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장인지 뭔지로 가는 동안 시즈오카의 말은 아무리 기다려도 끊기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말을 하면 통역을 위해 자막을 다 읽어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싶었으나, 시즈오카가 아무렇지도 않게 버스를 자율주행 모드로 바꿔놓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진작에 자율주행으로 해놓지 않았냐고 하자 시즈오카는 그저 운전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고 답했다. 순간 벙쪘다.
그렇게 토크의 지옥이 버스를 엄습했다. 그러나 유혜림은 그리 싫어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 대화의 화제는 북한 내전이라느니 백두산 폭발이라느니 하다가 자기는 뭘 좋아한다느니 자기가 리와인더에 왜 왔냐느니 하는 개인적인 정보까지 넘어갔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이 정도면 슬슬 질려왔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들은 린장 시에 도착했다. 린장 시는 압록강변에 있는 도시이다. 즉 북한 국경과 맞닿아있다는 뜻이었다. 이곳에 왔다는 것은 이제 이 도시가 백두산 분화로 초토화될 것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기에 평범한 일상이 감도는 도시를 보며 소름이 돋기도 했다.
의료버스가 멈춘 곳은 린장의 한 호텔이었다. 외관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호텔 느낌이었다. 시즈오카, 미야자키, 유혜림이 차례로 호텔 주차장에서 내렸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내렸다.
시즈오카와 유혜림이 짐들을 하나씩 내렸다. 미야자키도 그녀의 몫을 하고 있었다. 시즈오카가 3D 프린터를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른 손에 의료장비와 여행가방을 차례로 내렸다. 나도 따라서 여행가방을 내렸다.
안쪽을 돌아보니 무언가 가방에 많은 것 같았다. 시즈오카도 짐이 많으니 다른 사람들도 이정도겠거니 했다.
내 짐이라고는 작은 여행가방이 끝이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무어라도 돕고 싶었기에 나는 안에 있는 가방을 아무거나 집어들었다. 내 근처이자 조수석 근처에 놓인 가로로 살짝 긴 가방이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 가방은 괜찮아요!"
유혜림이 얼른 그 가방을 채갔다. 무슨 일인가 하고 그녀의 표정을 보니 순간 공포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큰 잘못을 저질른 것 같다는 촉에 바로 손을 뺐다. 
시즈오카가 그걸 보고는 말했다.
"그 가방은 유혜림에게 맡겨주세요. 그런 게 있어요. 그래도 성의는 감사히 받을 테니 대신에 이거 들어주세요."
시즈오카가 건넨 것은 크기가 좀 되는 철제 서류가방이었다. 나는 그것을 건네받았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이후 시즈오카를 필두로 우리들은 호텔에서 체크인을 했다. 이미 방을 예약해놓은 듯 일사천리였다. 우리들 4명은 짐들을 들고 방으로 갔다. 보아하니 3성급 호텔이라 싼 것 같았다.
방에서 짐을 풀었다. 철제가방, 여행가방, 노트북 가방 같은 가방들과 이런저런 각종 기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뭐하는 기구인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시즈오카는 오자마자 기구를 하나 돌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에요?"
"아, 이거 3D 프린터에요. 오면서 버스에서 말씀드렸듯 제가 내과의사잖아요? 미래에서는 나노로봇으로도 절단 같은 것만 빼면 대부분 충분히 커버칠 수 있거든요. 하현일 씨의 뇌출혈도 그걸로 해결한 거고요.
그럼 나노로봇으로 못하는 수술 같은 건 어떻게 하게요? 그 부분은 이제 외과가 맡는거죠. 외과 시술은 저랑 같이 리와인더 소속이신 팡 씨랑 푸르니에 씨가 외과의사인데 그 분들이 하는 거에요."
이 때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 사람 뭐 하나라도 있으면 바로 말이 수도꼭지처럼 터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근데 그 분들은 외과의사라 수술 전문이잖아요. 그래서 내과의사인 제가 이 나노로봇들을 그쪽에도 배분해드려야 하거든요. 그쪽도 나노로봇 3D프린터 있어서 원격으로 조작 가능하긴 해요."
나는 그 말을 뒤로 하고 내 짐을 정리하고자 했다. 아무리 갚을 은혜가 있다고 해도 이건 조금이나마 피하고 싶었다.
