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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azing on a Monday Afternoon (...Revisited)

#2 2018년의 2월에는 네 번의 화요일이 있었다고 하더라

#3 점심식사에는 120분 정도가 적당하다

#4 Have A Nice Day

#5 진실은 공상을 찢는가

새로운 시작 (완결)

 

#4 Have A Nice Day

 

 

나는 꿈을 꾸고 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교실 속에 내가 있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 여러 다른 사람들이 있다.
내 손에는 긴 막대 같은 것이 들려있다.
나는 속으로 우산인가, 하고 생각한다.
나는 약간 상기된 채로 그 막대를 들고 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어째선지 내 손이 조금 움직이고 무언가가 튕기듯 나아간다.

 

                                  그리고 내 앞에는 이마가 관통된 한 아이가 쓰러진다.

 

나는 돌아갈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길은 하나뿐 - 내 손은 계속해서 힘을 주고, 이어서 몇 명이 더 주저앉는다.
탄환은 묵직하다. 장전은 오래 걸린다.
어째서인지 탄환은 갈수록 느려진다.
지금 쓰러진 아이의 머리는 관통되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가 교실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쫓아간다.
복도에서 마주친 그의 손에는 휴대전화기가 들려있다.
이미 전화는 연결되어 있다.
나는 돌아갈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아갈 길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막대는 반 바퀴를 돌아간다.
나는 막대를 힘차게 당겨본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탄환을 쏘아 올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도, 누군가가 목덜미를 세게 잡아당기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나는 막대를 꺼내어본다.
관통되지 못한 채 입안의 살점이 그곳에 박혀있다.
나는 한 번 더 손잡이를 당겨본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나는 아픔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꿈을 꾸고 있다.


 - 라고 생각한다.
 

 

 

  서서히 정신이 든다. 잠에서 깨어난 듯하다. 가장 먼저 깨어나는 것은 촉각이다. 느껴진다. 사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단단히 매여있다. 눈은, 떠지지 않는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사실은 정적인지도 모르겠다. 움직이는 것은 손가락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의사도 표현할 수 없다. 정적과 무의 늪에 빠져있는 셈이다. 입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 사실 입이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넘어가자. 마침내 시각을 깨운다. 어두운 방 속에 내가 있다. 열기가 느껴지는 공간에 차갑게 식은 나를 나는, 그 현실에, 세워보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귀를 연다. 

 

  "...나?"
  "어?"
  이건 진짜로 못 들은 거다. 감각을 일깨우는 중에 말하다니, 비겁하구나. 


  "정신이 드나?"
  "일단은."
  지금의 나를 온전히 깨어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수면내시경을 하고 온 사람처럼 실없는 소리를 하거나 나의 소중한 비밀을 폭로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알고 있나?"
  "......"
  아뇨. 모릅니다. 대체 뭐를 말씀하시는 건데요. 


  "알고 있냐고."
  "뭐를?"
  어이쿠. 말해버렸다. 난 몰라. 이젠 맞아도 몰라. 


  "얼마나, 냐고."
  "......"
  아니 진짜. 왜 아까부터 문장에 미지수를 하나씩 박아넣는 거죠? 뭐 근의 공식으로라도 풀라는 건가요? 에, 그러니까, 근의 공식이 뭐였더라... 그러니까, 엑스 원이, 마이너스 삼 에이 분의 비 빼기... 나는 또 뭐한다니. 


  "얼마나, 죽였냐고."
  "열일ㄱ... 아니, 열여섯."
  그 첫 단어 말하고 뜸들이는 것 좀 안 하면 안돼? 또 문맥적 해석을 요구하는 줄 알았잖아. 


  "......"
  "......어이"
  왜 질문을 해놓고서 입을 닫고 그러세요. 말한 내가 뻘쭘하잖니. 


