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하나 없는 도포가 온 천지를 덮은 듯 눈이 나리고 있었다. 하이얀 눈은 만물을 포용하여 소리까지 감싸, 좁은 흙길을 걷는 여인의 숨결만이 하늘 위로 흩날렸다. 눈은 멀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산의 회백색 빛을 쨍하니 밝혔다. 음력 10월. 조선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입동을 막 지나는 중이기에 소한(小寒)이나 대한(大寒)은 아직 멀리있었으나 올 을사년의 겨울은 유난히도 시렸다. 그를 반증하듯 여인은 온기를 찾아 재빨리 발을 놀렸다. 여인의 목적지는 멀리 보이는 저택이었다. 거의 비어있다시피 한 행랑과 군데군데 깨져있는 기와는 그 가세가 기울었음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저택의 위치는 '좌청룡 우백호'니 '배산임수' 따위만 아는, 풍수를 어깨너머로만 아는 이들 또한 감탄할 정도였다. 우아하고 맵시있게 뒷산의 선과 조응하는 처마의 선만이 저택에 기거하는 이가 한때 조선팔도에 이름을 떨치던 명문가임을 짐작케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옮기던 여인은, 간간히 큰 소리가 나던 사랑을 지나 그녀의 주인이 기거하던 안채에 도달했다.


"마님, 진월입니다.분부하신 인두를 가져왔습니다."


"수고했구나. 날도 추운데 어서들어오너라."


문을 열자 온기가 훅 밀려왔다. 방 안에는 깎아지른 기암괴석을 그린 병풍을 배경으로 화로 앞에 꼿꼿하게 앉아있는 여인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주름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그 주름마저 세월이 남긴 미(美)가 되는, 그런 우아함을 가진 여인이었다. 눈을 잠시 감고있던 그녀는 이내 눈을 뜨고는 말을 이어갔다.


"어서 시작해보자꾸나. 인두를 손에서 놓은지가 너무 오래라 자칫 옷을 망칠까 두렵기는 하다만은..."


진월은 그녀의 주인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계속해서 흔들리고 결국 쓰러져가던 집안을 장장 20년이라는 세월동안 지탱해오던 마님 아니신가. 허나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녀의 말이 사실일것이라 생각했을터인데, 그녀의 손이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인은 잡고있던 인두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며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본 하녀는 그 원인이 바깥 사랑에 있을 것이라 눈치빠르게 알아차렸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부인은 붉어진 눈가를 감추려는 듯 살풋 웃으며 진월에게 사랑으로 가는 기별을 보냈다.


"허나 대감, 그리하면 최가의 안위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재고하시는 것이..."


"오백 년 종사가 뿌리채 흔들리는 와중에 일신과 가문의 안위를 신경쓰랴? 그대들은 본인의 안위는 신경쓰지 말고 옳은 바를 행하라."


대감이라 불리는 사내의 일갈에 논의로 후끈하던 방 안에 잠시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곧 분위기를 보던 한 남자가 망설이던 끝에 말을 꺼냈다. 


"대감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허나 부인께서도 이를 알고 계시는지요?"


"그것은..."


남자의 물음에 대감이라 불린 사내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였다. 때마침 하녀의 목소리가 사랑에 낭랑하게 울렸다.


"대감, 마님께서 전하라 하신 기별입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었다 하셨습니다."


마침 잘되었다는 듯 사내는 고개를 끄덕인 후 방 안의 남자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세. 명일 신시에 다시 보도록 하지."


"예, 대감!"


남자들이 하나 둘 떠나는 것을 배웅한 후, 사내는 천천히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마님, 대감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뫼셔라."


문이 열리고 사내가 가장 처음 본 것은 방 한복판에 있는 화로였다. 평소 부인이 화로를 쓰는 것을 보지 못한 사내는 잠시 의아한 기분이 들어으나, 이내 관심을 거두고 부인에게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오? 부인께서 다 찾으시다니."


부인은 곧바로 답하지 않고 차를 내오며 말했다.


"대감께 차 한잔 대접해드리고 싶어 불렀답니다. 이번에 올라온 차 맛이 여간 좋아야지요."


그 말에 자신이 너무 성급했음을 깨달은 대감은 눈 앞의 잔을 들어 잠시 향을 음미했다. 그렇게 두사람은 차향을 음미했다. 먼저 말문을 연것은 여유를 되찾고 방안을 둘러보던 대감이었다. 


