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슴푸레한 하늘의 광야도, 축축한 잎새의 눈물자국도 사라진 길고 긴 어둠의 시간. 잡히지 않는 앞을 손뻗으며 만져지지 

않는 실체를 더듬고 나아가는 남자의 뒷편으로 수많은 길들이 다가와 그 귓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참을 나아가던 

남자는 돌연 뒤를 돌아서며 어깨를 쭉 펴고, 앞인지 뒤인지도 모를 그 시커먼 공간 어귀서 보이지 않을 나를 향해 엄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이름은 오지만 디아스, 왕중의 왕이라. 이 몸의 위업을 보라, 강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차디찬 조소를 머금고 광오한 비장이 돋보이는 얼굴빛으로. 열정이 생생하게 살아남아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신감 넘치는

풍채로서.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한참동안 이 길고 먼 어둠 속에서 빛이 났다. 


 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평지의 풍파는 그의 몸에도 여김없이 지나쳐갔다. 완전히 부서져버린 그 자리 위에는 부서진 두

상과  무너져 달아버린 두 다리만이 남아 있었다.  곁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오로지 시커먼 어둠 뿐. 그저 머나먼 곳까지 

끝없이 펼쳐진 어둠만이 그의 삭은 육신을 품에 안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뭐? 오지만 뭐?"


옆에 앉은 여자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니야, 그냥 그렇다고. 뭐. 옛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상관이 없다면야 상관이 없는 이야기겠지. 더 말해도 못 알아 들을것 

같으니 너한텐 그만 할련다."


 고개를 내저으며 할 말이 더 없다는듯이 자리를 정리하는 남자.


".....하다 말꺼면 말은 왜 꺼내가지고."


 그런 남자를 보며 걸걸한 말투로 툴툴대는 여자의 목소리.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그 둘 사이에 머물렀다.  


 둘 사이, 눈 앞에는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남자는 옷을 세탁을 한 지 한참 되었는듯, 먼지가 여기 저기 묻어있어 

지저분한 파랑 패딩을 입고 있었다 . 여자는 소위 떡볶이 코트라고 하는 회색 더폴코트를 입었는데 상대적으로 남자와는 

달리 꽤나 깔끔을 떠는 성격이었는지  외투의 털 끝에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불 앞에서 멍때리던 두 남녀. 더운듯, 남자는 패딩을 벗고 그 안에 기워입은 외투도 벗어 던졌다. 달라붙는

반팔의 u넥 셔츠 하나만이 남자의 상체를 가리고 있어  남성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


 침을 꿀꺽 삼키며, 볼을 붉히고 시선을 좌우로 돌리는 여자. 남자는 그런 여자의 표정을 단박에 눈치채고 씨익 웃는다. 귀여워서

볼을 만져 줄까, 머리라도 쓰다듬어 줘야 하나 생각하던 남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긴 여정동안 걸어오며 여독이 많이 쌓였다.  무너진 정부와 미쳐버린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마주치는 것 만으로도 서로에게 

날붙이를 건내었다. 그것이 곧 문안 인사며, 그것이 곳 의례적인 행동이 되어버린 이 세계에서 둘은 한참을 걸어 들어와 드디어

편히 발을 붙일 이 폐허에 도착했던 것이었다.  


 남자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따스한 불빛에 남자는 꾸벅 꾸벅 잠에 빠져드려하던 찰나,


"저기."


정적을 깬 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응?"


잠긴 목소리로 여자의  질문에 남자는 대답했다.


"....아니다."


고개를 내저으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여자.


".....왜?"


"그.....부탁이 있는데."


 여자는 쭈뼛쭈뼛, 몸을 베베 꼬며 양 검지를 바닥에 탁탁 쳤다. 콧잔등이 붉어지며 시선을 갈무리하지 못해 여기저기를 

돌려보았다.



"빨리 말 해. 안 그러면 잘 꺼니까."


".....아줘."


그녀는 바닥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응? 뭐라고?"


"안아.....달라고. 무서워. 혼자 있기."

 

 그리 말하며,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몸을 웅크렸다. 남자의 품에 그대로 안기는 왜소한 몸집. 

웨이브가 쳐진 긴 갈색 머리카락에서 그녀의 체취가 콧잔등 쪽으로올라왔다. 


".....나 아직, 허락 안했는데."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남자는 자신의 품에 기대어 뒤돌아선 여인에게 말했다. 


"조금만, 이대로 있어."


여인은 부끄러움기 가득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얼굴을 보고 싶어 남자는 여자의 고개를 젖혀보려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돌리기 싫어 몸을 젖는다. 하지만 남자는 포기 할 

생각이 전혀 없는듯 턱을 잡고 천천히 여인의 얼굴을 자신의 쪽으로 돌린다.


"....."


"....."


