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된 나의 휴대폰 화면을 계속 어리둥절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해킹되었다는 사실을 보고있자니 입에서 자연스럽게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이게 무슨..."
"죄송해요. 이 분이 시도때도 없이 해킹하는지라. 저희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해킹되어있을 때가 많거든요."
유혜림이 미안해하면서 말했다. 하긴 지금 미야자키의 행실을 보아하니 이해가 갔다. 지금 이렇게 주차장 바닥에 드러누워도 이런 기행이 일상인 것마냥 시즈오카와 유혜림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걸 보면 이것도 비슷한 맥락이겠다 싶었다.

"아 참고로 이 분 이름 미야자키 츠바사에요."
"아, 그렇군요."
중간에 대화가 끊어지고 말이 없자 유혜림이 한 마디 덧붙였다. 시즈오카가 이 틈을 타고 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분위기상 저지당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휴대폰 화면에서 소리가 나왔다.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휴대폰에 정체모를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한국인이라는 거에 신경 써준 건지 영상에 나오는 언어는 한국어였다. 근데 약간 북한 말투가 섞인 듯한 남자 목소리라 이질감이 들었다.
보아하니 리와인더라는 단체에 대한 홍보영상이었다. 그 퀄리티가 엄청 좋아서 웬만한 국가에서 만든 영상들도 범접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더 자세히 보니 유튜브 영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우리는 리와인더라는 비밀조직입니다. 여러분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다른 평행세계에서 온 조직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 영상을 올립니다. 이곳 평행세계의 시간은 2065년이라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행세계라 뭐가 어떻게 바뀔 지 몰라 확실할 것 같은 것만 몇 개 나열해보겠습니다.

2020년 10월 8일 19시 30분 : 리히터 규모 7.5 다롄 대지진
2020년 11월 06 10시 21분 : 리히터 규모 7.8 지진을 동반한 백두산 분화
2021년 5월 18일 15시 47분 : 리히터 규모 5.5 위례 대지진
2023년 7월 14일 11시 03분 : 리히터 규모 9.2 도카이-도난카이-난카이 3연동 레이와 대지진

이 예언이 맞으면 저희를 신뢰해주십시오. 저희는 당신들의 도움을 원합니다."


대충 이런 내용의 유튜브 영상이었다. 영상이 끝나고 전체 화면을 풀어 올린 날짜를 확인했다. 올린 날짜는 2020년 10월 8일. 다롄 대지진이랑 같은 날짜였다. 만약 이 영상을 아침에 올렸다면 정말 그들이 미래에서 왔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백두산 분화, 위례 대지진, 레이와 대지진이 나오는 대목에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리와인더의 이 영상이 맞다면 동아시아가 쑥대밭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영상에 우리나라의 수도에 딱 붙어있는 위례신도시에 지진이 난다고 하니 한국인으로서 경악하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니 이게 진짜 정말..."
"네. 진짜에요. 이틀 뒤에 백두산 터질 거에요."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다. 잠시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을 받아 멍하니 서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유혜림이 말을 던졌다.
"그보다도 몸은 괜찮으신 거죠?"
"네, 괜찮아요. 오랫동안 안 움직여서 뻐근한 것만 빼면은요."
"그럼 다행이네요. 아 맞다. 대사관이랑 한국 언론 쪽에는 이미 다 말해 놨으니까 안심하세요."
"대사관이랑 언론? 그건 또 왜요?"
뭔 말인가 했다.
"대지진 때문에 뇌출혈로 의식불명이셨잖아요. 안 그래도 다롄에 비상착륙한 비행기에 탄 승객들까지 죄다 매몰된 상황인데, 한국에서 한국인 피해자가 무려 의식불명 상태라는 걸 알면 거기서 뭐라고 하겠어요. 정부나 취재진들이나 우르르 몰려왔을 걸요. 그래서 일단은 '중상을 입었지만 비영리구호단체의 치료를 받고 안정을 위해 구호단체의 곁에 머무르고 있다.'라고 해뒀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처리해놓으면 리와인더에 손해지 않아요? 어차피 도움을 구해야 할 거 스포트라이트 확실하게 받으면 좋지 않아요?"