"아 그리고 이거 있잖아요. 하현일 씨가 가져온 가방이요.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여드릴게요."
시즈오카가 철제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이게 나노로봇이라면서 설명에 들어갔다. 그가 자기 전문분야라 눈이 아까보다 더 초롱초롱해지고 더 신나게 설명하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나는 적당히 호응해주고 보름이 넘도록 개봉되지 않았을 여행가방을 열었다. 그러자 묵혀있던 서류뭉치가 쏟아져나왔다. 나는 종이들의 범람에 허우적대면서도 중요한 것 하나를 이제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뉴호프벤처캐피탈과 샤카넬의 계약을 잊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오늘은 11월 4일 수요일. 원래 투자금 계약을 해야 했던 10월 8일 목요일로부터 어마어마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 정도라면 계약은 이미 파기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나는 바로 연락처에서 뉴호프벤처캐피탈을 찾아 연락했다. 또로롱 하는 수신음이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화가 연결되었다. 잠시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메시지. 처음에는 중국어였다가 나중에 영어로 바뀌는 기계음이었다.
"뉴호프벤처캐피탈은 11월 1일부로 파산하여 해산됩니다. 전화를 걸어주신 분들께 양해의 말씀 전해드립니다."
파산.
확실했다. 길고 길었던 샤카넬의 투자 유치 계획은 좌절되었다. 겨우 찾은 유일한 투자원의 소실은 샤카넬의 종말을 뜻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순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얼어붙었다. 나의 모든 것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채경이가 세우고자 열정을 다했던 로봇회사 샤카넬은 이렇게 세상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걸까.
눈에 눈물이 방울져 흘렀다. 볼을 타고 목까지 흘러내리는 물이 차가웠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류뭉치를 정리하고 있던 손에 힘이 팍 들어갔다. 그리고 있는 힘껏 서류뭉치를 벽에 던졌다. 서류뭉치가 벽에 탁 하고 부딪히더니 힘없이 떨어지며 뭉쳤던 종이들이 나풀거렸다.
순간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팔소매로 한 쪽 씩 눈을 닦았다. 나는 푹 젖은 양쪽 소매를 뒤로 한 채 무기력하게 벽에 이마를 기대고 앉았다.
"다이죠부까?"
시즈오카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은혜고 뭐고 과거의 은혜도 이렇게 산산조각이 났는데 이번 것도 해봤자 뭐하나 싶었다.
"다이죠부까?"
"괜찮으시녜요."
내가 계속 시즈오카의 말을 무시하자 내가 못 알아먹는 줄 알았는지 유혜림이 통역을 하며 거들었다. 대답으로 뭐라도 해야 했지만 나는 계속 어린 아이처럼 울기만 했다.
얼마나 가만히 울었을까. 문득 리와인더가 시간대가 더 빠른 차원에서 왔다는 것이 생각났다. 저쪽 세계에서 나는 어떻게 했을까? 혹시 내가 지금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나는 드디어 말을 꺼냈다.
"혹시 그쪽 세계에서 샤카넬은 어떻게 됐나요?"
"샤카넬이요? 그게 뭔지..."
유혜림이 반문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샤카넬이 한국 사람조차 이름 하나 모르는 회사가 됐다고 생각했다. 평행세계라도 다르지는 않구나 싶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무기력하게 답했다. 시즈오카도 분위기를 느꼈는지 아까부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로봇 회사요. 창립자 8인의 이름 앞글자를 따서 지은 로봇 회사요."
"잠시만요, 찾아볼게요."
유혜림이 바로 미야자키에게 뭐라고 일본어로 말했다. 미야자키가 바로 뭔가를 찾더니 갸우뚱했다. 그리고는 유혜림의 스마트폰으로 전송했다. 유혜림이 그걸 읽고 확인차 물었다.
"혹시 이름이 하현일이라고 하셨던가요?"
"네."
"그리고 창립 동업자로 남채경 맞아요?"
"네! 맞아요!"
뭔가 정보가 나온 듯 했다. 나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맞다고 과장되게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희 세계에서는 이름이 세나칼로 지어진 것 같은데... 히카리, 콧치 키테.(이리 와봐.)"
