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요소 있습니다.







여러모로 볼때, 이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하야오 스스로의 자전이라 평하는 것이 중론이다.
또한, 전쟁기 일본시대가 배경인 만큼 심각한 비유와 해석을 시도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한편 주의할 점은, 해당 작품은 일체의 외압 없이 미야자키가 하고싶은 것을 그저 맘껏 표현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모든 제작비를 투자가 아닌 자체적으로 충당했고, 그렇기에 본인이 필요하다 느끼면 효율 생각 안하고 아낌없이 쏟이부었으리라.

이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사람들이 읽을지 말지 생각 안하는 작가들의 태도이다. 한편으로는 창작자로서의 소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상업적으로 밥벌이가 필요한, 성공을 위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작품을 쓰는 작가는 반드시 명작을 지향해야 하며, 이는 기성세력을 공부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타협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존의 지브리는 명확한 주제의식과 아름다운 이야기로 사랑받았고, 숱한 명작을 낳았다.


여기, 작가들에게 묻겠다.
그대들이 오롯이 자신만의 마음가는대로 쓴 글을 사람들이 좋아하는가?
사람들에게 공감받고자,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해서, 그들의 언어로 자신의 표현을 재구성하지 않았는가?


작품에 계속 나오는 수많은 요소와 비유는 아마 하야오 본인의 마음을 그저 거름망 없이 담아냈을 뿐이리라.



가장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은 앵무새들과 앵무대왕이다. 나치, 이태리의 파시스트들, 약탈자들.
당연히, 그들의 만행은 일본인들로서도 좋지 않았겠고, 일본이 불바다가 되는 경험을 겪었을 하야오 역시 파시스트들의 행동은 악당으로 보였으리라.
하지만 정작 일본인 자신은 앵무새의 묘사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전투기 캐노피를 생산해서 부를 쌓아올린 신흥 부르주아이며, 주인공 자신 역시 이를 통해 명백히 호의호식한다.
일신의 편안함의 대가가 얼마나 추악한 모습인지 알게 되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위협이라기 보다는 사회가 이러하니 나 역시 거부해야 한다는, 정말 전쟁 희생자 당사자의 마음이 아니라 착하게 구는 소시민적인 모습을 마치 먼나라 이야기, 동화속 악당 이야기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던 마음이 그려진 듯 보인다.


거대한 돌은, 말하자면 창작의 욕망이겠지만, 정말로 우주에서 뚝 떨어진 그것이다.
말하자면 하야오 자신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무슨 우주의 계시라도 받은듯 너무 뜬금없어서 이런 운석같이 표현하고, 큰할아버지가 돌과 ′계약′했듯 알 수 없는 존재와 자신이 무슨 계약을 했길래 이렇게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렸다.
즉, 큰할아버지는 지브리를 이끌며 작품을 만드는 자신의 투영이다.
온갖 타협과 임시방편으로 매일매일 공든탑을 유지시키는 모습은, 우리 모두 공감하리라. 그저 하야오 본인이 느끼기에 이러했을 것이다.
특이한 점은, 바로 그 탑을 유지하는 공간이 돌의 본체의 세계와 만들어진 이세계 중간의 경계이다.
정작 내가 만든 이세계를 볼 수도 없고 이세계와도 제한적으로나 소통하면서 그렇다고 돌 바로 옆에 붙어있지도 않은. 또한 아무런 장식도 자연도 없는 공백의 공간.
나 자신만의 세계. 마치 집 안의 나 혼자쓰는 가장 사적인 공간같으면서도 돌로 이어지려면 필히 거쳐야 하는 과정.
명상하는 자 자신? 손익을 파악해서 결정하기 위해 대답하기 직전인 순간? 펜을 움직이기 직전 바로 그 순간?

