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벼운 손인사로 재혁이에게 화답했다.

 

  "어어, 너도 고생했다." 

 

  "보람찬 하루일을 끝마치고서~"

 

 누구야, 하루의 마무리를 칙칙한 군가로 마무리짓는 놈이. 안 그래도 자기 군기 이야기하니까 바로 군가가 튀어 나오네. 나는 프론트 앞에 비치된 고객들을 위한 음료수 바에서 커피를 뽑는 형우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그러거나 말거나 노래를 주욱 흥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무리 인사를 하기 위해서 백오피스 안을 둘러 보았는데, 지배인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다시 프론트로 나와 재혁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배인님은 어디 가셨어?" 

 

  "뒷쪽으로 나가시던데요. 오늘은 일찍 들어간다고 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피를 다 뽑고 프론트에 서 있던 형우가 쾌재를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이렇게 일이 늦게 끝나면 주말이면 강만수 지배인 역시 늦게 퇴근을 한다. 지배인이 일찍 들어가면 일찍 들어갈 수록 프론트 직원들의 교대휴식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이 녀석들은 모두 지배인의 조기퇴근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일반 회사에서 부장 눈치보며 퇴근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는 없다. 

 

 "아싸! 야, 재혁아, 나 일단 먼저 올라간다. 고생해라."

 

 "...시던데요, 좀 있다가."

 

 한국 말은 끝까지 들어야 된다. 재혁이가 잘라먹은 말을 이어 붙이자 마자, 정문에서 지배인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이없는 미소를 띄우며 들어오는 모습이, 이미 형우가 했던 말은 모두 들은 모양이다.

 

 "어딜 먼저 올라가?"

 

 "아, 아뇨, 형님. 엘리베이터 올라간다구요."

 

 "이 새끼 이거 빠져 가지고. 쉬는 시간 정해져 있는 거 몰라? 아직 손님 빠질지도 모르는데 재혁이 혼자 있다가 방 빠지면 어쩔라고?" 

 

 지배인의 질책에 형우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그런데 머리가 굽신굽신 하고는 있는데 그아래 보이는 과장된 표정은 이미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보는 사람이 모두 어이가 없어할 정도로. 지배인은 몇 마디 더 하려는 포즈로 손을 올리다, 한숨을 쉬며 다시 동작을 거두었다.

 

 "됐다, 됐어. 어차피 너한테 뭔 이야기를 하겠냐. 어쨌든 형은 약속 있으니까 먼저 들어간다. 민재야, 우식이 와서 마시는 건데 같이 한 잔 하고 갈래?"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 나온 우식이란 사람은 지배인이 데리고 다니던, 말하자면 형우 이전의 직속 후임으로, 내가 처음에 왔을 때 이곳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다. 지금은 다른 모텔에서 일한다고 하던데 아마 잠시 들른 모양이다. 

 

 "그래? 그럼 뭐 들어가고, 니네는 시간 똑바로 지켜서 쉬어. 알았어?"

 

 "네이네이."

 

 형우는 마치 간신처럼 지배인에게 손바닥을 비비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허허, 보는 내가 다 기분이 나빠지네. 거짓 아첨을 받는 당사자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지, 뭐 씹은 얼굴로 형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빨리 빠지는 것이 상책. 나는 짧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서는 모텔을 나왔다.

 쉬라톤 모텔에서 일한지 약 3달이 조금 넘었다. 물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잡은 아르바이트라지만 그래도 이 곳에서도 배워가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지금 새삼 떠오른 사람이라는 게 계기가 없으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 아까 이야기한 지배인과 형우가 이반과 류다를 그렇게 갈구는 데도 자기들 멋대로 행동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고, 그리고 내 눈 앞에 있는 달나라 소녀를 보더라도 쉽게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너 아까 옷 사오지 않았었냐?"

 

 나는 살짝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문을 열고 들어간 내 눈에 들어온 첫 번째 광경은, 마치 원래 그랬던 것 처럼 TV앞에 앉아 있는 리돌의 모습이었다. 몇 날 며칠을 봐 온 풍경인지라, 익숙해질 법도 하다. 하지만 분명, 아까 옷을 갈아입은 모습을 보았는데, 왜 아침에 본 모습 그대로, 변한 것도 없이 앉아 있는 거여? 오늘, 방금 전에 백화점에서 옷을 사 왔잖아? 집에서 입을 옷은 안 산거야?
 리돌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더니, 굉장히 몸이 뻐근한 듯 몸을 쭉 펴면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서는 천천히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성희는 실종되었을 때 그것을 올려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네가 집에서 그것을 입을 것을 말하지 않았다."

 

 ...실종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차치하고,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았나 보다. 하긴, 보통 백화점까지 가서 옷을 골라 주는데 특별히 이야기하지 않으면 집에서 입을 옷까지 골라주지는 않겠지. 


