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업을 마치고 나온 밤의 거리. 앞으로의 일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던 중으로.


“아, 까먹을 뻔 했네. 메리 크리스마스.”


 동기가 말했다.


“...이번 주였나.”


“애시당초 오늘이 이브날인데.”


 설마 몰랐냐며 헛웃음치는 동기를 뒤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형색색의 네온과 흰 눈으로 칠해진 거리, 그를 채우는 사람들과 캐럴의 멜로디. 벌써 1년의 끝이 왔다고, 새삼 성탄의 계절을 느낀다.


“역시 무심하구나.”


“일이 많았잖아, 너나 나나.”


 그래도 그렇지, 라는 말에 별달리 반박의 말은 던지지 않았다. 세상은 분명 한참 전부터 특유의 분위기로 달구어져 있었을테고, 나는 그 사소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둔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내가 무언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건 기념일이 아니라 딱 한 사람.  


“그래서 만약 누구 만나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 사람 한 명 소개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그럴 사람은 아니라.”


 역시 그래보여, 라는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술잔을 넘기는 제스처와 함께 나온 권유에도 거절의 뜻을 표하고. 우리는 역 앞에서 짧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거처로 향했다. 정류장, 지하철, 버스, 그리고 골목길. 연인과 가족, 친구들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와 도달한 익숙한 철문. 이곳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이 살고 있는 집이지만…창문을 통해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오늘도 왔을까. 열쇠를 꽂아넣고,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마룻바닥에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보는 사람. 

 

“이미 왔구나.”


 인화는 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린다. 애정을 갈구하는 희고 가냘픈 몸. 자칫하면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을 조심스레 끌어안아, 우리는 꽤나 긴 시간동안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인화가 홀로 일어설 수 있을 때 까지.


“오늘도 고마워요.”


 겨우내 떼어낸 감사 인사와 함께하는 환한 미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내 안에 치닫는 충동을 적시지는 못하고, 차오르는 욕구를 가까스로 씹어 삼킨다. 


 무구한 사람에게 애욕을 바라는 짐승같은 여자란, 그렇게 살아가야 할테니.


 남의 사정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취미는 없다.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는 부모님의 말씀이 있기도 했고, 짐짓 짐작만 한 주제에 모든 것을 알았다는 떠드는 사람을 보자면 못나 견딜 수가 없었다. 저런 게 무례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그런 나도 인화네 부모님은 자신들의 딸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고.


“...”


 매년 구석에서 인형을 껴안은 채 숨죽여 우는 인화를 보자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 해주렴.”


 내가 닮은 부모님도 똑같은 생각이셨을까. 사촌이잖아, 라고 덧붙인 어머니의 한 마디에는 많은 뜻이 담겨있는 듯했다. 그래봐야 명절에만 볼 수 있는 사촌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잠깐 나갔다 올래?”


 익숙하지 않은 시골길을 함께 걸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우리는 어른들로 북적이는 방을 빠져나와 산야로 향한다. 정돈되지 않은 길로 발걸음을 옮기고, 또 흙길을 밟아가면서. 어린 몸은 금방 한계에 부딪히지만 방 한 구석에 그대로 앉아있는 것보단 나아서일까, 나나 인화나 힘들다는 말은 내뱉지 않았다. 이 과정도 자연의 선물이라 여기면서, 나아가기만 할 뿐.


 그렇게 도착한 산의 개울은 곧 각자의 쉼터가 되어주었다. 빼곡히 들어선 수림의 녹음이 눈을 가린다. 바람과 물의 시가 귀를 메운다. 타인의 앞에서 쉽게 꺼내놓을 수 감정은, 그렇게 혼자가 되어서야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지는 않았다. 나는 한동안 인화에게서 눈을 돌린 채 수목을 바라보며, 격한 감정의 파도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서서히 해가 저물어 하늘이 어두워질 때 즈음, 흐느낌을 멈춘 인화는 풍경을 바라보던 내 곁으로 다가왔다. 퉁퉁 부은 두 눈, 그와 다르게 조금 풀린 표정. 산 아래로 내려가는 우리는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두 손을 맞잡고 조심스레 움직이며 아래로, 아래로 향하기만 했다. 기억의 궤도에 의지해 나아가는 길. 그 끝에 도착한 큰집의 앞. 