 고개가 돌아가고, 마주친 두 사람.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 의해 반짝였다. 한뼘 사이도 안되는 두 사람의 간격은

천천히 좁혀졌고 곧 두 사람의 입술은 서로에게, 맞닿았다.   


 입술을 뚫고 들어가는 두 사람의 혓바닥은 마치 원래 둘이 하나였던 것 처럼 서로를 감싸 안았다. 열중해가며 두 사람은 천천히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옷을 하나 둘 벗어던졌고 곧 이어 완벽한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 서로에게 서로의 몸을 비비적 거렸다.


 바람에 휘날리는 불꽃처럼, 여인의 젖가슴은 위에서 아래로 흔들렸다. 무르익은 과실과도 같이 탐스런 양쪽 가슴은 남자의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흔들렸다.  장작불을 등지고 선 역광에 여자의 아름다운 실루엣이 드러났다.  환희에 젖은 여자의 표정과 허릿라인

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빛에 반짝였다.  


 배꼽을 타고 튀어오르던 여자는 뒤집혀 바닥에 등을 대고 신음하고 있었고, 남자는 여자의 오른손에 자신의  왼손을 깍지끼고 

여자와 눈을 마주치며 폭발할 것만 같은 하반신의 마지막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


"....."


 뜨거운 기운이 여자의 몸 속으로 퍼졌고,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남자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춘다. 뜨거운 남자의

콧김이 여자의 귓볼에 닿았고 남자의 뜨겁고 거친 숨결이 입가를 타고 내려와 목 근처까지 닿았다.  흐르는 땀이 장작 불길에 내

비춰 반짝거렸고 하나가 된 두 사람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세상에서 모든것을 가진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

게 껴안고 있었다.  




 "씨발....이게 뭐야?"


 곧추섰던 녀석이 웅크러들었다. 배우가 예뻐서 봤었는데, 내용은 대체 왜 이모양이란 말인가. 하여튼, 이놈의 불난서 영화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바지를 올렸다. 오래 입은 덕택인지 지퍼가 중간에 고장나, 살짝 중간에서 한번 다듬고

다시위로, 올린다. 끝까지 지퍼가 올라간 것을 확인하곤 영화를 끄고 인터넷을 켰다. 


 "아, 맞다, 세탁기. " 


 내 정신좀 봐라. 빨래를 눌러놓고 한참을, 영화를 탐독하느라 깜빡했다.  빨리 물이라도 좀 빼고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후텁

지근한 여름에 괜시리 빨래를 더 놓아뒀다간 세탁물에서 걸레냄새가 날 것이 분명했다. 몇벌 남지도 않은 옷인데, 그러면 안돼

지. 


 자리에서 일어나 세탁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내 눈속에 너 그리고 니 눈속에 나. 우린~ 야경처럼 반짝거리네."



 옥상에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들고 올라온 육중한 빨레통에 담긴 옷가지들을 하나씩 하나씩 차곡차곡 건조줄에 넌다. 

긴 옷가지나 이불 따위는 밤 바람에 날아갈까, 걱정되어 빨레집게로 하나씩 하나씩 건다. 



"나는 널~ 채우는 샴페인, 너는 날~ 깨 우는 카페인."


 흥이 난 나는 노래를 목청이 터질듯이 크게 부르면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밤 바람사이에서 넝실넝실 몸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사람이 없어진 도심의 고층 빌딩 옥상서 바라보는 야경은, 절정이었다.  별은 한가득히, 남색빛 카페트같은

밤하늘 위에 빼곡히 박혀있었다. 간간히 보이는 유성이 옆으로 길게 늘어지며 아름다운 이 밤에 흥을 크게 돋구고 있었다. 불꺼진

도심의 건물들 사이 사이로, 두 손으로도 가릴 수 없을만큼 크게 뜬 보름달이 서늘하게 푸른 빛을 보내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대와 나의 밤이~ 아름다운 밤이~"


 역시나 소리를 듣고, 벽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녀석들이 있었다. 네발이 달린채로, 이빨은 흉측하게 겹겹으로 난 괴물들이 30층은

더 되어보이는 이곳까지 소리를 듣고 올라왔다. 밤에 올라왔으니 뭐, 별 수 없는 일인 것이지. 나는 빨래통과 함께 들고 온 몽둥이를 들고, 타고 올라오는 짐승들의

앞으로 움켜잡으며 쇄도하는 괴물들의 공격들을 피해가며 노래를 이어갔다. 


 몽둥이에서 피가 튄다. 나의 공격 한번 한번에 괴물들의 오체가 분시되며 날아간다. 나는 그들의 검은 피를 뒤집어쓰며 하나씩

하나씩, 그들에게 최후를 선사한다. 


"영원하도록 집에 가지 말아요~."



 신이나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몽둥이를 휘두르며 나는 서늘하게 부른 밤 바람을 맞이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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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데로 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