.... 선계에서... 보자구요... 쿨럭, 쿨럭."


청명이 피가 줄줄 흐르는 입으로 간신히 웃어보였다.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순수한 웃음이 만면을 물들였다.




이윽고 청명이 쓰러졌다. 달뢰라마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절명... 하였습니다."


달뢰라마가 아직 따뜻한 청명의 시신을 곱게 눕혔다.


대법을 시행한 자가 죽자, 사르륵거리며 기막이 사라졌다. 모두가 청명에게로 달려들었다.


"제발 일어나거라... 청명아...!"


"청명 도장...!"


"장난이잖아, 그렇지? 장난이라고 말해! 말하라고...!"


현실을 부정하는 이. 슬퍼하는 이. 혼절한 이. 흐느끼는 이. 애도하는 이.


모두가 한데 뒤섞여, 하늘 아래 하나가 되었다.




화산검협 청명은 마지막 순간, 정파 무림을 통합하고 떠났다.


천하제일검 매화검존조차 이룩하지 못 했던 위업이었다.




* * *




"아오 씨... 여긴 어디야? 생각보다 되게 아프네."


청명이 사방이 하얀 어딘가에서 눈을 떴다.


"엥? 이거 바닥이 왜 이리 폭신거려? 뭐야 이거... 나 등선한 거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바닥은 구름이었고 먼 곳에 푸른 산이 보였으며 학이 날아다녔다.


선계였다.


"하 씨... 결국 지옥으로는 안 떨어졌네. 이거 뭐 다행이라 해야 하나?"


청명이 중얼거리며 앞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그의 발을 유려하게 감쌌다.


"아이고, 앓느니 죽지. 앓느니..."


그때 그의 뒤에서 고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보면 노인이기라도 한 줄 알겠구나. 창창한 이립인 주제에."


"아니, 잠깐... 장문사형?"


"그래 나다 이 녀석아, 벌써 내 얼굴도 까먹은 게냐?"


청문이 허허 웃으며 청명의 머리를 한 대 콩 쳤다.


"아, 진짜! 칭찬은 못 해줄 망정!"


청명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근데... 사형밖에 없는 거예요? 다른 애들은 어디 가고?"


"도사형님, 저 찾으셨습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능글거리는 목소리. 짙은 담배 냄새. 청명은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당보야."


"사숙! 괜찮으십니까!"


명도.


"사형! 그러게 제가 자하신공 좀 익히라 하지 않았습니까!"


청진.


그리고 청자 배, 명자 배... 옛 화산파의 모두가 청명을 반기려 자리에 나와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청명이 씩 웃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로..."




"화산귀환(華山歸還) 이네요."




- 화산귀환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