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가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도성은 아직 왕을 모실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정궁은 불탄 채로 버려져있었고 종묘와 사직은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였다. 화려함을 뽐내던 고관대작들의 집은 곳곳이 무너져 과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나마 멀쩡하던 육조거리의 관청 벽에는 큰 벽보가 붙어있었다. 그 앞에 선 한 남자는 잠시 글을 읽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선무공신 1등

-효충장의적의협력 선무공신 

행 장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남자는 잠시간 눈을 감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 * *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달빛은 어둠 속에 고요히 가라앉은 바다를 가르며 만물을 비추었다. 그러나 그 고요는 얼마가지 못해 부서져 내렸다. 거의 300여 척에 달하는 배들이 밤과 파도를 가르며 내려오고 있었다. 허나 평소라면 기를 높이 올리고 불을 밝혀야 할 선단이 어떠한 표식도 없이 떠가고 있다는 것이 보통의 경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었다.

이내 한 줄기 빛이 바다에서 하늘로 떠올라갔다. 조선 수군의 신기전이었다. 그 빛을 보며 어둠을 타고 내려가던 이들도, 그 뒤에 몸을 숨기고 기다리던 이들도 온 몸을 떨며 전율했다. 양쪽 다 알았던 것이다. 모든 것을 끝낼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그들의 예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침묵을 찟어발기는 굉음과 함께 관음포 일대가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양 군은 끝을 보겠다는 듯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과 고향을 해친 이들을 벌하겠다는 의지가 충돌했다.

남자는 그 수라장의 한복판, 가장 앞선 곳에 서있었다. 삼도 수군 통제사의 기함에서 대초요기가 올라간 것을 본 남자ㅡ경상 우도 수군 통제사가 이끄는 함대가 불을 뿜으며 가장 선두에서 돌진했다.  

곧 적의 중앙을 가르는데 성공한 경상 우도 수군은 아군의 대장선이 적에게 두드려 맞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방금 전 까지 치열하게 적과 교전하던 피로도 잊은 듯 맹렬하게 돌진한 이들은 이내 어떤 무기질적인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늘만 수십번은 넘게 들었던 그 조총 소리가 유난히도 섬뜩하게 들렸던 이유는 왜였는지, 아직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들의 상관ㅡ총 지휘관 이순신이 눈 먼 총탄에 쓰러졌다. 대장선에 타고 있던 모두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으나, 그 소식이 다른 곳으로 타고 가지는 못했다. 지휘권을 승계한 남자가 죽은 이순신의 갑주를 챙겨입고 대장선에 올라타 북을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곧 모습을 드러낸 해에 하늘마저 밝아와 온 세상이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살아나간 왜선은 거의 없었다.

대승이었으나, 환호하는 이들은 없었다.

남자는 그ㅡ이순신과의 추억을 기억한다. 장수라기보다는 선비라는 말이 더 어울리던 소나무 같던 사내. 병사들 앞에서는 절대로 동요를 보이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인정이 많던 사내. 백의종군을 할 때에도 울음을 참지 못한 자신보다 침착하던 그 사내를. 그에게 남은 아쉬움이 있다면, 끝까지 살아남아 이순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위정자들의 추악함을 봐야했던 것이리라.

1등 공신의 두 번째에 원균의 이름이 있는 모습을 보며 남자ㅡ입부(立夫) 이순신은 떠내려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