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심심해서 예전에 장편 소설로 구상했던 내용의 일부를 써봤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쓰고 싶은 부분만 빼서 쓴 거긴 한데요...ㅎ

아무래도 장편을 본격적으로 쓰는 건 힘드니까요

대충 중?세 판타지 세계관입니다

+초보 글쟁이로서 어떤 조언이든 환영



***



오늘도 나는 새벽같이 찾아온 피터가 들뜬 목소리로 일으키는 소란에 잠을 깼고, 나를 잡아끄는 아이의 손길을 따라 산에 올랐다.

지나는 자리마다 머리 위로 늘어선 나뭇가지가 밤새 쌓아둔 차가운 눈을 흘려 잠기운을 쫓아 주었다.

이제야 서서히 숲길 위로 찾아들기 시작하는 새벽빛을 등진 채, 벌써 저만치 앞에서 맑게 웃으며 나를 기다리는 모습.

차디찬 겨울 바람을 맞고서도 부드럽게 팔랑이는 금빛 머리카락은, 자유롭게 설원의 하늘을 누비는 나비의 날개를 닮았다.

머리카락과 같은 금빛을 품은 한 쌍의 눈동자가 언뜻 장난스러운 빛을 띄고 이쪽을 비추더니, 이내 생긋, 가볍게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언제나 이른 아침부터 이러는 게 지치지도 않는 건지.

새파란 새벽공기 속으로 지친 숨을 내뱉는 나를 향해 그가 손을 뻗어왔다.

나는 그것을 기껍게 받아들이며 마주 손을 뻗다, 문득 피터 옆의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케이티는?"


"응? 아, 오늘은 피곤하대서."


"뭐...?"


별 일 아니라는 듯 나긋나긋한 어조로 대답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빠지고 싶다고 했을 땐 울고불고 난리를 쳤으면서?!'


"그, 그럼 나도...!"


"누나는 나랑 약속했잖아."


"윽."


실수였다.

작년 이맘때에 미처 꽃을 준비하지 못해 혼자 침울하게 앉아 있던 아이를, 나는 지나치지 못했다.

그를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에 그만 감당 못할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 해에는 누구보다 많은 꽃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함께 찾아주겠다는, 다르게 말하면 그가 만족할 때까지 이 끔찍한 새벽 등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


우리처럼 작은 산골 마을도 매년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분주해진다.

어떤 노부부는 추운 겨울날 이웃과 온기를 나눌 소박하지만 따스한 음식을 준비하고,

누군가의 어머니는 반짝이는 순수함을 간직한 아이들을 놀래키기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선물을 숨겨두었으며,

아이들은 예쁜 장식으로 집 곳곳과 트리를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이것은 작은 마을이 다가오는 특별한 날을 맞이하는,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한 정경이리라.

다만 한 가지, 우리 마을에서 사용하는 크리스마스 장식은 조금 특별했다.

'루시아'.

차가운 겨울 숲을 비추는 한 줄기의 빛을 품은 꽃.

꽃잎 사이사이 깊이 스며들어 있는 옅은 마력 때문인지, 그 꽃은 그 어떤 장식보다도 아름다운 빛을 냈다.

그 꽃이 피는 자리는 언제나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을 만큼 깊은 산속, 그중에서도 가장 춥고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곳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연 상태 그대로 두는 것보다 사람 손을 탔을 때 더 오래 꽃을 피워내는, 조금은 이상한 꽃이었다.

전체적으로 장미꽃과 닮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단단하게 여물지 못한 가느다란 줄기엔 가시 하나 없었다.

약하디 약한 은빛 꽃잎만을 애써 날카롭게 벼린 채, 추운 겨울을 버티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분명 그 작고 연약한 꽃은 마력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겠지.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찾아드는 이맘때가 지나면, 꽃을 지켜주던 마력은 어김없이 제 스스로를 망가뜨리곤 도망쳐 나갔다.

도망친 마력은 멀리 저 깊은 산속까지 퍼져 나가 내년 이맘때에 또다른 루시아로 피어나겠지.

하지만 남겨진 꽃은 너무나도 약해서, 작은 바람에도 쉽게 시들고 부스러져 버렸기에.

우리를 포함한 마을의 많은 아이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전부터 루시아가 피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찾은 꽃이 시들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돌봐주고, 이브날 밤에 마을로 가져와 장식한다.

우리는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힘겹게 피워내어진 꽃봉오리에 자그마한 의미를 부여해 주기로 했다.

