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채널

나도 이제 모르겠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논하려고 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침묵하는게 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왜 그런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내 머리는 굳은 듯하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공지능이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때가 오겠지. 그때는 어떻게 맞받아쳐야 할까. 누군가가 세계를 오류를 낸다면 어떨까? 마치 프로그램의 버그처럼 세상에 버그를 만들어내는거지. 물리적 버그 말이다. 물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값을 참조하는 바람에 그 지점에서부터 세계가 굳어버린다거나. 그래서 해당 공간이 얼어붙은 공간이 되는거지.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지구의 밤은 깊고 넓다. 그 하늘 아래에 서면 시원하고 상쾌하다. 밤하늘을 보고 살아갈 의지를 얻는다는건 바보같은 일이다. 아. 내가 에어컨을 왜 틀었지?


깊은 어둠속 산책로. 요즘에 그런건 잘 존재하지 않는다. 가로등이 다 켜져있으니까. 그러나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좀 큰 언덕)에 난 흙길 산책로에는 가로등이 띄엄띄엄 설치되어 있고 그 사이는 꽤 으스스한 어둠속에 있었다. 그러니 빛을 피하고 싶다면 한밤중의 집이 아니라면 그런 곳에 혼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있는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심지어 방의 커튼도 밤의 도시의 빛을 완전히 막지 못한다. 지상의 도시에서 발하는 빛이 하늘에서 산란되어 밤하늘 전체가 거대한 광원이 된 상황이니까. 물론 솔직히 말해서 이런 것들을 광공해라고 한다면 보름달은 재해라고 할 수 있겠다. 보름달의 선명하고 무의미한 빛을 보면 말이다. 은은하게 발광하는 대기와 다르게 보름달은 방향이 동일한 선명한 빛을 발한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아무튼 커튼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집안 화장실의 문을 닫고 안에 가만히 있는것이 가장 완벽한 어둠을 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꼭 그래야만 하냐고 누가 묻는다면 뭐라 할 말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산책을 한다. 사회와 상호작용을 한다. 나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회는 어른들이 움직여나간다. 나는 그 사회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 뭐야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


누구나 손해를 보는 것을 싫어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렇지만 사람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고 결국 스스로 손해를 창출한다. 방금 전 문장과 같은 표현은 조금 이상하다. 우리가 음수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마치 양수처럼 다루는 것은 솔직히 그리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밤의 시작은 낮의 끝이고 밤의 종말은 낮의 창조다. 초침이 움직이고 있다. 매우 부드럽게.


내가 쓰는 이 글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 계획은 산산히 부서지곤 했다. 무언가의 끝이 새로운 시작이 되는 이런 순환구조는 지구에서 흔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호작용이 왕왕 일어나는 지구이다. 그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채로 관찰하곤 한다. 정말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우울함의 끝에서는 왜인지 행복이 찾아온다. 밤공기는 냉랭하다. 세상에는 정말 엄청난 양의 대기가 있으며 우리는 그 공기를 누리고 산다. 각자 나름의 감성을 지닌 존재로서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간다. 상호작용하면서 말이다. 7일이 일주일이 되고 30여일이 한달이 된다. 우리는 세계를 끝없이 체계화해왔다. 그건 참 신기한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끝임없이 누군가를 평가한다. 아 평가. 나는 평가라면 진절머리다. 경쟁도 너무나 싫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이 안정될 수 있는 길을 되도록이면 택하고 싶어했다.


축축한 흙바닥엔 물길이 나있고 녹색의 이름모를 풀잎들이 자라나고 있으며 이따금 흰 꽃도 보였다. 비포장도로는 매우 길다. 하늘은 지루한 하늘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이름모를 사람들의 뒷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걸어가고 있었을까?


엄청나게 비가 많이 온 날이면 나는 세상을 습기가 잔뜩 낀 거대한 수조관으로 비유하곤 했다. 보슬비가 오는 날에는 다른 비유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분무기로 누군가가 뿌리고 있다고 생각하는게 더 합당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사람들이 어떤 것에서 즐거움과 새로움을 느끼는지 생각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가설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과거에 기술이 꾸준히 발전하고 그것이 불편한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올 때에는 그 기술적 충격이 하나의 문화를 만들었고 그것 자체로 영감이 되었다. 그 이후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그 충격은 점차 잊혀지고 우리는 정신적 공허감에 빠져들게 되었다.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는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억지로 의지할 것을 만들기라도 해야할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나는 그보다 조금 더 심한 망각의 동물이지만 그게 여기서 중요한 건 아니고. 우리는 과거에 우리를 의미있게 만들었던 것들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어느정도 잊어버린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나가는 사람들은 무엇이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건 앞서말한 의미의 공허함이 주는 소강상태가 계속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어찌되었든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문화는 어떤식으로든 존재해야 하니까. 혁신이 주는 충격은 사라졌지만 기술은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이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이 주목받을 것이다. 그 사람은 멘토가 될 것이고 하나의 의미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의미찾기에 어려움을 겪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말이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이렇식으로 내 할 말만 적는것은 큰 중요성을 가지지도 못하고, 별 생산성을 내지도 못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마음속으로 존경심이 들었던 사람들이 내 머릿속에도 몇명 있으며 그것이 내게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사실이긴 하다. 앞서 말했지만 내가 심각한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 머릿속이 백과사전일 수는 있지만 백과사전에서 색인 없이 알고 싶은 정보를 찾는 것은 한세월이 걸린다. 내 머리가 이를테면 목차가 없고 표제어들이 정렬되어 있지 않은 백과사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리 속독을 잘하는 편도 아니다. 내용이 많으면 좋지만 그걸 어느세월에 읽어.


그래서 말인데 내 마음속의 공허함을 결국 어떻게 채울거냐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어두움이 짙어진다. 창 밖의 아파트들은 2020년 풍경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공장들. 도로 위에 여전히 달려나가고 있는 자동차들. 지붕에 맺혀있던 빗물이 툭 떨어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사람들은 서로 대화하면서 거리를 가로지른다. 그렇다. 우리는 의미없는 삶을 결코 살 수 없다. 의미 없는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떤 유행이라는게 있으면 그것을 따라도 좋고, 종교가 있다면 그것을 믿어도 좋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었으면 하는 신념파이다.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색칠해볼까 망상하는 것도 나의 자유다. 예전에 적었던 나를 위한 사명서 5계명이나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