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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어에서 일본어를 빼면 당장, 전국의 모든 공공기관과 병원, 대학, 법원이 마비된다. 특히 2자나 3자로 된 한자어가 일본에서 수입된 말들이 많지. 그래서 내가 일본어와 국어를 공부할 때, 이러한 사실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더 웃긴 것은 국어학자들이 일본어로부터 독립하려는 생각이 아예 없다는 거에 또 충격을 받았다. 언어는 그 나라의 민족 정신을 대변한다고 줄기차게 떠들어대는 양반들이 정작 게을러서 뭐 하나 제대로 하려는 생각이 없다. 그런데 존나 웃긴 건 자신들이 아닌 대중들에게만 언어 순화 운동을 하라고 종용한다는 점이다. 자기들도 순화 운동을 안 하는데, 하물며 언중들이 귀찮게 일일이 일본어를 한국어로 하루 아침에 바꿀 수도 없고 말이다.


국사편찬위원회 고전종합 DB에서 고종실록 20권 20년에 기록된 걸 보면 1883년 보빙사가 미국 아서 대통령을 접견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 president를 한국어로 번역할 수가 없는 거였다. 그래서 급한대로 청나라에서 '프레지던트'를 음차한 '백리새천덕'이라는 말을 가져다 썼지. 이는 1년 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처음 쓰였고 말이다. 그런데 더 세련되고 쉬운 말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일본어에서 '대통령'을 발견하게 된 거였다. 아니나다를까 갑오개혁 때 이 말을 들여와 쓰기 시작한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 통수권자를 지칭하는데 일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지 않으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일본인 학자들이 대통령이라는 말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흥미롭다. 원래는 통령이라는 말이 쓰였지, 大를 붙이지는 않았다. 통령 밑에는 수령이 있었고, 두령이 있었는데, 이는 약 천 년 전 일본이 고대 중국의 주군목현 제도를 들여왔을 때부터 쓰인 말이었다. 한국도 고려시대에 망이 망소이의 난 이후, 이들을 달랜답시고 무신정권은 소를 없애고 행정단위를 주군목현으로 승격시켜줬다는 내용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지. 그 주군목현이 맞다. 이후 고려에서 현을 지배하는 관직을 현령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일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 단위가 수직적으로 늘어나면서, 두령 수령 통령 따위로 분화된 거지. 에도막부가 봤을 때 미국의 대통령은 천황의 지위도 아니고 쇼군의 지위도 아니니 그저 행정관으로 간주한 거야. 여기에 미국의 국가 원수를 드높이기 위해 大를 붙인 거였고. 대통령이라는 말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국어학자들이 일본어를 비롯한 기타 외국어에서 수입된 말들에 모조리 귀화어라는 신분을 부여해서, 국어사전에는 이들 어휘가 완전한 한국어로 올라가 있다. 뭐, 멀쩡히 잘 쓰고 있는 말들이 이리 편한데 경로의존성에 따라 굳이 바꿀 필요까지 있을까하겠냐마는. 그래도 자각을 가져야 하지 않겠냐? 왜 이런 생각을 했냐면, 일본어 번역가들이 최근에 한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오락 프로그램을 예능이라고 하지? PD인 친구한테 물어보니, 그 PD말고 방송PD 방송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 때는 소위 '포맷'이라는 게 필요한데, 이는 마치 함선의 형태를 유지하는 용골과 얼추 비슷한 거라 보면 된다. 한국은 일본에서 이 포맷들을 수입해서 방송을 모방하지. 이렇게 만들어진 한국의 방송 프로그램은 일본으로 역수입되거나, 동남아 미주 등지로 가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의 연예계나 오락 방송을 '예능계'라고 부른다. 전통문화의 전수가 그야말로 폭망했다고 여겨지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연예인들은 개화기 때나 심지어 에도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예능계에 종사하는 집안 출신 배우들이 많다. 예를 들면, 한자와 나오키에 출연한 가카와 테루유키의 부계 집안은 개화기 때부터 가부키를 전수해오고 있고, 모계 집안은 대대로 다카라즈카를 전수해오고 있다. 즉, 우리로 치면 엄마 아빠 집안들이 모두 약 200여 년 동안 판소리나 민속극을 해오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런 배우들이 일본엔 정말 엄청 많다! 바로 예능은 일본 예술인() 집안의 노가쿠()가 합쳐진 말이다. 게닌도 여기서 나온 말이지.


한국에서 예능이 쓰이기 전엔 오락이라고 했는데, 조선 시대에는 '재인'이라고 불렸다. 신량역천이라고 해서 천대를 받았는데, 한국의 전통문화 계보가 처참히 무너진 건 바로 이 천대에서 비롯된다. 물론 조선 후기 정조가 죽고 세도기 때에는 천대시하는 풍습이 줄어드려 했지만, 그땐 나라가 망하고 전국적으로 민란이 끊이지 않아서 먹고 살기 너무나 힘든 시대였다.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는데 판소리나 탈춤이 웬말이겠냐. 엄청난 사치였지. 게다가 이것들은 높으신 양반들이 한양 도성에서 기생집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노류장화라는 말이 왜 나왔겠냐? 하위층이나 상위층이나 민속풍습의 계보를 이을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연유가 있는데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어를 끌어다 쓸 수 있냐 그 말이다. 예전에 일본어 번역할 시절에 동료가 번역이 아니라 해석을 하길래. 이거 우리말로도 번역을 해야지 하고 말했더니, 우리말을 뭘로 표현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번역가들은 우리말을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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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언중이 많이 쓰는 외국계 어휘를 조금만 정리해보면


가위(여진어), 우리말: 없음

메주(여진어), 우리말: 없음

보라매(몽골어), 우리말: 없음

수라상(몽골어), 우리말: 없음

소방관(일본어), 우리말: 금화군

경찰(일본어), 우리말: 포졸, 종사관

(*개화기 때까지만 해도 경찰은 조선에서 동사로 '경찰하다'로만 쓰였음)

행정(일본어), 우리말: 왕실, 조정

사회(일본어), 우리말: 없음

(*군역, 요역, 향약에서의 두레, 시전 외에 사람들이 일정 수 이상 모이면 관찰사가 강제로 해산시켰다)

민주주의(일본어), 원래 한국어: 용담유서에서의 인내천(대외적으로 설파하면 능지처참 당했음)

신경(일본어), 우리말: 없음

적혈구(일본어), 우리말: 없음

대통령(일본어), 우리말: '백리새천덕'이라는 청나라어 차용

총리(일본어), 우리말: 영의정, 혹은 대광보국숭록대부

방송(broadcasting, 일본어), 우리말: 없음(방송은 조선에서 죄인을 풀어줄 때 지금의 석방의 의미로 썼음, 한자도 동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