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에 방이 있었다.

어, 음. 그러니까. 방이 있었더라고?

무슨 방? 

 

아니, 그것도 모른단 말이야?

Room. 그 뭐시다냐 시어터 룸, 베이비 룸, 하튼 그 둘이 들어갔다 셋이 되어나오는 그 방 말야. 

 

이제 잘 알겠다고? 뭐 그럼 됐어.

어? 잠깐만. 내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지…? 내가 월세 2달치 밀린 거 이야기했었나?

아, 그래 최초에 방이 있었어.

 

근데 말야. 왜 방이 존재했던 걸까? 방이라고 하는 것은 무릇 어떤 장소이면서, 하나의 역할을 해내는 곳이잖아? 하지만 그곳에는 방이 있을 뿐, 방을 구성하는 장소와, 가구, 그 방을 이용하는 사람조차 없었던 말이지.

 

어느 날 떡하니 방이 나타나 버린 거야.

방은 존재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방의 존재를 알지 못했어. 왜냐고?

그건 말이지….

 

“그 방이 바로 나거든.”

 

아직 무슨 말 하는 지 이해하지 못한 눈초리인데.

 

“바로 내가 그 방이야.”

“Bang 이라고.”

 

어, 무슨 정신병자 보는 눈초리로 보는 건 조금 사양해줬으면 해.

이래뵈도 정신 병원에서 근무했던 환자라고! 모두가 날 경외시 했다니까?

 

생각해보니까 정신 병원에서의 삶도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만 같아. 뽀송뽀송한 새하얀 침대와 언제든지 잠에 빠져들 수 있는 황홀의 약, 게다가 매일 날 진찰하러 오는 주름살 많은 이쁜이 까지! 게다가 나 혼자만이 그 안에 있을 수 있었지.

 

내가 최초에 방으로 존재했을 적에는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어. 음, 영화방이었을 때는 스크린 속의 괴물 소리, 배우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 관객들이 훌쩍이는 소리로 귀가 먹먹했었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들에게서 떨어져서, 비로서야 내 자신을 관찰할 수 있게 된 거야.

 

그 때 난 떠올렸지.

아, 난 왜 방인 걸까?

내 친구들은 말야, 적어도 한 가지 존재의의를 가지고 있단 말이지. 스크린은 사람들을 위해 영상을 틀어주면서 헌신해. 대개 이런 놈들은 하루 종일 내내 바빠서 만날 시간도 없어.\

 

모텔은 평일날은 좀 한가한데, 주말이랑 연휴가 겹쳐있는 때에는 살이 홀쭉해서 돌아온다니까! 솔직히 말해서 흥분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온 사방에서 온갖 신음소리가…. 사실 그게 가장 무서운 게 아니야. 

 

모텔이는 우리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했거든. 몇 살이냐고? 음, 노코멘트 할게. 이런 말 하면  날 침대에서 가만히 내버려둘지도 몰라. 그건 가장 끔찍한 일이거든!

 

근데 나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었어, 앞에서 말한 스크린이랑 모텔이랑, 그 외의 어떤 방도 말야. 좋게 보이니? 

 

이상하게도, 난 그들의 존재의의가 다른 사람들이 심어준 어떤 허구된 사상마냥 쉽게 공감하지 못했어. 적어도 일을 수행할 때 만큼은 방들의 집합체가 된 것 같았지만, 일을 끝마치고 방 안을 스프링 쿨러로 적셔버릴 땐 정말로 머리가 차가워지더라.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고 말야.

 

난 방이야. 먹고 자고, 싸고 그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도 입진 않아. 음. 가끔 벽에다 오줌을 싸대는 어른이들이 있어서 좀 그렇긴 한데, 뭐, 개넨 예외로 치자고.

 

근데 난 ‘방’일 때는 무얼 하면서 지내야 하는 걸까?

 

모두가 태어나면서 존재의의를 지니는 데, 나 혼자만 존재 의의가 없어. 이게 너의 사명이다. 하고 신이 정해준 것도 없고. 나는 어느 건물에 위치해있는 지도 모르고, 이게 어느 나라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니까?

 

더군다나, 내가 방으로 있을 적에 단 한 번도 저 문을 연 사람이 없었다는 게 너무나 슬퍼. 마치 내가 다른 방들을 내 자신에 투영했을 적에만 다른 사람들은 내게 웃음 지어주고, 슬픈 얼굴을 지니고, 이상야릇한 비명을 질렀지. 근데 그것들이 내게 뭐가 중요할까?

 

난 사실 방이야.

방이라고.

어떤 존재 목적을 지니고 만들어진 방이라니까.

 

어…음. 이런, 나 혼자만 잔뜩 이야기하고 있었네. 조금 지루했을지도 모르겠어. 어라? 괜찮은 술로 대접받았으니 괜찮다고? 혹시 어지럽진 않아? 

 

응? 왜 물어보냐고. 실은 그거 어제 담궜거든.

음? 야. 근데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해. 난 지금 정신병원도, 영화관도, 모텔도 아닌데. 

 

뭐? 내가 널 바깥까지 옮겨달라고?

 

하지만 난 방인걸.

저 방을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다고.

 

휴, 그래 한 번 심호흡하고. 사실 방에 문이 있다는 것 즈음은 모두 알테지만, 난 그 문을 여는 것들 두려워했었거든. 왜냐고? 글쎄 말이다….

 

1300년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나무 틈새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방안을 비춘다. 안에는 정장차림에 술을 들이켜 부은 사내가 입안에 게거품을 문 채 쓰러져있다. 관객 중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경찰을 불렀다.

 

서둘러 그의 맥박을 짚지만, 이미 죽어있다.

그들이 무어라고 소리치고, 나는 그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갈색 머리에 구렛나룻이 배까지 내려오는 세 다리의 형사.

팔을 오묘하게 젖히는 여장남자. 

 

아, 됐다 됐어.

방은 방을 닫았다.

 

“이건 뭐 예쁜 아가씨 하나 없고. 진짜 너무하다 니네.”

 

여장남자와 경찰은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방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방의 공간이 좁아진다?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벽과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위 아래가 점점 뒤바뀐다. 경찰의 구렛나룻이 머리로 올라가고, 세 번 째 다리는 그대로 존재한다. 

 

여장남자의 코르셋이 벗겨지고, 그는 멋쟁이 남자가 된다. 흠. 본판이 좋군! 그나저나 방이 사라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들은 점점 비명을 지르다가, 방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끄읏-.

 

.

.

.

어라? 근데 나 왜 아직도 말할 수 있는 거지?

나, 방 아니었나? 

방이 사라졌는데 아직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내가 애초부터 방이 아니라는 명제가 성립되는군.

그렇다면…

 

최초에 방이 있었다. 라는 글로 시작한 게 이상해지잖아?

과연, 그럼 이렇게 마쳐야겠어.

 

최후에 방이 존재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