  "......어......"
  "......"
  "......자, ...그럼,"
  "......네."
  "몇 번이나 죽었나?"
  "한 번."
  "한 번?"
  "단 한 번."
  "단 한 번?"
  "뭐, 얻어맞고, 엎어지고, 파묻히고."
  "그래서?"
  "보시다시피."
  "......?"
  "지금은 이런 사람이 되어있다구요. 나 참, 사람 귀찮게 하네."
  이거이거. 나 너무 친절하잖아. 


  "이런 사람이라. 그래서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감이 잡히고?"
  "흥, 뭐 한 번 더 죽는 셈 치죠. 누가 약이라도 먹였나."

 

......그럴 리가 있나. 하여튼, 어제 땅을 파는 게 아니었다. 온몸이 쑤셔서 이건 정말.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꽤 귀하게 자란 몸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정말, 정말이지 새로운 종류의 감각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도 16은 정말 완벽한 숫자다. 2의 2의 2제곱이라니.

 

 

  나른한 일요일 아침을 생각해 보면, 이불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대는 것은 상당히 기분이 좋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몸을 뒤척이다가 일어나서 맞이하는 오전의 햇살도 상당히 기분이 좋다. 비록 오늘이 일요일인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이불속 쾌감 프로세스'를 철저히 이행하려 하고 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어쨌든 이불 밖은 위험하다. 처음 듣는 것 같다면 기분 탓이다. 

 

  '이불속 신뢰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은 절차로 이루어진다. (이름에서 통일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나는 이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당신을 사회적으로 몰아세울 자신이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은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건만, 사실은 이걸 듣고 웃을 수 있는 당신이 승자인 것이다. 어랏! 설마 너는... 루저?) 먼저 발가락을 움직인다. 그다음 손가락을 움직인다. 이후에는 사지에서 관절 하나씩 단계적으로 위로 올라오면서 움직인다. 곧 다시 말해 지금 나는 이불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원리원칙에 따라 움직임은 점점 격렬해지고, 마침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하면서 나는 당황하는 자아를 붙잡고 떨어진 물건을 침착하게 주워본다. 그런데 손에 들린 것은 예상외의 물건이었다.

 

 

  손에 들린 사진을 나는 바라본다. 밤의 풍경은 도시를 비추고, 도시의 풍경은 밤을 비춘다. 회색의 풍경이 짙푸른 밤하늘을 감싸고,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은 구멍 뚫린 철근 콘크리트 기둥 사이를 파고든다. 사진을 바라보며 나는 가슴 한쪽이 시려옴을 느꼈다. 그 아련한 감정. 입에 담아보지만 어색하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사진은 내가 이 세상을 기억하는 방식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사람 하나 없는 고요한 정적이 사진 안에 흐른다. 나는 손을 뻗어본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본다. 남자는 무어라 말을 한다. 나는 듣지 않는다. 성층권의 음악이 익숙하게 들려온다. 나는 듣는다. 나는 떠오름을 느낀다. 드러누운 채 끝을 모를 하늘을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그것은 자유다. 자유는 해방이다. 나는 손을 놓는다. 그리고 누워본다. 차가운 바닥이 등골을 타고 뇌를 잠식한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잿빛의 천장이다. 현실은 추락하고, 나는 떨어지기 전에 내려가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했다.


  나는 본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의 꿈과 이상은 부풀고 쪼그라든다. 떠오르고 진다. 그리고 추락한다. 스위치가 내려가면 밤은 더는 오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오늘의 나는 다시 오지 않는다. 어제의 나는 다시 오지 않는다. 내일의 나는 어디 있을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뿐이다. 나는 오늘의 일을 한다. 현관문을 열고 몇 걸음 나아가 나는 뒤를 돌아본다. 문은 닫혀있다. 언제나 그랬듯.

