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낮게 걸린 한양의 밤은 어두웠다. 사람의 손을 덜 탄 벽담과 도담한 기와가 달에 조응하여 빛났으나 그믐달, 거의 기운 그믐달은 간신히 거리를 밝힐 정도로 발했다. 

평소라면 간간히 글 읽는 소리나 여인들의 방망이 소리가 울렸을 터였으나 그 날은 그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적막함. 불안감마저 느껴지는 고요함. 묘한 긴장감이 한양의 온 거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탓인지, 그날 벌어진 술자리는 웃음보다는 근심이 술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한양 중심부에서 약간 떨어진 한 저택에서 벌어진 그 술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에 둘러앉은 남자들은 말 없이 술잔만 넘기고 있었다. 개중 풍채가 좋은 한 남자가 일어나며 말했다.

"이만 가보겠네. 다음엔 내가 사도록하지."

가능하다면 말이야. 라는 뒷말을 애써 넘기며 남자는 길을 나섰다. 거리는 여전히 적막했으나, 고요히 내리던 달빛은 또 다른 낮을 만드려는 듯 타오르는 횃불들의 폭력적인 행세에 찢겨나갔다. 가라앉은 어둠과 침묵을 가르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이끌리듯 그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도달한 곳은 대낮같이 밝아, 남자는 눈을 찌푸려야 했다. 그 빛의 중심에는 갑주를 차려입고 말에 올라탄 남자가 있었다. 그 앞에는 두 어명이 부복하여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남자는 혀를 찼다.

"한 나라의 재상이라는 자들이 일개 왕자 앞에 꿇어있다니. 말세로군."

재상이 왕도, 세자도 아닌 일개 군 앞에서 군신의 예를 올리는 것은 어느 나라에도 없는 예법이었다.

상념을 마친 사내는 이내 고개를 들어 말 위에 있는 남자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정안군. 이게 다 무엇이오? 어디 왜적이라도 들었소?"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뭐, 좋소. 다음은 누구요? 세자 저하? 남은? 박위?"

여전히 침묵을 지킨 남자는 뒤쪽으로 눈짓했다. 곧 큰 칼을 든 병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포은이 갈때 알아봤어야 했거늘. 그래. 이제는 무엇을 하려 하시오?"

이방원은 잠시 군사를 물리고 하마하여 그 앞에 나아갔다.

"아바마마 곁의 간신들을 제거하고 왕도를 바로잡기 위함이오."

"그대의 왕도란 백성의 피로만 쓰여져야 하는 것이오?"

"아니, 간신의 피로 씻겨야 하는 길이지."

그 대답을 들은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앉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정안군이 물었다.

"삼봉. 그대는 우리와 함께할 생각이 없소?"

"내 이미 고려를 배반하였거늘 또 이쪽을 배반하고 그쪽에 붙으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소?"

그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이방원은 물러나있던 군사를 불렀다. 검집에서 뽑혀나오는 검의 울음이 섬뜩히 들렸다. 검은 어두운 달의 빛을 받아 더욱 요요하게 빛났다. 호선을 그린 검이 떨어지고 붉은 꽃이 튀었다.

그 순간까지도 눈을 감고 있던 남자ㅡ정도전은 고개를 들어 달을 보며 생각했다. 동북면의 그 남자-이성계를 처음 만난 날도 꼭 오늘과 같이 그믐달이 걸린 날이었다고.



혼란의 밤이 밝은 후, 궁에 있던 늙은 왕은 섦게 눈물지으며 말했다고 한다.

"목에 무언가 걸린 듯 한데 내려가지를 않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