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수가 있을 터다. 어떻게든.>


일기장이란

남에게 들킬 일말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물건이기에 주저하게 되지만

일상과의 괴리감에서 제정신을 잊게 만드는 요새,

이만한 안정제가 없으리라고 믿기에

되는 대로 끼적여본다.


오늘 날짜는 1월 1일이다.

기념비적인, 1월 1일이다.


오늘 새벽

천마가 여자가 되었다.


천마를 향한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고

주모자는 처형당했지만

성과는 남았다.


천마가, 여자 아이가 된 것이다.

사리분별조차 제대로 못할 여닐곱 정도의 여자 아이가.


놈은 퍽 귀여워졌다.

종래의 강인하고 공포스럽던 광경은 이제는 없다.

내공도 사라졌다.

솥뚜껑조차 들지 못하는 천마, 그것이 지금의 놈이다.


이토록 좋은 기회가 있던가?


없다.

놈을 죽이기에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고, 없을 것이다.


마교의 늙은이들이 천마의 호위를 늘린 게 한가지 한이다.

호위랍시고 꽂은 놈들은 강하다.

저 놈들을 어떻게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거꾸로 저 놈들만 처리하면 되니까.

그것만 해내면 천마를 죽일 수 있으니까.

천마를. '그' 천마를.



*



2월 2일


<불안하다>


하고자 하는 일을 계획해놓고도 성취하지 않음은 부덕이라.

일기를 쓴다고 해놓고 성취하지 않음은 나태구나.


전생한지 몇년이 지나도 이 태만한 습관은 고쳐지질 않는다.

콩의 날이라며 기억을 떠올린 게 그나마 다행이렸다.


지난 5일,

마교의 늙은이들이 중원으로 사람을 보냈다.

하오문 놈들에게 정보를 물을 사람들을.

힘든 추격 끝에 정보를 얻은 그들이 돌아온 것은 1월 말이 되어서였다.


"천마님을 죽이려 든 세력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주위의 귀를 물린 후에 놈들은 뭐라 말을 하였다.

나는 우리 가문 비장의 무공을 써 문 뒤에서 엿들을 수 있었다.


"놈은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더냐."

"놈 또한 마교의 일원이었단 말입니다."


포박을 당하자마자 당시의 주모자는 혀를 깨물었다.

마교의 높으신 분들이 정체를 캐묻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던 시간이었다.

그 배후를 이번에 알게 된 것이다.


"우리 마교에 배신자가?"

"그 이상은 저희도 알 수 없었습니다만...."

"천마님의 상태를 고치게 할 방법은?"

"그것이 저기, 저희로써도 고하기가...."

"응당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 서역에 있다고 합니다. 몸이 돌아오는 것까진 보장 못해도 무공은 돌아올 것이라고."

"서역도 넓지 않느냐. 상세히 말해보거라."

"서역의 끝자락에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자세히는...."

"허어."


노인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역의 끝자락이라면 걷는 것만으로 몇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서역이라고 뭉뚱그려도 조금 넓은 땅이 아니다.

방도를 물색하고 돌아오는 세월을 감안하면 쉬쉬 덮고 있는 천마의 현 상황이 발각될 것이 틀림 없었다.

백년 만에 등장한 천마의 재림이라며 부흥했던 마교의 세력도, 그렇게 되면 다시 수그라들게 뻔했다.


"쌤통이군 노인네들."


너흰 부흥 따윌 하면 안 되는 놈들이다.

이대로 몰락해 역사의 너머로 사라져라.

부디.


이리 중얼거리자니 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설아. 거기에 있느냐." 라고 했다.

놈들은 내가 엿듣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중얼거린 내역도 들었을까.


"부르셨습니까."

"어디까지 들었느냐."

"...."

"네 귀가 밝은 것은 평소부터 알고 있던 일이니라. 말해보아라."


놈들은 내 술법을 한낱 기예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실은 전부 들었사옵니다."

"하면 얘기가 빠르겠군."


장로가 손가락 4개를 펼치며 말했다.


"뒷채로 오거라."


영문 모를 지시였던 지라 캐물으려했으나 장로는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었다.


쫓기듯 그 자리를 나온 지금도 의미를 모르겠는 건 매한가지다.

