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츠만의 빈 대학교 동료 에른스트 마흐를 비롯한 많은 물리학자들은 그런 미시적인 입자들을 단지 이론적 구성물로 간주했다. 즉, 미시적 입자들은 데이터를 해석하고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적 보조수단일뿐이며, 그 입자들이 거시적 기체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철학적으로 보면, 실재론과 구성주의가 맞섰던 셈인데, 이 대립은 앞선 인용문에서 슈뢰딩거가 언급하는 볼츠만의 ‘슬픈 최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볼츠만은 1906년 여름휴가를 두이노에서 보내고 예정대로 복귀하기 하루 전에 호텔방에서 목매어 자살했다.

그가 유서를 남기지 않았으므로, 자살의 원인을 명확히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저런 추측들이 제기되는데, 그중 하나는 볼츠만의 자살을 당대 지식인들의 원자론 거부와 관련짓는다.

비록 이 추측을 입증하는 직접 증거는 없지만, 원자론 반대자들과의 논쟁이 볼츠만을 괴롭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반대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철학교수 에른스트 마흐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강의를 할 수 없게 된 후, 볼츠만은 1903년 가을부터 마흐의 자연철학 강의를 승계했다.

원자론 반대자들과 대결하느라 이미 철학자와 다름없었던 볼츠만은 그 강의를 계기로 더욱 철학에 몰두했다.

당연히 강의에서도 그는 미시적 입자들의 실재성을 철학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철학적 대세는 마흐였다. 마흐에 따르면, 오로지 감각적 데이터만 실재하며, 무릇 이론은 감각적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고 관리하기 위해 우리가 구성하는 도구다.

마흐는 물리학자이기도 했지만 주로 철학자였다.

아무래도 물리학이 전공이어서 정교한 철학적 논증에 능하지 않았을 볼츠만에게 마흐는 벅찬 상대였을 것이 틀림없다.

볼츠만은 1906년 초에 건강 악화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고 5월에 ‘중증 신경쇠약’으로 병가를 받았다. 얼마 후 아드리아해변으로 여름휴가를 떠난 그가 말없이 자살한 날은 9월 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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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 선생님ㅠㅠ 우린 그런줄도 모르고...

그립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