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에반게리온을 엄청 감명 깊게 보고 입덕을 했었는데, 에반게리온은 정말 골 때리는 애니였다. 이전에 로봇 애니 주인공은 '적 따위 근성+용기만 있으면 다 조질 수 있어!' 이러는데, 에바 주인공은 첫 화에 적이 나타나자 겁에 질려서 '도망치면 안 돼.'를 자기세뇌하듯 중얼거리는 게 주인공의 첫 명대사였다. 


뭔가 미친 스멜이 남달랐고, 극이 진행될수록 주인공 주위의 모든 인간이 정신병 하나 쯤은 기본탑재하고 나오는 막장 드라마 요소에, 청소년들에게 '세계를 구하라'며 모든 부담을 안기는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 소년병 문제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기회도 주었고, 적 앞에서 무참히 무너지는 주인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전개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TV 시리즈 다 본 뒤 연달아 봤던 극장판의 충격이 뇌리에 잊혀지질 않아서, 어쩌다 에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가 되었다. 


언젠가 위키(그 때는 나무위키가 아니라 엔하위키)를 보니, 누군가 이 에바의 충공깽 혼파망 엔딩이 아서 클라크의 SF소설 '유년기의 끝'의 영감을 받았다는 걸 읽어서 흥미는 가지게 되었지만, 정작 책을 집어 읽기 시작한 건 에바를 처음 본 지 10년도 더 지난 대학원 때였다. 바쁜 시절에 읽은 탓에 읽다가 중간에 밀쳐놓고, 또 한참 지나서 다시 읽고 이런 탓에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아도, 썩 괜찮은 소설이었다. 시간 때우기로는 읽을만 했다. 에바 뿐만 아니라 고인물 게임으로 유명한 '블러드본', 한국민속놀이 '스타크래프트', 휴재되서 다시 나올 기미를 안 보이는 웹툰 '스페이스킹' 등 여러 매체에 영감을 준 소설이다 보니, 서브컬쳐 계열 즐기는 사람으로써 원본 레퍼런스를 접할 수 있어 나름 공부가 되기도 했고. 


어느 날 인류가 우주 탐사를 꿈꾸던 시기에, 갑자기 오버로드라는 외계인이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와서는 인류의 우주 탐사를 막고 각 정부의 기능을 무력화하는 대신에 지구 상의 모든 무력 충돌을 없애고 추가로 온갖 기술적 혜택을 제공했다. 초반에는 몇몇 사람들이 외계인이 우리의 자유를 억압할 수는 없다고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오버로드의 기술력에 결국 저항세력은 와해되었다. 그러나 어떤 인류도 왜 오버로드가 우주선을 타고 이 먼 행성까지 와서 자신들을 마치 어린아이 키우듯이 보조해주는지는 이해하질 못했다. 그러다 어떤 인간 하나가 오버로드가 본성으로 타고 돌아가는 우주선에 가까스로 잠입하여 본성 구경을 가게 된다. 상대성 이론에 의해 자기가 행여 살아 지구에 돌아오면 80년은 훌쩍 지나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없어질 걸 알고서도 말이다. 


다른 한 편, 지구에서는 오버로드가 온 지 꽤 지나서 초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오버로드가 지구에 와서 기다려 마지 않던 '신인류'들이었다. 오버로드의 본성으로 간 인간이 알게 된 사실은 오버로드조차도 더 큰 존재인 오버마인드를 모시는 따까리들이었고, 오버로드는 사실 오버마인드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있는 신인류를 키우기 위해 우주 이곳저곳을 누비는 출장 베이비시터였던 셈이다. 사실 여기까지 엄청 지루하게 읽었었는데, 여기부터 마지막까지는 나름 감정이입을 하고 읽을만큼 묘사가 좋았다. 


신인류가 될 아이들은 점점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데, 어느순간부터는 아예 부모조차 무시하며 자기들끼리 공터에 모여 텔레파시로 교감을 하기 시작하고, 오버마인드와 하나가 되기 위해 급기야 모두 손에 손잡고 이상한 패턴을 그리며 강강수월래를 하기 시작한다. 구인류들은 정신세계로 이미 하나가 되어버린 신인류들과 소통도 불가능해진 채로 도태되어 없어진다. 오버로드 본성으로 갔다 되돌아온 양반의 경우 돌아와보니, 자기와 같은 인간은 세상에 자기 하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셈이었다. 그러고 신인류는 그렇게 평생 강강수월래하며 오버마인드와 정신이 하나로 묶여 '진화'했다 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이 대목에서 뭐랄까, 부모와 아이들 간의 절연, 우주여행 갔다가 외톨이가 된 사람의 절망감이 강하게 와닿아서 감명 깊게 읽었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간을 외계인 같은 외부 세력이 와서 키워야만 발전 가능한 존재로 그리는 것도 좀 아니꼬웠고, 마지막에 정신체로 하나 되는 장면을 작가는 나름 긍정적인 변화로 묘사하고 있는 인상이 들어서 좀 갸웃했었다. 뭔가 아무 욕구도 없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오직 사유만 하는 채로 떠다니는 공허한 존재가 되는 것이 진화라니. 그리고 그조차도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보모가 와서 떠먹여줘야 될 수 있다니. 별 이유는 없고 그냥 좀 선민사상의 변주곡을 마주한 기분이라 아니꼬웠다. 개인적으로 인류는 결국 이 상태로 제자리 걸음하다가 서로 물고 뜯고 싸우다가 자멸할 것이라는 게 내 예상이라 이렇게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기대하는 작품이 그렇게 감명깊게 와닿지는 않았다. 차라리 에바 나름의 해석처럼 그냥 다 좆되는 게 더 마음에 들었다. 개인 취향이니 이건 읽는 사람마다 달리 생각할 점이고. 


어쨌든 영화나 게임, 만화에 자주 인용되거나 오마주되는 작품이니, 좋아하는 작품이 이 소설과 연관점이 있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좀 더 깊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이야기 자체는 지루하지만, 덕후의 관점에서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