"스포트라이트야 실컷 받았죠. 무너진 공항에서 구호단체 같은 무슨 리와인더라는 조직이 사람들 엄청 구조했는데.
그리고 그렇게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지는 않아요. 저희도 할 게 좀 많아가지고요. 예를 들면 백두산 분화 관련으로 준비할 게 많은데 기자들 떼거지로 몰려오면 시끄럽잖아요."
이해가 됐다. 관심을 받아야 하긴 하지만 관심의 양을 조절해야했던 것이었다.
"더 궁금한 거 있으세요?"
"궁금한 거야 당연히 많죠. 그치만 너무 많아서 여기서 다 말하면 실례라서 삼가해야 할 정도에요. 근데 이건 꼭 물어봐야겠어요. 혹시 저 피 났어요?"
"안 났어요. 저희도 생채기 하나 안 나서 신기했어요."
"그럼 혹시 수술하다가 피가 나왔다던가 이런 거 없죠?"
"없어요. 저희는 나노로봇을 써가지고 피 볼 일은 없어요."
"어휴, 다행이다. 십년감수했네요."
"근데 피는 왜...?"
"아, 제가 희귀병이 있거든요. 혈액감염되는 치사율 높은 희귀병이요. 혹시라도 유출되면 큰일난대요. 그래도 다행히 그 희귀병이 체내에서 다른 작용을 해서 출혈이 웬만해선 안 나게 해준대요. 그래서 저한테 수술이나 주사같은 걸 하면 큰일난다 그러셨어요."
이 희귀병은 2008년 개학식 날 당했던 올림픽대로 테러 사건으로 얻은 것이었다. 이 때 아버지랑 친했던 내과의사의신 박도균 아저씨가 현장에서 나를 구해주셨는데, 별 이상은 없었고 검진 과정에서 혈액에 이상한 점이 있어서 확인해봤더니 이런 희귀병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혈액 샘플은 안전하게 폐기한 상태라고 하셨다.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그러면 더 이상 궁금한 점이라던가 그런 거 있어요?"
"음... 없는 것 같네요."
"그러면 짐 챙겨드릴 테니까 가시면 되요. 몸조리 잘 하시고요."
"네? 이렇게 그냥 가요?"
"네. 그냥 가시면 됩니다."
유혜림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렇게 신세만 지고 그냥 간다고? 그럴 수 없었다. 그건 내 성격이 허락하지 않았다. 미나토구 화재 이후로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뭐라도 하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비록 내가 리와인더에게는 수많은 생존자들 중 한 명일 뿐이겠지만, 이대로 그냥 간다면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답을 영영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저기, 그냥 가기는 죄송해서 그런데 제가 뭐라도 도와드릴 수 없을까요?"
"굳이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뭐라도 보답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제가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는 성격이라 실례지만 뭐라도 하게 해주십쇼!"
나도 모르게 필사적이었다. 은혜를 입으면 꼭 갚아야 하는 성격. 아저씨가 희귀병에 대해 말해주신 당부를 잘 듣는 것도 샤카넬을 굳이 살리려고 하는 것도 다 이 성격 때문이었다.
유혜림은 뭔가 곤란한 듯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다시 일본어로 시즈오카랑 의논을 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말을 꾹 참으면서 미야자키의 노트북 화면만 죽어라 보고 있던 그에게 발언권이 오자 엄청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말투를 보니 시즈오카는 흔쾌히 승락하는 듯 했다.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미야자키도 '하이(네)'라고 하며 승락했다. 미야자키는 순수하게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듯 했지만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일말의 희망을 느꼈다.