 

 

  내가 사는 곳에는 강이 있다. 사실 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크기다. 강이 있으니 당연히 다리도 있다. 다리의 중간에 서서 나는 아래를 바라본다. 깔끔하게 정돈된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나의 시야에 들어온다. 몇 개의 벤치와 아담한 돌다리가 있다. 실로 21세기의 풍경이다. 인공적인 광경은 사람들의 돌아갈 곳을 없애는 것 같다. 모든 것을 새로 만들면서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그 간극에 영원히 갇힌다. 그 긴장감을 즐기면서 나는 어떤 철문 앞에 다다른다. 맞은편에는 주물공장이 있다. 올라간 지 몇 년 되어 보이지 않는 말끔한 건물들도 있다. 그리고 내가 도착한 이곳의 철문은, 주물공장의 시간과 상업건물의 시간 사이에 끼어있다.


  아마 십 년이 조금 지났을 것이다. 바다 건너 먼 들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돌탑이 무너진 것이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기단부의 돌을 억지로 너무 작게 쪼갠 것이 원인이라고. 가장 아래의 돌이, 언제나 튼튼하게 탑을 떠받쳐야 할 돌들이 어느샌가 가루가 되어버려 이제는 보이지도 않게 되어버렸다고. 서서히 조금씩 가라앉던 탑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날린 먼지바람이 바람을 만들고, 그 바람이 다시 바다를 건너 폭풍을 만들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장 위에 있던 큰 돌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큰 돌을 올려놓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까. 여하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폭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 시간의 틈으로 사라진 흔적을 나는 지금 보고 있다는 것이다.


  굳게 닫힌 정문을 지나 오른쪽 모서리를 돈 뒤 일곱 번째 철판. 옆으로 살짝 흔들어 준 뒤 힘을 주고 앞으로 민다. 어째선지 나는 알고 있고 그곳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다. 나는 몸을 밀어 넣어 본다. 

 

 

  공사장 안은 널브러진 자재들과 어지럽게 늘어놓은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발이 가는 대로 움직여본다. 발끝에 채는 떨어져 나간 시멘트 조각과 녹슨 철근을 바라보며 나는 한 동의 건물 앞에 도착했다. 대략 십이 층 정도 되어 보이는 높이(사실 창문 구멍을 세어 봤다.) 위에는 아직 더 올라갈 층수가 남았는지 천막이 둘러 있다. 나는 아직 엘리베이터도 만들어지지 않은 건물의 불안하게 생긴 계단을 한 층씩 천천히 올라가 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귀에 꽂힌다. 안전불감증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계단에 붙어있는 숫자를 바라보면서 어느 한 숫자 앞에 멈추어 섰다. 이곳의 시간은 어디에 끼어있을까.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분명 그때의 나는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단순히 답을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빛바랜 기억은 오늘에 이르러 빛바랜 풍경으로 다시 돌아왔다. 밤은 낮이 되어 돌아오고, 현재는 과거가 되어있다. 누군가가 자유를 찾아 떠난 그 순간을 나는 추억해본다.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머릿속 저편에서는 혁명과 투쟁의 군중가요가 들려온다. 너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또 무엇에게 패배하였는가. 인류의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지만 기록되지 않는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패배뿐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지고, 분명 그때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가 풀어본다. 잡힌 것은 공기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누군가의 인생이기도 하다. 어제를 살아간 누군가의 영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적막감 속에서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느낀다. 나는 발길을 돌린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그야 나도 모르겠다. 세상사 앞뒤 맥락을 다 파악하고 행동한다면 당신, 한국인이 아닐걸. 언제 눈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이곳은 미끄럽지 않다. 사실 미끄러울 리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건물 머리 꼭대기의 공사 중인 H빔 위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하늘로 향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날 여기에서 저지된 것이다... 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고층 건물들이 있다. 어쩌면 궤도비행선에서 거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특정 세력이 자신들의 '관상용 지구'를 만들기 위해 선동한 것인지도 모르겠어! 


