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



따지고 보면 특별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김 치찌개님, 아니 포수님 혼자만 말을 안 탔으니까 잡히는 게 당연하죠...."



무당 여인이 머리를 싸맸다.



"어쩌죠.

지금쯤 어찌 되셨을까요."


"지금쯤 산적 소굴에 들어가서 '간난신고' 를 겪고 있지 않겠소?"


"뭘 겪는다고요?

'간음/성교'?"


"어쩌기는, 구하러 가야지 않겠느냐."



나리의 주장이었다.


힘들지 않겠느냐는 의견은 나왔지만 최종적으론 둘다 동의하였다.



"한데 이 강을 오늘 안에 지나야 하는 것도 문제니라."



나리가, 우리 앞에 놓인 이름 모를 강을 가리켰다.


이 사람은 왜 자기가 꺼낸 의견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는담.



"꼭 오늘이어야 하나요?

오늘은 일단 포수님을 탈환하고 조원 마을로 돌아가면 안 돼요?"


"이곳 강의 뱃사공이 닷새에 한번만 있다고 했느니라.

오늘이 그 닷새에 한번 있는 날이고."


"사공이 어딨는지는 아시오?"


"모르니 찾아야겠지 않느냐."


"헤엄쳐서 가면 되잖소?"


"자넨 무당의 배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확실히, 무당 여인의 배가 범상치 않았다.


배 (船) 를 타지 않으면 안될 배 (腹) 로 보였다.


임신 중기 정도의 크기... 뭐가 저리 빨리 부푼담.



"살 찐 거 아닌가."


"뭐라고요?"



앗차. 혼잣말로 한다는 게 밖으로 새버렸다.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뱃사공을 기다리는 조, 총잡이 양반 탈환 조.

이렇게 사람을 나누면 어떻소?"


"방금 산적 녀석들 도술 쓰는 꼴 못 봤느냐?

셋이 몰려다녀도 될까말까인데 일행을 나누자고?"


"도술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아보여요."



무당 여인이 눈을 감은 채 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찌 그리 생각하였느냐?"


"도사님이 쓰시던 '도력' 이란 걸 품은 사람이 적어서 그리 생각했어요."



그걸 왜 지금에야 감지를 하는 거야.


무당 여인의 짐작에, 보충을 해주었다.



"도력이 없으면 도술 못 쓴다오.

강한 도술을 쓰는 이는 도력도 강하고."


"도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 둘... 뭐야, 두 사람 뿐이네요?

그마저 도사님보단 약간 아래고요."



나보다 강한 도술꾼이 없다고?


하면 직전의 화염 술법은 어떻게 구사한 거람.


의문이 생겼지만, 우선은 허세를 부렸다.



"둘이면 어찌어찌 되지 않겠소."



그리 하여

나리가 뱃사공을 맞이하고

나와 무당 여인이 총잡이 양반을 탈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초에 뱃사공 맞이는, 배가 무거운 무당 여인이 자원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뱃사공을 금전으로 매수해야 할 경우도 있겠지."


"돈이라면 저도 꽤 있어요.

저희 마을에서 점 봐주고 얻은 돈만 해도-."


"정말 자네가 부담할 겐가?

내가 사용하는 돈은 전부 국가 경비인데?"



앗.


법인카드로 사먹는 고기가 더 맛있다는 이론이다.


나는 이 이론을 좋아한다.


무당 여인도 그랬는지 군소리 않고 나리의 명을 따랐다.



"이 돌탑이 표식이니라. 여기서 모이는 게다."


"알겠소."



그 말을 끝으로 나리와 헤어졌다.



*



탈환조는 달렸다.


왔던 길을 더듬으니 오래지 않아 산적들과 조우했던 곳에 도착했다.



"늦어버렸나 보오?"



오기야 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본거지로 갔나봅니다."


"본거지 방향을 알겠소?"


"모르면 알아내야죠."



무당 여인이 산통을 꺼냈다.


맙소사, 달갑잖은 시간의 재림이로군.



"저쪽이네요."


"정말로 저쪽이오?"