나보고 뭘 어쩌란 거야.

뭘 시키려는 거야.

혹시 내 혼잣말을 들은 건가?

아님 내 정체가 발각됐나?

그래서 죽이려는 건가?



*




2월 3일


<드디어 기회가 왔다.>


옥상 위로 나와.

전생 전에는 자주 듣던 말이었다.

기분 좋은 제안은 아니다.

은밀하게 사람을 불러낸다는 것은.


죽을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누구던가.

해야 할 일이 있는 놈이 아니던가.

이판사판이었다.


지난 밤의 수수께끼를 풀고 4경에 뒷채를 향하니,

과연 마교 늙은이들이 어린 여자아이 모습의 천마를 안고 있었다.

천마는 한가롭게 잠을 자고 있었다.


"이리로 오는 도중 누군가가 따라오는 기색이 있었더냐?"

"아무도 없었습니다."


장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습격을 목도한 너라면 알 것이라 판단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천마님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 말이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아, 네가 우리에게 가르침을 받은 지도 벌써 10년 째구나."

"그리 되었습니다."

"10년. 10살에 우릴 찾아와선 이제 약관이라."


노인은 괜스레 뜸을 들였다.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서 어떤 용무로 나를 부른 것인가.'

그때의 나는 그걸 모른채 단지 초조해하기만 했기에.


"우리끼리 이리저리 말을 나눠본 결과다."

"천마님을 본래 모습으로 돌릴 아무런 계책을 찾지 못했을 땐 이렇게 하기로 했지."

"천마님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나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노인네들이 뭐라 떠들며 내게 잠든 천마를 넘겼다.


"그럼 일은 오늘부터 시작하도록 해라."

"일단은 네 눈에 닿지 않는 곳에 다른 호위도 둘 터이니 사람이 모자랄까 염려는 하지 말고."

"... 예?"


나만 빼고 진행되는 상황에 쉬이 따라갈 수 없었다.


"아둔한 것아.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이제부터 천마님을 보살피란 게다."

"그분은 이제 어리고 약해지셔서 다른 이의 손길이 없으면 아니된다."

"기억과 정신조차도 어린 아이나 다름 없는 몸이 되셨다."


찾아온 것이었다.

절호의 기회가.

이 노망난 늙은이들은 복수의 순간만을 노리는 첩자에게 원수를 제 손으로 안겨준 것이었다.


속으로야 쾌재를 불렀지만 기쁨이 표면에 나타나선 안 되었다.

날 수상하게 여기고 전언 철회를 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얼굴근육에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힘을 주었다.

입꼬리가 올라가선 아니 되었다.


"제게... 육아를 하라고 명하시는 지요."

"네가 평소에 눈과 귀가 밝은 것은 알고 있다."


그야 그런 술법을 쓰니까 그렇지.


"뿐만 아니라 너는 임기응변도 뛰어났고."

"일신의 무공도 우리 마교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천마님을 품고 달아나기엔 충분하지."

"이미 비밀을 알아버린 점도 셈하였을 때, 네가 제일 적격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늙은이 하나가 첨언하였다.


"우리가 직접 천마님을 돌보기엔 허리가 아프기도 하고."


멍청한 놈들.

네 놈들은 그러고도 무인이냐?

어린애 재롱 받아주는 게 허리가 아프다고?

빈약하구나 빈약해.


"명 받들겠습니다. 반드시 천마님을 지켜내겠습니다."


그렇게 천마를 받아온 것이다.


나는 놈을 받아들자마자 죽이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며칠 후엔 마침 '그 날' 이 아니던가.

기왕이라면 그 날까지 참는 게 나을 성 싶었다.


천마는 지금 무릎 언저리에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라 천마.

내, 네 목을 베고 긴 회포를 풀 테니.



*



2월 15일


<허리가 고되다>


어느 누가 양육을 우습게 보았던가.

한낱 어린애 상대하기가 힘에 부친다는 말을 누가 조소하였던가.


천마 놈을 상대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늙은이가 허리 핑계를 댔던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무공도 약해졌단 놈이 어찌 이리도 쌩쌩하던지.

흡성대법이라도 쓰고 있는 건지 착각할 정도였다.


