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수필 채널

나는 글을 써보려고 했다. 

글을 써보려니 쓸 것이 없었다.

그렇게 첫 시도가 실패했다.

 

나는 시를 써보려고 했다.

시를 써보니 이 시를 어떻게 평가할 지 몰랐다.

나는 시가 무엇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시란 무엇이기에 사람들이 시라고 부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것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나는 형식에 맞추어 보았다.

그러나 그 때는 컴퓨터도 없었기에 학교에서 같은 '글자 수의 반복'이라는 운율의 요소를 썼다.

2글자에 맞추었다.

하다가 맞추기 힘들어서 행의 마지막 4글자를 두글자씩으로 맞추었다.

하지만 이것이 시인지 모르겠다.

 

이상을 읽었다.

나는 다시 고심했다.

시는 직접 읽어가면서 쓰는 시와 보여주는 시, 그리고 그려주는 시가 있다.

직접 읽어가면서 쓰는 시는 규칙이 없다.

규칙이 있더라도 말해보니까 괜찮으면 깨버려도 된다.

보여주는 시는 여러 미디어와 같이 보여준다. 

소설을 만화로 만들거나 영화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려주는 시는 장면을 설명한다.

독백이어도 좋고 제3자의 서술이어도 좋다.

 

아래의 두 분류는 공감을 목적으로 한다.

공감할 수 없다면 그 시는 폐기물이다.

그러나 해석가들은 작가의 자서전을 읽어봐도 공감할 수가 없는 시조차 그들이 생각하는 작가를 만들고 시를 그 허상에 대입한다.

전문가끼리는 서로의 해석을 존중해주어서 다행이다.

 

이상을 읽었을 때, 처음 내가 알게 된 시는 지극히 은유적인 시였다.

나는 나만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비유했다.

비유를 하다보니 어디까지 비유를 해야 할까 고민했다.

고민하다 보니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가 고민하면서 직접 읽어가면서 걸리적 거리는 부분을 생각하는 내 자신을 조금 더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다.

하지만 무관심에 휩싸였다.

 

나는 어느덧 다시 생각을 하여, 시인들이 소설도 썼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시인은 어느 정도 소설을 쓸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를 해보았다.

 

열심히 설정을 짰다.

초능력을 가진 수인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했는데 그건 다 프로그램이고 프로그래머가 빌런들을 투입하는 걸 막아낸다, 라는 얘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베르베르 베르나르의 개미에 나오는 실제 사회를 구현해놓은 프로그램에서 발전한 이야기인 것 같다.

그 땐 몰랐지만 단간론파 2랑도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것 같다.

 

지금까지 생각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고민했나 보다.

하여튼, 나는 펜을 들어보았다.

들기 전엔 머릿속으로 장면들이 나열되어졌던 구간이 단 몇 줄로 끝이 났다.

그 몇 줄도 딱딱했다.

씹기에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포기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간간히 문학 놀이나 한답시고 장난으로 싸지르고 있다.

하지만 아쉽지 않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