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시절 현재 강남에 땅사놨을거면 부자가 되었을거라고??

내생각에는 99%이상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부자에는 미치지 못했을것이다. 

한편,
정확히 부자라는 기준, 그에 만족하는 것에 따라 다르기도 하기때문.

당시 영동개발로 한강신도시가 조성될 당시, 현재 압구정, 신사동의 강변지역은 60년대까지만해도 매년 범람했던 침수지역이자 그냥 농사도 못짓는 범람습지에  불과했다. 당연히 이 지역의 땅주인이 없고, 당시 아파트를 짓던 건설사는 한강밑을 파면서  얻은 준설토(콘크리트섞어쓰거나 지반다지는데 사용)+공우수면매립으로 토지까지 새롭게 창조하면됐으므로 토지보상비가 전혀들지 않았다.(당시 아파트수주로 벌어들인 자본으로 현대,한신 등 대규모 건설사들이 탄생) 따라서 한강변쪽의 개발로 이득본사람은 거의없었다. 심지어 잠실쪽에 보가 생기기전에는 이 논현동 공무원아파트도 바로옆 들쑥날쑥한 한강수위때문에 저지대는 침수가 잦았다고함.

논현동공무원아파트 이후로 강남에서의 한줄기의희망이 보이자 서초+강남일대 광활한 수백만평을 영동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때 말죽거리 잔혹사로유명한 이 지역은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고작이었고, 강남은 제3한강교를통해 강북의 사람들에게 공급할 신선한 채소와 과일재배 같은 농업이 발달하였다.

 당시 군부정권였던 데다 서울시의 행정력과 권위는 매우높았기 때문에(당시서울시장을 비로하여 전국의 지자체장은 대통령이 앉힐수있었음,당시 지방자치제가 없긴했다만)는 이땅을 거의 후려치듯이 헐값에 팔아야만했고 이를보면 미리땅을 사놓은다고 후한 보상은 받기힘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문헌에따르면 원가의 3할,4할정도였다고 하니 눈물을 머금고 팔았으리라.

그나마 있어도 새로지어지는 아파트에 입주권 정도 몇몇 쥐어주는게 전부였고, 이마저도 시간에 흐름에따라 이사를 가거나 해서 뿔뿔이 흩어져서 지역 공동체가 아파트단지가 생기고 나서 상당히 바꼈단다. 여담이지만 당시 강남에서 많은 땅을 소유하던 이는 개인이아니라 강남에있던  성릉 등의 조선왕조 무덤을 관리하던 봉은사였고, 당시 불교계에서 이때 강남땅을 판돈으로 현재 남산에 동국대학교를 짓는데 보탰다고 한다.

 + 그럼 헐값에 팔바에 안팔면  되지않냐??
영동개발 이후 10년이 훌쩍넘는 5공화국1980년대에 목통택지개발때 부랑민정착촌이있었는데 문어아저씨께서 김포공항에서 강남가는데 현재 오목교 목동일대 외국인에게 이런 꼴(판자촌)을 보여주면되겠냐고해서 88올림픽을 앞두고 목동택지 조성계획이 설립되었고 이에 정착민들은 구청에서 당시 합법적인 토지를 임시로 인정해줬는데도 서울시가 번복하다시피 무력으로 그땅을 빼앗았고 사람들은 푼돈몇푼받고 근처  경기도 시흥 부천일대로 떠나야만 했다. 이때가 1980년대 초중반인데 6070년에는 뻐기는게 가당키나 했을까?


요약
1. 한강변은 범람지대라 애초 주인이없었다.
2. 있어도 서울시에 헐값에 팔아야만 했을것이다.(안팔았으면 서울시는 전경과 용역을  투입해서라도 빼앗았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