"우음... 언니, 힘들어요?"


결국에 지쳐서 쓰러진 후에도 놈은 천연덕스러웠다.

몸이 진정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등과 허리가 쑤신다.

여동생과 놀아주던 어릴 때 이후로 이런 적은 없었는데.

후학이 두렵다는 것은 이런 뜻이던가.


"헉헉, 조... 조금만 쉬자 우리. 언, 언니가 너무 힘들다...."

"언닌 무술도 잘한다면서 왜 벌써 지쳐요? 언니 무술 못하는 거 아니에요?"

"언니도... 어느 정도까진, 할 수, 있어. 체력은 나일 먹어서... 그래."

"네? 언니 아줌마였어요?"


망할 천마놈.

이런 콩알만한 계집이 되어서까지 날 괴롭히는 게냐.

며칠 안 남았다.

2월 28일이 되면 네 놈의 목을 창대에 내걸 것이다.




*



2월 26일


<꿈>


꿈을 꿨다.

여자로 전생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의 일을.

마교에 들어오기 전의 일을.


전생한 나의 새로운 집은 무가였다.

그렇게 크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은 무가.


아버진 우리 가문의 당주였고 슬하로 나와 여동생을,

그러니까 딸 둘을 두셨다.


아버진 무척 독특하신 분이셨다.

객잔에만 가면 점소이를 붙잡고 꼭 까르보나라를 시키곤 하셨으니까.

의아함이 가득 찬 점소이의 얼굴을 보면 그제서야 박수를 치며,

'없으면 냉면이나 하나 가져다주시게' 라고 농을 즐기시던 분이셨다.


어머니께선 반대로 무던히 평범하셨다.

아버지가 까르보나라를 시키면 항상 핀잔을 주셨는데,

간혹 날 안아주실 때면 어쩐지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서 그 품에 잠들곤 했다.


여동생은 한 다섯살 쯤 터울이 졌었다.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학문에 흥미를 둔 그 아이는

내가 수련을 할 적마다 곁으로 다가와서 책을 읽는 걸 좋아했다.


"언니 옆이 제일 마음이 푹신푹신해져서."


푹신푹신.

알아먹기 어려운 감상이었다.

가끔은 책을 읽는 것에 싫증이 나면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동생의 콧노래는 통통 튀면서 말랑말랑한 것이, 꼭 그 아이의 심성과 닮아있었다.


무가의 여식답지 않게 무에는 마음이 없는 여동생이었는데,

그럼에도 뛰도는 때면 나보다 월등한 체력을 선보이곤 했다.

어머니께선 '무공의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니냐' 고 평하셨다.


그런 귀여운 아이였다.

그런 행복한 가정이었다.


천마놈에게 으스러지기 전까진.


"뭔 놈의 꿈이...."


천마에게 가족들이 죽던 밤을 떠올리니 머리가 떨렸다.

아니다. 머릴 감싸쥔 손이 떨렸다.


심호흡을 했다.

내 곁에는 '그' 천마놈이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이틀만 더 버티면 부모님의 기일이었다.

그래서 2월 28일까지 참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순간 욱하고 치솟는 감정이 있었다.

기를 실은 주먹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 참자, 참자 설아야.

가족들의 무덤에 이 놈의 머리를 가져다 바친다고 안 했더냐."


어차피 며칠 차이였다.

기왕 하는 복수다. 구태여 서두를 이유도 없지 않던가.

나는 주먹을 거두기로 하였다.


쿠웅- 하는 소리가 났다.

오갈 데가 없어진 주먹을, 마룻바닥이 거둔 소리다.


마룻바닥 밑에선 사사삭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쥐새끼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불쾌한 꿈에 딱 어울리는 밤의 미물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깬 것일까.

천마가 멀뚱멀뚱 날 쳐다보았다.


"누... 언니 무슨 소리에요?"

"아무 것도 아니다."

"뭔가 굉음을 들었는데."

"네 꿈에서 들은 게로지."


천마는 내 변명에 그런갑다 하며 다시 누웠다.

실로 어리고 어리석은 계집이었다.


꿈 덕분에 어린 네 외모에 흔들리던 마음을 바로잡게 되었다.

