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과거 나는 유동식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간간히 돈을 벌고 있었는데, 갑자기 며칠 전 마트의 과일 코너에서 본 용과의 맛이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까지 용과를 먹어본 적이 없구나. 그래서 다음에 마트에 갈 땐 용과를 꼭 사와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잔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나 혼자 살기에, 집은 평소 때와 같이 모든 불이 꺼진 채로 깜깜했다. 물론 평소 때와 같이 집엔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 내 방에서 키보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상당히 희귀한 스위치를 사용한 기계식 키보드를 쓰기에 단박에 그것이 내 키보드의 타건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혹시나 강도나 정신병자인가 해서 들고 있던 가방을 던질 각오로 방에 들어가봤지만 어이없게도 거기 있었던 건 처음 보는 이상한 꼬맹이였다.


중고등학생 정도의 이상한 여자애였다.(머리는 손질도 되지 않았고 겨울에 반바지를 입고서는.. 여자앤데 다리털도 꽤 수북히 나있어서 처음 봤을때 좀 극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집에 엄마랑 외삼촌도 와 있더라. 불이 꺼진게 아니라 다른 방에 들어가있어서 못본 것이었다.

사정을 들어보니까 외가 쪽 친척이라던 것 같다.

병의 치료인지 수술인지 하여튼 몸이 아파서 근처 대학병원을 다녀야 하는데 집이 멀어서 왕복하기가 어렵다나, 그래서 나한테 아무런 상의도 없이 몆주간 내 집에서 자겠다는 거다. 아마 친척 어른들의 결정인 것 같았다.

(나중에 친척들에게 잔뜩 따졌지만 씨알도 말이 먹히지 않아 결국 1달 반 가까이 같이 살았다.)


누구라도 화가 난다.

이런 상황이라면 분명 그 누구라도 화가 날 것이다.

좆같은 상황에 분개하기에 앞서 나는 이 집에서 지켜야 할 몇가지 수칙(방에 들어가지 말라든가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는가)을 알려주고는 다시 집을 나왔다.

시각은 대략 7시 반쯤. 홧김에 나온 거지만 역시 추웠다.

그때 장갑도 집에 두고 와서 엄청나게 아팠던 걸로 기억한다.


2km쯤 떨어진 대형마트까지 걸어가서 바로 용과를 3개 샀다.

용과만 사서 바로 나왔다.

화가 가라앉을 무렵 뒤늦게 너무 추워서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 꼬맹이는 식탁에서(4명정도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이었는데 하필이면 내 자리에 앉아서) 유동식을 까먹고 있었다.

유동식 캔에 토마토 통조림을 데워서 섞어먹고 있었는데, 내가 근무하고 있었던 회사의 유동식이었다. 이유는 잘 머르겠지만 살면서 가장 크게 손이 떨렸다.


같이 살게 된 거 친해질 겸 용과 사왔는데 먹을거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자기는 유동식밖에 못 먹는단다.

용과 대충 씻고 껍질 까고 썰고 접시에 담아가지고 마루에 앉아서 TV? 보면서 먹었다. (TV였는지 유튜브였는지 장 기억 안난다. 아무튼)

용과 맛이 밍밍해서 다 못먹고 버렸던 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가..


그것이 그 꼬맹이랑 만난 첫날이었고 40일 내내 같이 지내는 동안 이렇다 할 해프닝이나 충돌 없이 조용하게 지내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떠날때 자기가 먹었던 토마토 통조림 몇개 먹으라면서 놓고가던데 스파게티 소스 대용으로 요긴하게 썼다)


얌전하게 지낸 것과 별개로 좆같은 트라우마가 생겨서 그 이후로 용과가 싫어졌다.

혹시나 주변인이나 친척 중에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물쭈물하지 말고 단칼에 거절하자

집에 누굴 들이는 건 당사자로서 정말로 정말로 좆같은 일이다

생각해보니 빡치네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