"못보던 화로구려. 부인께서 이리 추위를 타시는지 몰랐소. 그랬더러면 불을 더 때라고 해두었을 것을."


"추위에 약해서 둔 것이 아닙니다."


"허면?"


"대감께서 먼길 가시는데 아녀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옷이라도 다려드리려 합니다."


그말에 대감은 잠시 흠칫했다. 분명 이에 관해서는 부인께 한마디도 한 적이 없건만. 대감이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부인은 말을 이었다.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차마 말은 하지 못한 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서역의 핸드레이크 휴리첼이라는 선비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나는단수가 아니다.' 흥미로운 말인지라 어떤 의미인지 고민을 해봤답니다. 답은 의외로 쉬웠어요. 한 사람은 살아가며 너무 많은 역할을 하지요. 대감께서도 역시 그렇고요."


평소라면 벌써 노호성이 터져나와야 했다. 사헌부 대서헌을 대대로 역임한 그 최가의 일원이 아니던가. 감히 서양의 사학따위는 감히 꺼낼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허나 그 말을 하는 부인의 얼굴빛이 그리도 처량하여 대감은 그저 잠자코 있었다.


"사헌부의 전 대사헌, 삼남 유림의 거목, 최가 문중의 장, 세자 저하의 교육계... 그리고 저의 낭군. 이리도 무거운 짐을 지고계시는군요. 대감께서는. 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노니, 부디 이곳에 저와 머물러주실 수는 없는 노릇입니까?"


"그러하오. 그간 주상전하의 은혜를 입고 내려주신 녹을 받아먹으며 살아온 처지가 아니오? 주상께서 이 미천한 촌부에게 명을 하시는데 어찌 잠자코 있겠소?"


"주상께서 내리신 명이 대감을 지칭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선팔도에, 이 천지에 뜻있고 의로운 선비가 어찌 대감뿐이겠습니까."


"자왈 의라는 것은 타인이 행한다고 하여 그 뜻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소. 그것이 도의 본질이고. 나의 의를 행함에 있어 망설이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선비라는 것 아니겠소."


후우


들리지 않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남편은 대나무같은 사람이었다. 쓰러질지언정 스스로는 꺾이지는 않는 꼿꼿한 선비. 그것이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래, 내가 그의 이런 모습을 좋아했지. 허나 입안에 씁쓸함이 감도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끝내 저만을 위한 단수만이 되주실수는 없겠습니까."


ㅡ그럼에도 미련이 남는 것은 공맹의 도만으로 천륜을 끊어내는 것이 힘든 까닭에.


"미안하오. 허나 나는 평생을 공맹과 주자를 모시며 살았고 또 그를 내 후학들에게 가르쳤소. 먼저 살아 가르친 이가 그를 저버리고 산다면 그 비루함을 어찌 감당하겠소? 내가 가고자하는 것이 이 까닭이오."


그리고 그녀에게는 절망적이게도,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끝까지 올곧았다. 너무도 올곧아서 곧 찬란히 흩어질 그런.


"장부가 결심하고 걷는 길을 어찌 아녀자가 막겠습니까. 다만 제게 한가지 약조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게 무엇이오? 혹 살아 돌아오라는 것이라면..."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키지도 못할 약조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마지막 순간에 저를 떠올려주겠다고 약조해두세요."


"그리하겠소."


"그리해주신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빙긋


그 웃음은 티없고 또 맑아 마치 근심없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았다. 진실은 참혹하고도 잔인했음에도. 그녀는 부군의 죽음까지도 울음에 묶어 웃음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뒷산을 배경으로 소담히 쌓이는 눈은 그들의 시간과 소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 * *

"떠나셨느냐?"


"예 마님."


말발굽이 희미하게 수놓인 길가를 보며 부인은 중얼거렸다.


"매정하신 분이로구나. 말 한마디 전하지 않고 이리 떠나시니."


그녀가 짧은 글귀와 마른 꽃 몇 송이를 발견한 것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 대감이 즐겨쓰던 상 위에는 정갈하고 대담한 필치로 '此恨綿綿無絶期' 라 쓰여있었고, 말린 서양수수꽃다리 세송이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녀가 글귀의 의미와 꽃의 꽃말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조금 더 흘러 그녀의 울음이 눈이 되어 나리던 날이었다. 


첫사랑과의 추억을 뒤로하고 떠나니 한이 가없소.  


올 을사년의 겨울은 그리도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