"저쪽이라고 점괘가 나온 걸요."


"반대쪽이로군. 알겠소."



앞장서 길을 잡았다.


무당 여인이 눈을 찡그렸다.



"근래 보아하니 도사님께서 저를 아주 우스운 여인으로 간주하는 듯해요."


"그렇소?"


"저 사실 실력도 있고, 신실하고,

고향에선 인품도 훌륭하기로 정평난 무당이었거든요?"


"그렇소?"


"자꾸 무시하고 그러시면 상처 받는다고요."


"그렇소?"


"... 도사님 제 말 듣고 있어요?"


"그렇소?"



우우으으-.


뒤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하나하나 맞장구쳐주면 이 긴박한 상황에 무슨 섹드립을 칠지 모르는 여자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절대 대꾸 안 할 거다.



"앗! 도사님 저거 뭐에요?"


"그렇소?"


"저기 보세요!

계곡 아래 저기, 산적들 아니에요?"


"그렇소?"


".... 도사님, 제 배의 아기 말인데요."


"그렇.... 뭐?

드디어 아비가 누군지 실토할 마음이 든 게요?"



무당이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아뿔싸. 속았구나.


무당 여인이 손가락질하는 쪽을 보니, 과연 인파가 모여있었다.


무장한 병력이 스무명. 아니, 서른명인가?


많기도 하여라.



"산적이 있다니까 왜 말을 안 들으세요."


"헛봤겠지 싶었을 뿐이오."



물끄러미 보니 한 녀석이 머리색이 독특하다.


어라. 밀짚모자 파란 머리.



"저기 파란 머리가 총잡이 여인 아니오?"


"포수님이요? 닮긴 했는데.

밧줄로 묶인 걸 보니 맞는 듯도 싶네요."


"좋아! 소탕하고 기분 좋게 돌아가볼까!"



벌떡 일어서니 무당 여인이 "어버버밧, 도사님!" 이라며 날 잡아다 앉혔다.



"사람이 저리 많은데 어떻게 소탕을 해요!"


"당신의 신통력이랑 내 도술로."


"잘 좀 보세요! 총 든 사람도 있잖아요!"



다시 보니 조총을 든 사람이 몇 있었다.


저러면 안 되지, 참.



"우린 계곡 위잖소.

계곡물을 얼려서 일망타진할 수 있지 않겠소?"


"얼리는 술법 쓸 수 있으세요?"


"... 아니."


"저도 그래요. 그러니 가만히 동향을 지켜보자고요."



이럴 리가 없는데.


무당 여인이 이렇게 사려 깊을 리가 없는데.


이 여인한테 있는 건 가슴과 배 뿐인 게 아니었어?


계곡 아래의 도적 무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동안 지들끼리 뭐라뭐라 떠들어댔다.


하나가 바가지를 가져오고부터는 얘기가 달라졌다.


부채를 든 뚱보 녀석이 바가지로 계곡물을 떠서 입에 가져다대었다.


뒤뚱뒤뚱 걷던 뚱보는 계곡 근처에 나있던 거목에 대고, 입에 머금었던 물을 뿌렸다.



"먼저 들어간다."



뚱보는 그러곤, 거목에 제 머리를 박았다.


나무는 신개념 자살희망자의 박치기를 수용해주었다.


나무에 들이받은 뚱보의 머리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어서는 뚱보의 몸도 사라졌다.


나무가 뚱보를 삼킨 것처럼 보였다.


뚱보가 나무 속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다른 놈들도, 차례로 똑같은 짓을 했다.


무당 여인은 어안이 벙벙해져 그 꼴을 관망만 했다.


나는 서둘러 팔찌를 빼서 던졌다.



"작아져라!"



콩알만해진 팔찌는, 일당 중 한 놈에게 가서 달라붙었다.


총잡이 여인을 포함해, 계곡 아래쪽 사람 전원이 모습을 감춘 후에야 무당 여인이 말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도사님."


"지금 보고 확신했소.

저거 고급 요술인데."


