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도, 전쟁터의 밤은 보통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전쟁터의 어둠은 일상에서 지친 몸을 뉘여 불을 끌 때 느껴지는 이불과 같이 덮어오는 포근한 안락함이 아닌, 돌멩이가 굴러가는 소리에도, 느닷없이 빨라진 바람의 기척에도 마치 칼로 찔린듯이 소스라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다.

 


'아이언 메이든이라고 아냐? 중세시대 고문기구인데, 관뚜껑 안짝에다가 빽빽하게 쇠못을 박아놓고는 계속해서 뚜껑을 내려서 사람을 고문하는거지. 지금 우리가 딱 그 짝인것 같다.'

 


 O의 머릿속엔 얼마전에 1소대장이 지나가듯 했던 말이 휘돈다. 당시 적군에 의해서 보급로가 차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언제나 자기가 알고 있는 뭔가를 얘기하기 좋아하던 1소대장은 차단로를 돌파하는 작전으로 목숨을 잃었다. O에게는 이 어둠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적군과 진배없었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라고, 착각이라고 계속해서 뇌까리고 정신을 집중해도 얼마 가지 않아 다시금 환상이 보이고, 공포로 눈이 흐려진다. 분명히 무기를 앞에 겨누고 있는것은 자신인데도, 마치 어둠 속을 겨누고 있는 총구의 끝에는 자신의 붉게 충혈된 눈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왜곡된 망상까지 그의 의식을 점거하려 하고 있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 밤하늘을 올려다 본다. 소위 말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이었다. 달빛은 온데간데 없고, 별들만이 빽빽한 소나무숲 사이로 자신의 미약한 빛을 내리긋고 있었다. 솔잎 사이로 마치 체를 통해서 보는 것 같은 그 얼마 되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 본다.

 


부모님, 애인. 지금껏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공포, 허기짐. 자신의 눈 앞에서 쓰러진 소대의 전우들, 그리고 적군들.

 


 눈 앞을 뒤덮은 어둠과 같은 머릿속에서는 지금껏 자신의 행동을 촉발해 왔던 크고 작은 매개체들이 뇌신경과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날아다니고 있다. 머리속에서만 기억의 파편을 주우려는 노력을 하는 O의 모습은, 옆에 있던 선임 K의 모습에는 넋나간 사람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신차려!"

 


 K는 O의 목 뒤를 때리면서 귓속에 대고 조용하게 윽박질렀다. 원래 성격 같았으면 철모 위를 개머리판으로 깨질정도로 후려갈겼겠지만, 지금 K와 O는 척후병으로 적진에 근접하게 위치해 있고, 그 정도의 커다란 소리는 당연히 위치를 노출시킨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도의 가벼운 자극만으로도 O가 현실에 집중하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죄, 죄송합니다. K상병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었지만 O는 K가 지금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O는 다시금 전방에 시선을 집중했다.

 지금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숲 중심은 보름 전의 격전지역이었다. 정확하게 17일전 이 곳에서 전면전에 돌입한 양측은, 상호간의 막대한 피해만을 남긴 채 이 어두운 숲을 중심으로 교착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 이곳에서 적군과의 크고 작은 교전이 있었지만, 아직 누가 이득을 보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K는 참호 벽면에 등을 기대고 털썩 주저앉았다. 병사가 들어가 있으니까 참호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직접 판 것은 아니고 사실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덩이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래서 보통 2인이 직접 파내려 쓰는 참호보다는 꽤나 널찍하였다. 그는 하이바를 벗고, 참호 벽면에 거의 밀착시켜 그 안에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최대한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최전선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지만, 방금 그의 후임이 보여주었던 넋나간 행동은 K에게 조금 숨을 돌려야 할 필요를 만들어 냈다.

 K는 담배연기 한 모금을 땅바닥으로 깊게 내쉬고 떨리는 눈빛으로 참호 밖을 주시하고 있는 O에게 말했다.

 


"야, 너도 나 다 핀다음에, 한대 빨고 조금 쉬어. 피곤해 보인다."

"네, 알겠습니다."