그래, 너는 악마였다.

그래, 너는 천마였다.


이틀 남았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네 피로 묘의 잡초를 씻을 것이다.

파렴치한 놈.

인간말종 놈.


*



2월 27일


<눈을 버렸구나.>


"바른 대로 읊지 못하겠느냐!"

"우린 천마가 별채에 기거하단 것만 알았을 뿐이오...!"

"그 외의 정보를 어찌 알겠소!"


아침부터 시끄럽기로서니 마당을 나가보니 이 광경이라.

남자 둘이 무릎에 돌을 얹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 부담스러웠다.


"사형, 누구더랍니까."

"천마님을 노리고 온 자객인 모양일세."


나보다 윗기수이던 마교 말단 사내 놈에게 말을 물었다.

놈은 가만히 고문을 지켜보다가 내게 말했다.


"참, 사매 오랜만에 보는군. 그간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안 보였는데."

"아하하... 여러가지 바빠서요."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천마를 보살핀단 사실은 비밀인 모양이었다.


"그래? 사매도 중원에 내려갔던 건가?"

"중원이라뇨?"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요새 몇몇 실력자들이 중원으로 향하곤 하던 걸. 윗선의 지시라고."

"아, 비슷한 거에요."

"어떤 일이었나. 나한테도 슬쩍 알려주지 않으련?"


치근대는 게 거슬릴 무렵, 누군가가 사내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사내와 같은 기수인 여자였다.


"어허! 추파는 그만 던지지 못하겠소!"

"추파라니, 추파는 여자가 남자한테 던지는 건데 추파는 무슨 추파!"

"사매가 곤란해하니 그쯤 하라는 것이오!"


하긴 이번 생은 여자였다.

겉으로 보기엔 그리 보일 법도 한가 싶었다.


"꽥꽥 시끄러운 여자 같으니라고...."

"어휴 말세네 말세야."

"예?"

"천마님이 올 1월, 습격 사건 이래로 두문불출 중이시니 저런 하룻강아지들이 튀어나오는 게 아닙니까 설아 사매."


여자가 고문을 당하는 자객들을 삿대질하였다.


"아무리 암굴수행이라지만... 천마님이 제 모습을 드러내면 꼼짝도 못할 놈들이."


장로 녀석은 암굴수행이라고 속인 듯 하였다.

솔직하게 여자 아이가 되었다고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겠지.


"좋다! 네 놈들이 진실로 아무 것도 모른다면 형을 집행하겠다!"

"형이라면 무슨 형 말이오?"

"마교에서는 마교의 법을 따라야지."


장로가 손짓을 하자 장정 몇 놈이 큰 솥을 하나 가져왔다.

솥의 아래는 금새 장작이 채워넣어졌다.


"네 놈들 둘. 골라라."

"무얼 말이오."

"너희 중 어느 녀석이 먼저 끓는 물에 들어갈지 고르란 말이다."


묶여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대로 죽이겠단 말이었다.

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방으로 돌아왔다.

별채의 방에서도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불에 타들어가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아버지를.


"언니 무슨 일 있었어요?"


계집 천마가 내 옷자락을 당기며 말했다.

그 놈을 보고 있자니 살의가 치밀었다.


"별 일 없었어."

"진짜요? 언니 얼굴 슬퍼보여요."

"아니야."

"이상하다. 전에 언니 자다가 울었을 때도 비슷한 표정이었어요."

"괜찮다고."


놈은 계속해서 쫑알거렸다.

나는 버틸 수가 없었다.

도무지.


"언니 그거 알아요? 사람이 슬픔에 빠지면...."

"입 좀 닫아!!"


그리 호통을 치자 천마는 겨우 조용해졌다.


놈이 밉다.

너무나 밉다.


내일 놈을 어떻게 죽일지 상상해보아야지.

가능한 잔인하게 죽일 것이다.

살아서 끓는 물에 들어간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게 아주 잔인하게.


"천마. 천마... 망할 천마."


밤이 깊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거슬린다.

내일이다.

내일이다.


*

틋챈 대회 출품작이긴 한데 일단은 백업.
원본도 큰 차이 없음
https://arca.live/b/tsfiction/65968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