  높고 흐린 하늘이 나를 반긴다. 이젠 뭐가 맞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바다코끼리인지 바다코끼리가 나인지에 대해서 장장 십몇분을 생각하고 있노라니, 없던 깨달음도 생길 것 같다. 아니, 생겼다. 나는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고 흔들렸다. 뇌가 진동한다. 잊을 수 없는 충격의 여진이 몸을 감싼다. 나는 바다코끼리가 아니다. 나는 새이다. 새는 날 수 있다. 나는 날 수 있다. 새는 자유를 상징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마음만 먹으면 자유를 추구할 수 있다. 지상의 미련은 갖지 않는다. 나는 옥탑방에 살지 않는다. 나는 카뮈를 모른다. 나에게는 소아마비에 걸린 가족같은 책임 따위는 없다. 나는 날 수 있다. 오래 전 그가 그랬듯. 나는 새가 된다.

 

 

  이해받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를 동경했다. 그러나 그는 그 동경에 실망했다. 나는 그렇게 사라진 누군가를 지금 추억해본다. 그는 멀미가 나게 하는 흔들의자였다. 많은 사람이 욕을 퍼부었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가 되어본 적이 없다. 나는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되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그렇기에 나는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나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나의 그것과는 달랐으면 했다. 나는 색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다른 형태로 보였으면 했다. 인류가 동족의 뇌를 꺼내어보기 전까지, 혹은 지금도, 내가 생각하는 사과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사과가 같으리라는 보장은 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에게 세상 모든 사물 간의 연관성이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함수관계가 성립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사람의 함수가 같은 식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적어도 나에게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유를 갈망했다. 내가 불 꺼진 빈 옥탑방을 갈망할 때 그는 자유를 갈망했다. 내가 고층 건물에 압도되고 헛구역질을 할 때 그는 더 높이 올라갔다. 계속해서 올라갔다. 나는 물었다. 떨어지지 않겠느냐고. 무섭지 않으냐고.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향했다. 그날은 그에게 있어서 성대한 기념일이 되었을 것이다. 폭죽을 터뜨리고, 축포를 쏘아 올리고... 쏜살같이 달을 가로질러 그는 새가 되었다.


  내가 본 첫 번째 새는 그날의 참수리였다. 두 번째는 어느 겨울의 박새였다. 나는 아직 세 번째 새가 될 생각이 없다. 나는 지상을 향해 한 발짝 전진해 보고는, 발걸음을 돌린다.

 

 

  높이 올라서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 지구가 둥글어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넓다'라는 말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은 것 같다. 높이 올라선 사람들에게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려다보기 때문이 아닐까. 여렸을 적 다른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성장하는 모든 인간은 커가는 것을 막연하게 기대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내려다보는 자신은 어떨까. '내려다보다'라는 말이 가지는 이중적 의미가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것을 마냥 부정적인 속성으로만은 볼 수 없게 되었다. 해가 저문 어느 늦은 오후. 적막한 찬 밤공기를 맞으면서 나는 어느 도심공원의 안내지도를 보고 있다. 작은 언덕과 작은 계곡과 작은 산책로. 과연 여기서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나는 발걸음을 옮긴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의 중간에서, 풀숲을 헤쳐나간다.


  나는 확신하고 있다. 어제와 그제의 나와는 다르다. 나는 매일 어제의 나보다 성장하고, 그렇기에 항상 어제의 나를 경멸한다. 다만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이제는 나를 경멸하던 기억이 사라져가는 느낌이 든다. 

 

불꺼진도시의밤거리를나는달려보고싶다
차도여도좋다
인도여도좋다
나는그저다시한번느껴보고싶다
이세상더는남은것은없을것만같은절망감이주는해방과시원한쾌감을나는다시한번느껴보고싶다
단십분이라도좋다
단일분이라도좋다
스쳐지나가는정지된바람소리를나는듣고싶다
폐쇄된로비에나는서고싶다
빈창을나는바라보고싶다
보고싶다
모든사람이점으로보이고또보이지않고
어둠은가로등만을남겨놓고또집어삼키고
느리게흐르는물은더는푸르지않고

 

밤이 아니어도 좋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그들을 위한 조촐한, 하지만 나의 진심이 담긴 송별회를 열어주고 싶다! 
나는 아직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단 일주일만, 아니 단 하루라도 좋다! 
내 힘이 닿는 한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지금의 이 노동과 흐르는 땀방울이, 거칠어져만 가는 숨소리가 이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는내일이내일의나에게는또다른내일이
 

 

 

 

[INS]

  "너를 다시 꺼내 들 줄은 몰랐는데."