"코레데 앗테루미타이다케도.(이거 맞는 것 같은데.)"
알 수 없지만 놀란 눈치였다. 유혜림이 말했다.
"저희 세계에서는 샤카넬이 아니라 세나칼이라는 이름이에요. 그리고... 당신 정말 대단한 분이셨어요. 세나칼이 저희 세계에서는 대기업이에요."
"진짜요? 그게 정말이에요?"
한 줄기의 빛이 보였다. 이제 그 세계의 길을 따라가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드로이드 전문 회사로 대기업에 들었어요. 2021년 위례 대지진 후 경제 회복을 위해 지원한 중소기업에 들었고 여기서 쭉쭉 성장해서 대기업까지 갔어요."
"그럼 이 세계의 회사도 살릴 수 있다는 거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망은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입 밖으로도 나왔는지 시즈오카와 유혜림도 기분이 회복된 듯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대기업의 공동회장이라니. 약사봇 파르케이(Phar-K)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온갖 타입의 안드로이드를 만들게 되죠."
파르케이? 아니야. 뭔가 엇나가고 있었다.
"파르케이요? 저희가 처음으로 만든 거는 안내용인 데스커(Desker)인데..."
"예? 잠시만요, 그러면 이번 평행우주에서 뭔가 바뀐건가?"
"그리고 저는 회장이 아니라 대표이사인데..."
"뭐야 잠깐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역시. 뭔가 엇나가고 있는 게 맞았다. 이 상황에서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러면 혹시 남채경은...?"
"남채경은 공동회장이에요."
"그럼 혹시 언제 죽었는지...?"
"2055년 2월 7일에 죽었대요. 하현일과 남채경이 같이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이라고 뜹니다."
그 순간 가슴에서 무언가 밀려왔다. 그 세계에서 채경이가 살아있고 회사는 성공했다. 그리고 이번 세계에서 채경이는 죽었고 채경이의 꿈은 짓밟혔다.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세나칼 설립이 언제죠?"
"2016년이네요. 하현일 씨 군대 육군 만기전역한 다음에 창립했어요."
우리 세계에서 창립일은 2014년. 여기도 엇나갔다.
"그러면 파르케이는 누가 기획했죠?'
"잠시만요... 하현일 남채경을 중심으로 한 공동기획이네요."
그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나는 절망적인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 때문에 남채경이 죽었다. 그리고 나는 남채경의 뜻을 잇겠다면서 엉뚱한 길을 들었고 그로 인해 샤카넬이 해산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나 때문이다.
아까 품었던 희망이 다시 한 번 날아가 죄책감으로 바뀌어 나의 명치를 후려쳤다. 나에 대한 회의감, 남채경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자괴감이 합쳐져 나 자신이 미워졌다.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혹시 근처에 한적한 곳 없을까요?"
"죄송하지만...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혼자 있고 싶어요."
바로 문 앞을 박차고 나갔다. 호텔 방문이 저절로 닫혔다. 나는 무작정 달려 복도의 어느 모퉁이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나는 벽에 머리와 주먹을 부딪히며 펑펑 울었다. 나 자신이 미웠다.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부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울었을까. 두 명의 사람이 갑자기 뛰어깄다. 내가 왔던 곳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고 내가 지금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호텔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졌다. 그 폭발과 함께 먼지바람이 불었다. 백두산 분화인가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분화는 이틀 뒤. 날짜가 맞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이 났나 싶어서 폭음이 들린 쪽을 보았다. 내가 동행한 리와인더 일행의 방이었다. 나는 놀라서 바로 달려갔다.
먼지가 곧 잦아드는 동안 나는 그곳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총을 들고 있는 2명이 방의 안쪽을 노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방 안쪽에 있는 3명이 타깃인 것 같았다.
일촉즉발이었다. 이대로 두면 시즈오카, 유혜림, 미야자키가 위험했다. 나는 바로 그들을 살리고 싶었다. 이들이 죽기라도 하면 나도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판단보다 몸이 먼저 앞섰다. 나는 그들 중 한 명을 맨몸으로 덮쳐서 넘어뜨렸다. 피가 나오든 말든 일단은 그건 상관 없었다.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이것도 못 하는 놈이라면 내가 망가져버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