"요술이요? 저 중에 요괴나 귀신은 없었을 텐데요.

도술 아니에요?"


"도술도 공부를 해야 쓰지, 저 많은 인원이 어찌 다 도술 공부를 했겠소?

방금 당신 입으로도 말했잖소. 도술을 쓰는 이는 둘 뿐이라고.

공부도 안한 이가 쉽게 쓸 수 있는 술법이라면 내가 아는 범주에선 요술뿐이오."



그러니까 저 산적 패거리는

도사도 2명이 있고

요술쟁이도 여럿 있단 것이었다.


기똥찬 도적들이다.


마을에서 멀지도 않은데 왜 안 잡혔나 의문이었는데, 의문이 풀렸다.



"그런 경우면 힘을 빌려주는 요괴가 있어야 하잖아요.

요기는 주변에 일절 없던 걸요?"



나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었다.



"일단은 우리도 저 나무 속으로 들어가봅시다.

안에 들어가면 뭐라도 알겠지."


"요술로 들어간 거라면서요.

도사님 요술 쓸 줄 아세요?"


"숨겨진 길을 여는 요술은 못 써도 남이 연 길을 따라가는 술법은 쓸 수 있소."



옴- 하고 주문을 외니 팔찌가 나무 속에서 튀어나왔다.


팔찌의 크기를 되돌리고 도로 팔에 감았다.


나무에 손을 밀어넣었다.


손 끝이 사라졌다. 방금 도적들처럼.



"성공이구려."


"신묘하네요."



곧장 나무 속으로 진입했다.


나무 안쪽은 별천지였다.



"넓네요."



나무 안쪽이라곤 상상도 못할 정도로 큰 마을이 있었다.


마을은 우리가 들어온 곳보다 경사가 살짝 아래였다.

 

뒤에는 우리가 들어온 길이 구멍으로 있었는데, 구멍에선 원래 세계의 경치가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다.


앞으론 천막으로 모양을 갖춰나온 몇십개의 집이 있었다.


땅은 황토색으로 단단하였는데 군데군데 나무 뿌리가 드러나있었다.


주목할 만한 건 땅과 똑같이 황토색으로 일관된 천장이었다.


천장이라고 하니 몹시 낮은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산만한 높이의 천장이었다.



"천장이 있는 것치곤 벽이 좌우에 없는 게 독특하구려."


"저어어기 있어요."


"어디 말이오? 잘 안 보이는데."


"투명한 벽이에요. 도사님한테 안 보이실 거에요."



유리벽이라고 되나?


"저어어기" 라고 했으니 어지간히 멀찍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큰 천장인데 기둥이 없는 것도 신경 쓰이고."


"기둥 대신 저거 아닐까요?"



마을의 중앙엔, 마을을 관통하는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저 거목이 기둥 역할을 하는구나.


나무의 중간에는 통나무 집 모양의 구조물이 있었는데, 누군가 설치해놓은 듯 했다.



"저긴 촌장이라도 사는 걸까요?"


"도적들이 사는 마을의 촌장이라면 불안하기 그지없구려."



어째 무당 여인이 조용했다.


슬슬 '저 안에서 집단난교라도 하는 걸까요' 라는둥 떠벌릴 때인데.



"도사님, 저 안에 말인데요."



오. 왔나?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포수님도 저 안에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아니었나.


새삼 부끄러워졌다.


나는 이 여인에 대해 너무 안 좋게만 본 게 아닐까.


무당 여인이 한마디 보탰다.



"서둘러야겠네요.

늦으면 포수님께서... 집단 난교의 위기에 처할 지도 몰라요."



그럼 그렇지.


거목의 허리깨에 붙어있는 통나무 집을 보았다. 


높은 걸.


아파트 10층 높이쯤 되나.



"사다리도 없는 걸 어찌 올라간단 말이오?"


"사다리라면 근처 뒤지면 있지 않을까요?"



하긴 저 높이인데 일일히 맨손으로 타고 올라갈 리도 없었다.


사다리가 있거나 계단이 있거나 하겠지.


마침 창고처럼 보이는 천막이 있었다.