  나는 나를 희망과 실망, 그리고 육체적 피로에 원 없이 노출해 준 한 자루의 삽을 들고 있다. 다만 오늘은 거실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의 나는 현관으로 나간다.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를 건너는 모스크바 여행객의 심정으로 나는 집 밖으로 나간다. 가로지르는 길로 갈까, 빙 둘러서 갈까 하다가 결국 나는 강변 산책로를 통해서 가기로 한다. 어디로 가냐고? 글쎄. 나도 아직 안 가봐서 모르겠다. 어렴풋이 어딘지 알 것 같기도 하면서, 또 어떻게 가는지는 모르겠는, 그런 곳 말이야. 


  빠르게 내려가버린 2월의 태양을 바라보면서 어느덧 지나가 버린 시간을 통감한다. 검붉게 물드는 천변풍경은 고요하다. 침착하게 제 갈 길을 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모습을 눈에 새겨두려고 한다. 내일은 내일이 되어봐야 아는 것이라고 자신을 타일러보지만, 내면의 누군가에게 그 외침은 닿지 않는 모양이다. 문득 강물에 시선이 향한다. 출렁이는 물의 표면에 나의 형상은 제대로 비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곳에 있다. 그렇기에 의식할수 밖에는 없다. 한 손에 흙 묻은 삽을 들고, 작업복도 아닌 채 유유히 산책로를 걸어가는 사람은 과연 어떻게 보일 것인가. 아니, 사실은 이 길을 몇 번이고 걸었을 그 사람이 어떻게 보였을지가 궁금하다. 이 길로 다니기는 한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지만, 또 생각해보면 다른 길이 분명히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중한 물건은 깊이 감추어두기도 하지만 그래도 손이 닿는 곳에는 두는 법이니까. 이쯤 되면 확실해졌다. 나는 누군가의 소중한 무언가를 찾아 걸어가고 있다. 누군가의 소중한 무언가라. 과연 나에게 소중한 무언가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찾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왜 소중한 걸까.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본 적이 있다. 소중한 것은 자신의 손안에 보호하면서도 또 드러내놓고 싶은 법인가 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내보이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게 의미가 크다는 방증이겠지. 그런 나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식이다. 언젠가 또 한번 궁금했던 적이 있다.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과 굉장히 가까이에 두지만, 또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제 보면, 사실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정녕 그 사람의 가장 소중한 것일까. 나는 모든 이야기는 끝났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내보여지지 않은 것을 나는 찾고 있다. 그 사람의 약점일까. 그 사람의 후회와 불안의 결정일까. 나에게 드는 생각은, 그 사람이라면 후회라든지, 불안이라든지, 근심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 나에게 그렇게 생각하게 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그런 생각이 든다. 이성적인 사람이다. 매 순간 가장 올바르거나 가장 효율적인 판단을 내린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못했을까, 안 했을까.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한다. 실패의 경험을 교훈삼아 다음을 준비한다. 그럴 때도 절대 성급하지 않다. 올곧게 살아가지만 사회의 시류에도 적절한 반응을 보일 줄 안다. 어느 때에 움직이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인지를 알고 있다. 언제나 내일을 바라본다. 침착하고, 더없이 냉정하다. 하지만 차갑지는 않다. 차가운 건 날씨다. 아마도, 그때도, 그때마다, 그랬을 것이다... 더없이 추운 어느 여름날도 있었을 것이다...
 