“...감사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직전, 인화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다. 특별히 내가 해준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내가 뭘…”


 그렇게 너스레를 떠는 사이로 가슴이 울렁거린다. 가로등이 없는 시골, 하늘의 밝은 달이 유달리 밝은 탓일까. 답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위를 올려본다.


 다음 날, 어른들이 신위의 앞에서 절하는 것으로  올해의 친척 모임이 끝났다. 방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아이도, 그 아이보다는 조금 나이가 있는 아이도 일어나 밖으로 나선다. 각자 부모님의 손을 잡은 채로, 하지만 눈만은 서로를 응시하며 소리없이 말했다. 다음에 또 보자는, 어린 아이들의 약속.

 

 1년, 그리고 2년. 둘만의 추억을 쌓아간 나날들. 하지만 한 손으로 지나간 해를 전부 셀 때 쯔음부터 인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인형을 안은 채로 있던 방의 한 구석에는 아무도 자리하지 않고, 한낱 말들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는 어른들의 뜬 소문. 아이도 있는데 못하는 얘기가 없다는 소리가 나오면 소음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채워지는 상, 비워지는 잔, 높아지는 목소리, 그리고 점차 가라앉기 시작하는 인화의 얼굴. 며칠밖에 되지 않는 추억은 쉽게 덧칠되기 시작한다.


 우울한 소녀는 불우한 소녀로, 순수한 선의에 술렁이기만 했던 마음은 그를 갈구하는 열망이 되어. 어른이 되어 겨우 인화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의연하게 일어난 사람이 이야기하는 과거의 일과 아직 풀지 못한 매듭. 불완전한 기억을 통해 미화된 추억을 얘기하는 사람의 해맑은 표정을 보며… 나의 머릿속은 완전히 망가졌다. 언젠가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나만이 할 수 있었다고 여겼다. 누구에게나 거네주는 어린 아이의 감사 인사마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뒤바꿔. 애정에 목말라하는 사람 이상으로, 나는 인화를 손에 넣고 싶었다.


“그래도 가끔은 괜히 우울해져서.”


“언제든지 찾아와. 난 괜찮으니까.” 


 …그 천박한 소원이 이뤄진 지금,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일그러진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광인의 표상이지 않을까. 나는 네 어리광을 들어주는 게 아니야. 충족받지 못한 타인과의 관계를 채워주는 게 아니야.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욕구의 단지를 채우기위해. 그러니까 불우하게 있어줘. 지난 날의 상처가 아물었다고 말하지는 말아줘.


 그리고 그만큼 나를 사랑해줘.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만 언젠가는…언젠가는… 그 가늘고 흰 손으로 나를 찔러줘. 내 몸을 산산이 찢어 네 앞에 흐트려줘. 언제까지고 나의 붉은 색으로 물들어서 그렇게… 그렇게…

 

 차마 내뱉지 못한 마음은 내 입술을 씹어 달랜다.


 밝아 온 아침 해의 아래에서.


“항상 신세만 지네요.”


 멋쩍게 이야기하는 인화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냐, 뭘. 편하게 와.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하고.”


 떠나는 사람을 탐하는 손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로, 뒤로 돌아섰다. 고요한 방 안, 혼자 남은 원룸. 밤 사이 누군가 있었다는 흔적은 식어가는 온기와 함께 사라져. 여운을 느끼는 와중으로 핸드폰이 울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하루 잘 보내라고.’


 분명 어제가 이브날이라면, 떠오른 해가 알려주는 건 성탄의 날.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입에 담지도 않은 그 간단한 축복의 말. 이조차 건네지 못한 사람이란… 다른 누구보다 비루한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