 


 평시나, 혹은 훈련시에는 만일 실수가 있었다면 여러가지 방법으로 소위 말하는 '갈구다'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줬을 테지만, 이 곳은 전장이다. 그 전까지야 교정을 하기 위해서 후임들을 질타하고 가르칠 수 있었지만, 평상시와 같은 사소한 행동도 이 곳에서는 어떤 일의 방아쇠가 될 지 모르는 일이었다. K도 자신이 평상시에는 그리 좋은 선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지금 최전선에 서 있는 이 상황에서 훈계라는 작용은 어떤 반작용으로 다가올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K는 대신 긴장한 후임을 다독이며, 편안하게 해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자리를 바꾸어, 아까 담배에 불을 붙였던 그 자리에 O가 앉았다. 똑같은 방식으로 불을 붙이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여유를 찾자, 아까는 날이 서 있던 별들의 모습이 다시 원래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애인이라도 생각난거야?"

 


 K의 질문에 O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선임을 바라보았다. 그는 총구를 전방에 고정시킨 채로, 품속에서 무언가를 뒤적뒤적 꺼내려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잠깐 정신을 다른데 팔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긴 뭘. 딱 보니까 그냥 두고온 그이가 그리워서 미칠듯한 표정이더만. 자."

 


 그렇게 말하며 K는 방금까지 자신이 주머니에서 뒤적거리며 찾던 물건을 O에게 건네 주었다. 아까 O의 표정은 누가 봐도 넋이 나가 있는 표정이었지만, K는 일단 주의를 좀 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자기 자신한테 하는 말이기도 했다.

 O의 손에는 K에게서 건네받은 종이가 한 장 들려 있었다.

 


"...이게 뭡니까?"

"아, 내 여자친구. 여기 끌려나올때 너무 급하게 나와서 제대로 된 사진이라곤 그것밖에 못 갖고 왔네."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꺼내는 K의 목소리에 O는 아까까지 느꼈던 전쟁에 대한 공포, 기억에 대한 상실감 등이 확실히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곧 그 공백은 다른 감정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O는 경악스러운 눈초리로 K의 뒤통수와 A4용지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구깃구깃 접힌 A4용지 속에는, 전쟁 전에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마법소녀 뭐라던가 하는 여자애들이 잔뜩 나오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중 한 명의 전신 프린트가 있었다.

K는 자신을 흉물스럽게 쳐다보는 눈빛을 느꼈는지, 겸연쩍게 얘기를 이어나갔다.

 


"아, 그러니까 걔가 뭐냐면..."

 


 K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아니, 끊길 수 밖에 없었다. 말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포탄의 파열음이 바로 옆에서 터져 나오듯이 귀청을 때렸기 때문이다. 이미 본진 측에서도 적들의 공세를 눈치챘는지, 등 뒤로 조명탄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들이 숨어있던 참호는 순식간에 밝아졌다. 폭발 후 남아있는 고폭탄의 열기는 주변의 마른 풀들을 태우고, 조용하던 숲속은 다시 전장의 화마에 휩싸였다.

K는 급하게 참호를 이탈하며 O에게 지시를 내렸다.

 


"야, 씨발, 빨리 나와! 일단 후방참호로 이동하면서 본대로 복..."

 


 K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이미 포격은 그들이 있던 자리 주위를 집어삼켰지만, 굉음과 급박한 상황이 그의 말을 잘라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말이 안 나오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K가 흐려져 가는 의식을 붙잡고 들지 못하는 고개에서 보인 시야에는, 가슴에서 어둠과 불빛의 명멸로 빛이 섞여 새까만 색으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이 보였다. K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고개를 뒤로 돌려 보았다. 아까 조그맣게 붙었던 불씨가 숲 전체를 뒤덮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아직 연기가 흘러 나오는 총구를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후임병의 모습이 보였다.

 


"...왜..."

 


 K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O의 총구에서는 한번 더 불이 뿜어져 나왔고, K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불길이 뒤덮은 숲 중앙으로 다시 한번 고폭탄의 방사포격이 작열했고, 불붙은 잔해들은 이제 조명탄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밤하늘에 비산했다. 그런 아비규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 지옥과 같은 배경을 뒤로 한 채 O는 조용히 뇌까리며 느린 걸음으로 전장을 이탈했다.

 

 

 

"카오리쨩 내꺼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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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병신같은 글이 쓰고 싶어서 막 썼던 글

 

이제 새 것들도 좀 올리고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