 

  지평선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평선 너머에는 또 다른 선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지평선 너머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같은 물리법칙이 성립하고 같은 물건들이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다른 것은 오직 하나, 사람뿐이다. 사람의 양상이 다르기에 사는 모습이 다르고 살아가는 환경이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 차례 지평선을 넘었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다른 모습의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는 나는 하지 못했다. 남겨진 나는 어떨까. 외롭고 쓸쓸할까. 그대로 잘 적응했을까. 인류는 다양한 도구를 만들었고,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다. 그 결과 시공간의 제약은 사라지고, 나의 경우와 같이 지평선 너머로 여행하기는 더 쉬워졌다. 하지만 그 결과 자신의 세계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이 사회는 겉보기에는 큰 위협을 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언젠가는 그들도 변화를 수용하고 여행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알던 사람들은 나에게 여행지에서 엽서를 보내주지는 않았다.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내가 여기에 서 있지 않았다면 나도, 내가 남겨진 그 공간이 있었는지조차도 잊었을 것 같다.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낙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에게는 고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나는 어떤가. 아무래도 나에게 갈 곳은 없는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지난날의 미련을 들추려 하는 나에게, 이 세상이 허락해 주는 공간은 과연 어디인가. 있을 공간이 허락되는 것은 자유를 찾아 떠난 그네들뿐인가. 나는 약간 아쉬움이 든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 않다. 오히려 어르신들 산책용으로 딱 적당한 것 같다. 다만 그런 여유로운 풍경에 삽을 든 사람 혼자 서있다면 어떨까. 내가 보았다면 삽에 묻은 흙마저 피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시간이 꽤 지체된 모양이다. 그늘지기도 한 이곳은 어느새 어둡다. 밤공기는 언제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차갑다. 오늘 나의 인권은 꽤 존중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얼마간 더 걸어야 도착할까를 계속 생각하다 보니 다 온 것 같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입구를 나는 찾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 그냥 이쯤인가 보다, 생각하고 들어가려고 한다. 산책로 바깥이라고 해서 그렇게 경사지거나 또 위험한 것 같지는 않다. 앙상하기 짝이 없는 나무들 덕분에 시야가 가려지는 것도 덜하다. 낮은 성벽을 두르듯 작게 둘러싸인 환상형의 흙더미가 보이려고 하자 나는 발길을 멈춘다. 자세히 보자 환상형이라기보다는 세로로 긴 직사각형의 둘레이다. 언제보다도 큰 숨을 들이마신다. 직감한다. 

 

  야맹증이라면 상당히 위험했을 것 같다. 적어도 몇 미터 정도는 안으로 파여 있다. 밖에서 보았을 땐 낮은 언덕 정도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저하지 않고 내려간다. 이 거리에서 산책로는 보이지 않는다. 산책로에서도 여기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 곳에서도 여기는 보이지 않았고, 여기서도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가운데에 서 본다. 그리고 누워본다. 밤하늘은 높다. 청명하다. 흐리다. 맑다. 구름으로 가득하다. 달이 밝다. 달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부분과 전체의 조화는 이제는 의미가 없다. 하늘은 없다. 땅만이 있다. 땅 속만이 있다. 삽을 든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 않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시간의 틈새에 갇힐 것인가, 주어진 모든 운명을 수용할 것인가, 영원한 고통의 굴레로 걸어 들어갈 것인가, 고통을 모르던 그때의 너로 돌아갈 것인가, 나는 너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때도 너를 필요로 할 것인가, 네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있는가, 아니면 남겨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볼 것인가. 내리찍는다.

 

 

  둔탁한 느낌이 손을 통해 뇌까지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깊고 얕은 정도가 아니다. 누군가의 솜씨와는 차이가 크게 난다. 나는 고개를 숙인다. 몸을 굽혀 바라본다. 칠흑 같은 어둠에 가려진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손을 들어 흙을 훔친다.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밤의 별빛을 받아 하얗게 드러난 사람의 갈비뼈는 
 

 

 

아마도 시간은 자정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