창고지기는 둘이었다.



"절약적이지만 고전적인 방법이 좋소?

아니면 사치스럽고 참신한 방법이 좋소?"


"절약이 좋겠지요.

저는 신통력을 절약하게 될 테고, 도사님은 도력을 절약하게 될 테니."



무슨 의미의 절약인지, 이해가 빨랐다.



"변해라."



계곡 아래에서 봤던 뚱보로 변했다.


두 손을 활짝 펴고 두 팔을 벌려 한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비슷하오?"


"감쪽 같사와요."


"좋소. 당신은 여기서 동태를 보고 계시오."




*



마을로 내려가 창고지기에게 아는 체하였다.


비어있는 두 손은 뒤로 넘겨 등에서 허리 부근에서 맞잡았다.


뚱보 이미지에 걸맞는 오만한 자세였다.



"수고가 많구만."


"앗! 도사님 오셨습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도사님이라길래 깜짝 놀랐다.


이 뚱보 녀석에 대한 지칭도 '도사님' 이었구나.



"으음. 수상한 사람은 없었는가?"


"딱히 없었습니다."


"개똥이 녀석이 술이 고프다고 칭얼거리던 것만 빼면요."


"개똥이 녀석한테 술은 내줬나?"


"아뇨. 요즘은 금주령이 있었잖습니까."



왁. 놀라라.


생각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얼굴들을 보니 의심을 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아직은 괜찮구나.



"하하,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군. 다행이네그려."


"그보다 창고엔 어쩐 일이십니까?"


"실은 나도 술이 고파서 빠져나온 걸세.

도사 된 자, 술이 빈곤하면 도道도 빈곤해지나니."



스승님이 즐기던 문구를 한 수 읊었다.


정작 난 술을 싫어하지만.



"예? 도사님이요?"


"술 싫어하던 도사님께서... 별일이시로군요."



이런 씨.


스승님, 그 노인네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어째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사실 술은 핑계일세."


"하면?"


"자네들에게 선물이 있어 왔지."


"선물이요?"


"도사님이? 저희한테요?"



날 훑듯이 보았다.


평소와 다른 점을 하나하나 따지려는 거였다.


애써 태연한 시늉을 했다.


책 읽어주며 키우던 연기력을 끌어모았다.



"좋아, 용건을 솔직히 밝히겠네."


"예, 말해보십시오."


"그, 내가, 그... 말로 하긴 남사스러운데, 그... 그거 있잖나. 그거."



틀렸다! 


대본이 없는데 연기는 무슨 연기!


눈앞이 깜깜했다.


그때 무당 여인이 멀찍이에서 걸어왔다.


어쩐지 밧줄로 묶여있었다.



"너무하십니다.

어찌 방년의 처녀를 힘으로 안으려 하십니까."



흑흑.


무당 여인이 울고 있었다.


옳거니, 이거로구나.



"그래 이 녀석들아!

내 여자랑 재미 좀 보겠다는데, 이런 눈치없는 녀석들!"


"아이고, 그런 거였습니까?"



왼쪽 녀석이 경계의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다른 한 놈은 그대로 눈초리가 매서웠다.



"한데 어째 저 여자가 배가 심상치 않은데, 처녀라고?"


"마, 마음만은 처녀에요!"


"더욱이 우는 것도 어색하고.

이제부터 범해질 건데 어째 기뻐보여."



무당 여인의 허접한 연기력이 원인이었다.


나도 당당하게 밀어붙였다.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겐가.

내가 납치한 이 여인에게 불만인가, 아니면 내게 불만인가?

그도 아니면 남의 아내를 범하는 내 취향이 불만인가?"


"불만이라면 나리가 그리 온 점부터 불만입니다."



의심쟁이가 말을 이었다.



"도사님, 부채는 어디로 떼어두고 오셨습니까?

없으면 도술 못 쓴다고, 잘 때도 들고 주무시더니."



앗.


모호한 기억력이 초래한 결과였다.


내가 이래서 변신술을 싫어한다.



*


이번화 원본은 이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