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언제나 느껴왔었다.


재혼한 어머니 밑에서,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계모의 이미지와 다른, 행복하고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았지만.


그렇지만 그 행복했던 가정 안에서도 채워지지 않던, 가슴 깊은 곳 까지 닿지 않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목마름을.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점점 잊혀져 갔던 그 날의 멜로디도.


"여보세요?"


[○○○씨죠? 저, ○○○씨 딸인데요……. 어머니께서 어제 그만…….]


배다른, 아니 씨가 다른 남매에게서 늦은 시간 연락이 왔을 때, 생각보다 슬프지는 않았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느끼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을 떨어져 지냈으니까.


하지만 슬픔 대신 날 집어삼킨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있던 그 멜로디와 지금껏 채워지지 않았던 목마름이었다.


"……그렇군요. 장례식장이 어디죠?"





다음 날, 검은 양복을 꺼내들어 입고 있자 아내가 아이를 안은 채 다가왔다.


"혼자 갔다 오려구요?"


"그러려고. 당신은 우리 엄마 얼굴도 못 봤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 어머니신데……."


"신경 쓰지 마. 이제 거의 남남이라고 봐도 되니까."


아내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에 빠진 아이를 보며, 나는 나한테 되물어보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제는 남남인 사람을 위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장례식장으로 가려고 하는 걸까.


내가 자라서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때까지 엄마는 날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대체 뭘 위해서 가고 있는 거지?"


차를 몰아 장례식장으로 향하면서도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정답이라는 듯이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갈증과 멜로디만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장례식장에 들어가자 엄마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씨다른 남매가 자신의 아이의 머리를 무릎에 뉘여 재우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셨네요."


"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쪽으로……."


조심스레 아이를 눕히고 딸에게 안내받아 들어 온 빈소에 올려져 있는 사진 속의 엄마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는 다른,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릴 적 희미하게 기억나는 얼굴과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까지 채워지지 않던 갈증을 호소하던 가슴 속 한 켠의 무언가가 갈증을 채우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리아기 불고노는 하모니카는~]


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멜로디 또한 점점 더 소리를 키워만 나갔다.


[옥수수를 가지고서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멜로디가 선명해지자,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있던 장면이 눈 앞에 펼쳐졌다.


햇빛이 쨍쨍 내려쬐는 무더운 여름날, 더위를 피하기 위해 선풍기 앞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으면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맛있게 쪄진 옥수수를 커다란 접시에 한아름 담아 온 엄마는 자신의 무릎맡에 날 앉혀놓고 동요를 불러주었다.


[옥수수알 길게 두줄 남겨가지고~]


그 어린 시절의 나는 천진난만하게 옥수수를 먹으며 엄마의 동요에 따라 고개를 흔들었었다.


"왜…… 왜 이혼한 거에요…."


너무나 커져버린 목마름이, 그 커져버린 덩치를 주체하지 못해 넘쳐버린 목마름이 순식간에 슬픔으로 바뀌어버렸다.


"도대체, 왜 절 두고 가버린 거에요……."


가슴 깊숙한 곳 까지 채워주었던 그 따스함도, 포근하게 감싸주던 그 동요도, 그 어린 날의 옥수수마저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대체 왜 한 번도 찾아 오지 않았었냐구요!!"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사실에.


아무도 없는 빈소에서, 더 이상 울고 있는 나에게 손을 뻗지 못하는 이의 앞에서, 난 하염없이 울었다.





장례식장을 비척비척 걸어 나온 나는 슬픔이 빠져나가고 비어버린 가슴 속 공허함을 참지 못하고 담배를 샀다.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고 한 모금, 공허해진 가슴을 채울 수 있게 길게 한 모금 빨았다.


연기를 내뱉고 다시 한 모금, 연기를 내뱉고 다시 한 모금, 다시 한 모금 더.


"젠장……."


분명 이 공허함을 채우고 싶어서 피고 있는 담배는, 그 연기가 빠져나가며 가슴 속 구멍에 남아 있던 잔재 또한 함께 가지고 가버렸다.


담배꽁초를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던져넣자 언제 나왔는지 엄마의 딸이 나에게 다가왔다.


"저, 이거 받으세요."


딸이 조심스래 건낸 건 두툼한 하얀 봉투였다.


"이건 뭐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혹시라도 ○○씨가 오면 꼭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자기는 하나만 가지고 가면 된다면서요."


건내받은 봉투를 펼쳐보자 수많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내가 태어난 사진, 처음으로 기어다니게 되었을 때의 사진, 첫 돌잔치 때 사진, 가족이 다같이 물놀이를 갔을 때의 사진.


나와 엄마의 어린 시절이 담긴 추억을 멍하니 보고 있자 엄마의 딸이 말해주었다.


"어머니는 가족들 몰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지만, 

가족들 몰래 사진들을 보며 웃으시는 걸 많이 봤거든요. 사진을 보고 나서 숨죽여 우시는 것도."


내 손에 들린 사진을 보며 딸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병실에 계실 때 사진을 들고 와달라고 하셔서 드리면서 여쭤봤어요. 그렇게 그리워하시면서 왜 보러 가지 않으셨냐구요."


"뭐라고 얘기하시던가요?"


"엄마~"


엄마의 딸은 자신을 찾아 밖으로 나온 아이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그 아이가 날 잊고 행복한 가정에서 행복한 삶을 살며, 날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해서.' 라고 하시더라구요."





발인을 위해 엄마의 관이 밖으로 나오는 걸 보며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엄마의 딸은 발인까지 보고 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어머니도 ○○씨를 무척 보고 싶으셨을 텐데요."


"괜찮아요. 저도, 엄마도, 앞으로 계속 볼 수 있을테니까요."


내가 태어난 시절부터 엄마와 떨어지기까지 찍었던 사진들, 그 중 그 날의 추억이 담긴 사진만이 없는 것을 떠올리며 나는 말했다.


차에 올라 탄 나는 조심히 엑셀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텅 비어 있던 바지 주머니 안은 담배 한 갑과 사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