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지금으로부터 30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시타델 방어의 마지막 보루였던 힐데의 광산지대는 여전히 그 시절에 멈춰 있다수십 수만의 신과 마법사마녀와 야수들이 뒤엉켜 다투다 스러진 탓에수많은 원한과 의지가 부정하게 얽혀 유독한 안개가 되었다원래는 긴 산맥을 따라 수많은 광산이 모이고 모여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지하 구획이 존재했지만전쟁의 여파로 지면과 산등성이가 증발하고별들이 떨어진 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멍이 뚫렸다과연 이런 곳에서 다시금 생명이 싹틀 수 있을까

 

주위를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여과기가 진한 보라색으로 변했다서둘러 장치를 버리고 가방에서 새 여과기를 꺼내 머리에 쓴다한시라도 이 갑갑한 장치를 쓰고 있지 않으면 숨조차 쉴 수 없다니환장할 노릇이다

 

지는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떠나가자머리에 광구를 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련한 야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여과기를 착용하고 있어 자세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았지만남부 사투리 특유의 거친 억양과 사용하는 강렬한 어휘들입고 있는 검은 사제복과 손에 든 태양의 홀을 통해 이들이 아포피스의 추종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대 태양의 신인 아포피스는 전쟁이 끝난 뒤 휘하의 사제 중 하나인 아쉬르에게 자신의 신좌를 넘겨주고 내려온 지 오래였지만, 그는 여전히 그때만큼 강대하고, 또 용맹하다. 태양의 추종자들이 여전히 아쉬르가 아닌 아포피스를 섬기고 있는 이유도, 오직 그만이 태양의 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신좌에 앉은 신을 섬기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정교회의 다른 분파들과의 마찰이 꽤 잦다고 들었으나, 그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태양을 섬기는 이들은 오직 태양이 인도하는 길을 따르면 된다나.

 

그들은 시타델에서 출발해, 대륙의 동쪽 끝을 거쳐 다시 시타델로 돌아오는 긴 수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구태여 이런 음험한 곳에 야영지를 만든 건 마지막 순간까지 고행의 의미를 몸에 새기기 위함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후에도 한동안 각자의 고향 이야기와 순례 중에 만난 숲 엘프들샤가의 험준한 빙원지대와 웬디고고대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짐승들처럼 가지각색의 흥미로운 모험담을 늘어놓았고이야기를 마칠 즈음에는 이미 해가 져버린 탓에곧바로 시타델로 들어가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희미하지만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고통과 비통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는데이런 마경에서도 세상모르고 잠들 수 있다니그들의 담력은 정말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신도들과 헤어진 건 다음 날 해 뜰 녘이었다. 그들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준 태양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짐을 싸서 산마루를 내려왔다. 그로부터 꼬박 반나절을 구불거리는 산길을 따라 걸으니, 그제야 시타델의 높은 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