그렇게 그것은 이 마을만의 관례가 되었다.


***


망했다.

주변에 피터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운 세 글자였다.

내가 어느 순간부터 방향을 잘못 들어 길을 잃은 건지, 들뜬 피터가 나를 두고 먼저 앞서나가 버린 건지는 모른다.

전자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주변 산길은 이미 몇 번이고 지나본 익숙한 곳이라, 내게 있어 마을로 돌아가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테니.

하지만 만약 그가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간 나머지 길을 잃어버린 거라면.

이 산은 너무도 넓고 또 복잡하기에, 이곳을 제집처럼 누비는 그로서도 간단히 마을로 돌아올 순 없을 것이었다.

늦기 전에 마을로 돌아가 도움을 구하는 편이 나을까.

아니, 너무 성급한 결론일지도 몰라.

우선은 주변을 좀 더-

그때, 새벽에 잠긴 고요한 숲길을 가르고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한겨울임에도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 전에 없이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었다.

어느새 돌아온 피터가 떨리는 손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저기 누가 쓰러져 있어...!"


***


피터에게 이끌려 따라간 깊은 숲 안쪽, 그 안에서도 구석지고 어두운 수풀 속을 밝히는 옅은 푸른빛.

요 며칠간 우리가 애타게 찾아 해매던 루시아였다.

꽃이 비추는 수풀 아래, 작은 눈더미 속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아마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이 꽃이 흘리는 빛을 따라온 듯 했다.

나이는 많아 봤자 피터 또래 정도일까.

엉망으로 흐트러진 긴 은발은 본래의 색채를 잃은 채, 군데군데 힘없이 끊어져 있었다.

몸에 꼭 맞는 군청색 제복은 흙투성이에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전신이 온통 자잘한 상처로 뒤덮여 성한 곳이 없었다.


"주, 죽은 건 아니지...?"


"응."


다행히 심장은 미약하지만 아직 뛰고 있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피터를 다독이려다 문득 이변을 눈치챘다.

지나치게 창백한 낯빛과 불안정한 호흡.

나는 서둘러 미미하게 떨리는 아이의 몸을 받쳐들었다.

열을 재기 위해 이마에 올린 손바닥에 녹아내릴 듯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


아이가 눈을 뜬 것은 크리스마스가 지나고도 일주일 후였다.

세라 아주머니 말로는, 저런 옷차림으로 겨울 산을 몇 시간이고 헤매인 것을 약한 몸이 못 버틴 탓이라고 했다.

우리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오랜만의 방문객에 대해 궁금해했으나, 그는 자신과 관련된 정보는 그 어느 하나 기억해내지 못했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경위는 물론이고, 그 자신의 이름이나 나이조차 말이다.

하는 수 없이 임시로라도 부를 이름을 정하려 했을 때, 피터는 그에게 루시아의, 가시 없는 꽃의 이름을 주고 싶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너는 그저 '닮았잖아?'라며 언제나처럼 웃어 보일 뿐이었지.

그래, 확실히 닮았다.

달빛을 받은 듯 은은하게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도, 바라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위태로움이 느껴지는 모습도.

그가 아니라면 이 이름이 어울릴 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닮았기에 주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이 이름을 가지면, 너도 다음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루시아와 함께 부스러져 사라질 것만 같아서.


***


그 아이, 루시아는 말수가 적었고, 잘 웃지도 않았다.

언제나 무엇인가 결여된 듯한 무표정.

아무것도 담지 않은 공허한 호수 같은 눈동자가 조용히 침잠했다.

마치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마을의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피부는 시체의 그것처럼 생기 없이 창백했고, 날카로운 눈매는 악마와 같은 섬뜩한 인상을 아로새겼다.

주민들은 그를 걱정했지만, 일부는 그의 특이한 겉모습이며 늘상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것이 불길하다고 여겼다.

아예 마을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또한 외로운 아이였다.

단지 너무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었기에, 표현이 서툴렀을 뿐.

여름날 냇가에서 처음 본 그의 웃음은 여느 아이들의 것과 같이 사랑스러웠다.

머리 위로 날아드는 단풍잎을 잡아채고 순수히 기뻐하던 네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윗옷 단추를 잃어버리고 속상해하던 모습,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사소한 불만을 털어놓던 모습,

어두운 밤에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던 겁 많은 너의 모습도 모두.

이런 아이가 어쩌다 웃음을 잃어버렸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부디 그가 이 마을에 오래도록 머물며 웃음을 되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었다.

그것이 지나친 낙관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생각인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