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스러운 상황이나 곤란한 지경에 처할 때면, 나도 모르게 하잘 것 없는 상념에 빠지곤 한다.

 

 이를테면 자유 의지와 운명론이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말 한다. 이것은 천부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일종의 권리이자 능력으로서,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무단한 노력을 통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모습이 된다던가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지금, 이 논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반박되기 쉬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내전 지역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전쟁에 희생되는 사람이라든가. 예를 들자면, 선천적으로 질병을 갖고 태어나 채 이십을 채우지 못하고 삶을 저버리는 사람이라든가. 예를 들자면,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자수성가 했지만 구조적으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재벌의 발끝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라든가.

 

 "알겠어?"
 "...일단."

 

 상념이 흐려지고 현실이 불쑥 튀어 오른다. 익숙한 풍경이 상상을 찢고 묵직하게 자리 잡는다. 제대로 관리 되지 않아 무성하다 싶은 잡초. 수 많은 발자국에 짓이겨진 흙바닥 위의 벤치는 나무를 닮은 갈색보다는 먼지 같은 회색에 가깝다. 깨끗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나도, 이제는 연희도 그런 것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연희는 흰 바탕에 녹색의 줄무늬 따위가 그려진 환자복을 입은 채로 날 빤히 바라보고 있다. 연희의 왼 손목에 박혀 있는 링거가 죄수를 속박하는 쇠사슬처럼 흔들거린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정리하고 싶은 거야. 대답 해."

 

 결단을 내리라는 듯 단호한 말투와는 달리, 시선은 어딘가 불안정하다. 불쾌한 꿈틀거림이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진다.

 

 "싫어."

 

 나는 대답했다. 연희는 잠깐 날 노려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나는 담담히 그런 연희를 바라보았다. 바라 보다가, 꽉 쥐어진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듯이 잡았다. 연희는 완강히 거절하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나는 힘을 주어 막았다.

 

 "연희야."
 "부르지 마."
 "이연희."
 "부르지 말랬어."

 

 끝끝내 손을 빼낸 연희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체 왜?"
 "다 끝났으니까."
 "그래도 방법이..."
 "그만 해."

 

 연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주먹을 꽉 진 채 가슴께로 향했던 손이 무릎 위로 내려오며 펴졌다. 

 

 "너무 힘들어. 네가 이렇게 찾아올 수록, 나는 더 힘들어져. 네 얼굴을 보면, 자꾸 더 살고 싶어져. 그게 너무 힘들어."
 "...방법이 있을 거야."
 "아냐, 없어.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방법이 있는데 못 찾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 것도 없는 게 나아. 그러니까 더이상 찾아오지 마. 내버려둬."

 

 연희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한참이나. 한참이나 여윈 몸선이 헐렁한 환자복 위로 언틋 드러난다. 

 

 "부탁이야."

 

 단호한 연희는 말에 배어 있는 것은 짙은 상실감도, 우울함도 아닌 간절한 바람이었다. 나는 링거대를 끌고 군데군데 잡초가 난 길 위를 걸어가는 연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린 무력감이 피를 식히는 게 느껴졌다.

 

 삶의 불행한 부분 중 하나는 나와 우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표정했고, 행복했고, 지쳤고, 천진했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평범한 그 모습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감정은 얼음처럼 굳어있을 따름이었다. 연희의 말을 들을 때는 가슴을 정으로 내려 친듯 찔렸던, 피를 흘리던 마음이 이제는 그저 공허할 따름이었다. 생활은 과하게 돌려 고장난 태엽처럼 풀려버려서, 가끔씩 정신이 들 때면 습관처럼 일상을 이어나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일을 했고, 식사도 했고, 휴식도 취했으며, 가끔씩은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기까지 했다. 희한한 것을 보듯이 날 관찰할 수 있었다. 여태껏 쌓아온 습관은, 나를 평범하게 살도록 해주고 있었다.

 

 연희는 더이상 면회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