잠시 후 유혜림이 다시 한국어로 나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단장님께 얘기 좀 해볼게요."
그리고는 미야자키에게 뭔가를 부탁했다. 미야자키는 바로 노트북 키보드를 빠르게 타다닥 쳤다. 유혜림의 표정을 보니 또 뭔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지만 포기한 표정이었다. 뭔가 불길해서 다시 내 휴대폰를 꺼내보았다.
역시나였다. 휴대폰이 뭔가 어마어마한 조작을 실시간으로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유혜림도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이제 단체 통화가 시작될 거에요. 그러니까 생각을 정리해주세요."
뭔가 떨리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은혜를 제대로 갚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통화화면은 영어로 된 이름들이 있었고, 각각의 옆에 전화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여권에서 내 이름을 봤는지 내 이름도 Hyeonil Ha라고 쓰여져 연결된 상태라고 떴다. Hyerim Yu도 통화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Shuo Chen이었다.
"단장님 그, 드릴 말씀이 있어가지고요."
"뭔가?"
유혜림이 영어로 말했다. 단장이라는 분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그... 계속 안 깨어났던 분 있잖아요. 지금 깨어났어요. 근데... 아 아무래도 그 분 연결시켜드렸으니까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유혜림이 뭔가 많이 더듬으며 우물대다가 나에게 바톤을 넘겼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손한 목소리로 부탁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단장이라는 분이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이 손님을 대하기 위해 톤을 바꾸는 것과 같은 셈이었다.
"천만하네. 뭘 당연한 걸 가지고 그러나."
"저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만한 거 없겠습니까? 이렇게 생명의 은혜를 입었는데 아무것고 안 하고 그냥 가면 평생의 한이 될 것 같습니다!"
간절한 어투로 간곡히 부탁했다. 분명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있는 건데 웃기게도 90도 폴도인사를 했다.
잠시의 적막이 흘렀다. 그 고요함은 나를 떨리게 했다.
"그러게나."
리와인더의 단장이라는 분의 승락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은혜를 못 갚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승락이 떨어졌으니 당장에라도 행동으로 옮기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뭐하면 되겠습니까?"
황송해하며 깍듯이 말했다. 단장이라는 분이 말했다.
"비자는 얼마나 남았나?"
"11월 7일에 끝납니다!"
"백두산 분화 다음 날이군. 일단 저분들 따라가게.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으로 귀국해서 하세."
"감사합니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당신 원래 제가 만나야 했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이네. 어차피 만나봐야 했는데 이렇게 뵙는두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네.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에서 함세."
감격스러웠다.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감사합니다! 시키시는 거 열심히 하겠습니다!"
"천만에. 참고로 저는 리와인더의 단장 천 슈어네. 무리한 건 안 시킬 테니까 그렇게 알게나."
그렇게 천 단장님이 통화방에서 나갔다. 감격스러웠다. 이번 은혜는 제대로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신이 났다.
나는 몹시 기대하고 설레는 눈빛으로 세 분을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이 분 어디 계세요?"
"다들 사전조사한다고 먼저 가셨어요. 다른 팀들은 다 가고 당번인 저희가 하현일 씨를 맡고 있는 거고요."
"아, 다른 팀도 있어요? 언제 오시는데요?"
"지금 필요한 재료 사러 가셨으니까 나중에 오실 거에요. 아까 하현일 씨가 내리신 버스 있죠? 그게 이제 그분들이 타고 갈 버스에요. 처음에 구조할 때 병상 모자라서 거기 있는 병상 쓴 건데, 귀찮다며 안 옮겼던 거고요."
"그럼 저는 이제 어디에 있어야 하죠? 이제 몸도 다 나았고 하니까요."
"저희 버스 타고 가시면 되요. 그럼 궁금한 거 없으면 출발합시다."
그들은 나를 호의적으로 대해주며 버스 안으로 인솔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할까 궁금해하며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