그 이세계를 유지하는데 키리코와 왜가리를 끌여들이고, 히미를 데려온다.
자신의 자식이 세상을 유지하는 부품으로 충실하기를 바랐으나, 머지않아 깨달은 것이다. 자식 또한 개인임을.
돌은 자신의 또다른 자식이라도 데려와 세상을 이어가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주인공(마히토)는 그 이름대로 진실된 사람일지니...
13개의 돌, 하야오가 직접 만든 13 작품으로 아들에게 지브리를 이어가라 권했지만, 아들 미야자키 고로 역시 절대 자신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작중에 마히토는 말한다, 머리의 이 상처가 내 죄의 증거라 그 순수한 돌을 만질 수 없다.
하야오 입장에서 죄란 자신의 작품을 파괴하려는 후원자, 물주, 타협하는 모습일 터, 작중에서는 마히토가 점잖게 거절했지만 하야오의 마음속엔 아들에 대한 실망감일 터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 감정 또한 가족으로서 당연한 것.
아들 고로는 하야오가 이끌던 지브리가 아닌 자신만의 지브리 또는 다른 사단을 이끌테고, 자연히 하야오가 만든 세상 역시 멸망할지라도 이를 긍정할테니 앞으로 나아가라, 네 세계로 돌아가라는 말로 표현되었으리라.

그 과정에 자신의 세상에서 강대했던 앵무새들도, 현실세상에선 그저 평범한 앵무새에 불과할테고, 자신의 세상에서 키운 와라와라를 잡아먹던 굶주린 펠리컨들이 현실에서 마침내 자유를 되찾을테니.
스스로 직접 펠리컨을 묻어주며... 너희는 죽고 벌받는게 당연하지만 이 모든것은 이세계를 만든 하야오의 업이렸다.
당연하다. 세상에 그 어떤 성인군자라 한들 적이 있음이란 필연적이다.

그러면서도 큰할아버지는 책을 읽다 현실을 버리고 자신의 세계로 사라졌다.
당시에도 이미 저택의 주인이었을 지역유지였을 당신이지만, 별천지를 만들고자 모든것을 버렸다.
사람들은 탑의 주인이니 신비하게 떠받들이지만, 그 탑을 쌓는데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하야오의 개인적인 여러 죄와 모순을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고백하는 일그러진 신적 영도자, 남들이 떠받들여주는 자신이 남몰래 키워버린 오만함, 그러나 늙고보니 이 세계는 하루하루 겨우 유지되는게 고작인 수준이 되었다.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이세계에는 죽은 인간이 훨씬 많다고 키리코가 소개하지 않나.

이세계의 산실에서 다시만난 나츠코가 화를 내는데, 아무리 이상적이고 이성적이고 부드럽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내면에는 어둠을 숨김을, 나를 위해 가면을 보여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듯 하다.
그 장면에서 우리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그러고 작품 후반에 불화의 씨앗이 된다.
인간사이란 그런것이다.
누군가는 배신라고, 변심이라고, 구밀복검이라고, 가면이라고 비난하지만, 그 사람은 적어도 나를 위해 자신의 어둠을 숨기고 나와 친해고자 노력하지 않았는가.
그러고는 산실의 모빌이 금줄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평론가들은 호평일색인데, 그들을 평론들을 조합해보자면...

하야오는 ′내′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돈을 써가면서 장편으로 완성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눈치빠른 전문가들은 이것이 평가가 불가능한 성격의 그저 나홀로 떠드는 작품임을 알아챘다.
그래서 순수하게 호평을 해준 것이다. 관객들에게 흥행할지는 고려치 않고.
순수하게 개추를 눌러주는 여러분의 마음이라고 할까.


제목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책을 원작으로 하면서도 책과는 무관한 스토리라 한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서 포스터를 다시 한번 보고나니, 나는 이것이 왜가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왜가리는 옥신닥신하며 마히토의 친구가 되었다. 한편으로 큰할아버지를 주인으로 섬긴다.
즉, 타인이며, 엔딩에서 주인공을 떠나고 이세계에서 있던 일을 잊을거라 알려준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에게 말하는것이다.

자, 하야오는 이렇게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러니 내가 하야오와 고로를 지켜봤듯, 너희의 삶도 지켜볼 것이다.
운이 좋으면 또 다른 친구가 될 수 있겠지.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로 간섭없이 살 것이다.
그래도 이 자리에 스쳐가니 한번 던져나 보는거다.
그대들은 살아가는데 어떤 마음가짐을 가질지.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다.
훈계하고자 하는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주위에 퍼뜨려보았지만, 이제는 그런것따윈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저 하루하루 각자 나름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