 사실 아침과 다른 부분이 있기는 하다. 집안이 개판이다. 아마 백화점가서 옷보다 집에서 먹을 과자를 더 많이 골라준 듯 하다. 지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다채로운 과자 부스러기와 껍데기들이 지금 리돌이 일어섰던 자리에서 한 발자욱도 움직이지 않고 소위 이야기하는 '문화생활'에 전념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살짝 짜증이 밀려왔다. 이 녀석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집 안에서 해 두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치는 것은 한이 없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계도하는 것이 멀고 험난하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각오... 아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해서 결정한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야기를 해서 고쳐질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바꿔야 겠지?

 

 "리돌, 저기 말이야."

 

 여기에서 여러가지 일이 복합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오른손을 높게 치켜들었다가 바닥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닥을 치우는 것에 대한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 있던 리돌은 내가 그렇게 손을 어깨 위로 올린 사이에 나에게 다가와서는, 손바닥 하나만 피면 닿을 거리에 서서 나를 마주 보고 섰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짧게 반문하고서는, 다시 손을 내릴 수 밖에는 없었다. 


 "뭐, 뭐야?"


 그러더니, 리돌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그대로 큰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아까 지적하려고 했던 과자 부스러기와 봉지가 그대로 널부러져 있는 바닥에! 

 

 "야, 야! 절 하려면 제대로 된 데서 해!"

 

 나는 깜짝 놀라 리돌의 어깨를 붙잡고서는 급하게 일으켜 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이 녀석은 팔과 이마에 과자부스러기가 잔뜩 붙인 채로 일어나게 되었다. 심지어 왼쪽 팔뚝에는 과자봉지가 붙어 있었다가, 방금 떨어졌다. 갑자기 뭐야? 사과의 뜻이라도 전하는 건가? 절은 어디서 배웠어?


 리돌은 언제나 침착한 그 말투로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민재, 오늘도 고마웠습니다."

 

 갑자기 얘가 왜 이러지? 아까 성희 씨가 밥 사주면서 예절에 대한 특강이라도 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이 녀석이 격식을 차릴 이유가 없는데? 

 

 "갑자기 왜 그래? 오늘 무슨 일 있었어?"

 

 특이한 점이라면야... 옷 산거 말고는 나는 알고 있는 게 없으니까. 아마도 다른 곳에 가지 않았을 까 지레짐작을 해 볼 뿐이다. 리돌은 이마에 묻은 부스러기를 툭툭 털어내고서는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성희와 옷을 사기 전에 한국의 오래된 건물을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한국의 노인들의 모습을 보았고, 나는 오래된 옷을 입었다."

 

 "어디 이야기하는 거? 탑골공원이라도 갔다 왔어?"

 

 리돌은 다시 손짓 발짓으로 자신이 보았던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큰 문이 있었고, 거기에서 빨간 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건물은 붉은 기둥이 달린 검은 색 지붕으로 만들어졌고 일부는 호수 위에 있었습니다."

 

 리돌은 손을 최대한 위아래로 벌려서 자신이 어떤 건물을 보았는지를 설명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오래된 옷 타령을 하는 것과 건물의 색깔들을 종합해서 보았을 때 경복궁을 갔다 온 것 같다. 하긴, 그 동안 나간 적도 없었을 텐데 이럴 때라도 구경을 보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성희 씨가 생각이 깊네.

 

 "그리고 거기에서 오래된 인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희는 민재에게 이렇게 인사하면 좋아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경복궁에서 조선시대 예법 같은 걸 가르치는 곳이 있나 보다. 절하는 법까지 배워서 온 걸 보면. 그런데 절하는 법이 남자가 절하는 법이잖아, 방금 건. 

 

 "그 다음 산책하러 백화점에 갔습니다 - 여기에서 리돌의 얼굴이 살짝 찌뿌려졌다 - 나는 거기에서 옷을 사고, 쌀을 먹었습니다."

 

 대충 동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마 옷을 사러 명동쪽으로 갔던 모양이다. 종로 등지에 백화점이 없으니,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려면 그 쪽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백화점에 갔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성희의 얼굴을 보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정말? 왜?"

 

 "모르겠습니다."

 

 리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진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이 두 사람의 외모면 같이 다녔을 때 폭발력이 장난이 아닐 것이다. 달나라에서 외모 기준이 어떨 지는 모르겠지만, 리돌이 지금 대한민국 어디에서 꿀릴만한 얼굴은 아니다. 정정한다. 꿀리는 정도가 아니라, 어디 해외 아이돌 그룹 멤버라고 해도 믿을 만한 외모다. 성희 씨야 내가 지금까지 봤던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고. 그런 사람 둘을 붙여 놓으면, 남자라면 누구라도 말을 걸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성희 씨 얼굴을 보고서는 돌아간다고? 말을 붙이려니 자신감이 떨어져서 그런가?

 

 "하여튼 나는 백화점에서 옷을 사왔고, 성희는 민재에게 가 보라고 했습니다. 네가 입고 있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면, 너는 그걸 좋아할 거라고."

 

 ...주어가 바뀐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패션쇼 한번 하고 가라고 이야기했다 이거지. 그래서 이 녀석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날아와 버린거고. 

 

 "어쨌든 그래서, 경복궁에서 절을 배워서 오늘 써먹었다 이거야?"

 

 "인사만 했습니다."

 

 "그래, 뭐. 알았다. 그건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