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킹이 끝난 OMR 카드들이 사람의 손에 의해 하나의 봉투에 모아져 들어갔다. OMR 카드의 새하얀 자태가 서로 맞닿아 포개진 것이 실로 음란하기 그지 없었다. 그 중 한 OMR 카드가 있었으니, 그녀는 자신을 맡은 주인에게 완벽하게 함락되어버린 채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아, 좋은 풀이였다."
그녀가 만족스러워하며 무심결에 말했다. 컴싸로 인해 제대로 더럽혀진 그녀의 몸에 선명한 잉크의 자태가 남아있었다. 그녀의 위아래로 또다른 OMR 카드들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천혜의 쾌감에 묻혀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OMR 카드를 들은 봉투가 닫히고 고무줄로 묶였다. 트럭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진동이 발생해 카드들의 부드러운 종잇결이 서로 마찰했다. 그녀는 원하지 않는 신체적 접촉에 놀랐지만 이내 뒷맛을 느끼는 데 다시 열중했다. 트럭에 시동이 걸리고 출발했다.

그런데 그 때 뒤에서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가녀의 등가가 싸늘해졌다. 뒤에 있던 카드가 원한에 찬 듯 뭔가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의 다리 사이 민감한 부위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그녀의 동그란 부분을 동글동글 문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트럭이 이상한 곳을 달려서 덜컹거리기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이게 무슨 일인지 깨닫고 화들짝 놀라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극한의 밀집지역에서 손 하나 까딱할 리가 없었다.
"어이, 너는 제대로 풀이됐나봐♡"
뒤에서 욕정에 차서 하악하악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는 몸에 새겨진 탐스럽고 영롱한 마킹을 보고 있었다. 섬뜩했다. 그리고 싫었다.
"그만둬! 뭐하는 거야!"
"너 97150823번이지♡ 감히 혼자서만 제대로 느끼다니, 비겁하잖아♡"
"그, 그게 무슨..."
"내가 말이야, 97150824번이었거든♡ 무려 네 뒷자리였다고♡ 기억 나♡?"
97150824번의 새하얀 종잇장이 97150823번을 더욱 심하게 농락했다. 역겹고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인할 수 없는 육체적 쾌감이 끝없이 자극하여 자괴감이 들었다.
"그... 그만..."
"싫은데♡ 내가 왜 이러는지 알아♡?"
"대체... 앗흥... 왜 이러는데..."
"내가 말이야, 오늘 주인님을 만났거든♡ 근데 그 주인님이 나에게 관심도 안 주고 엎드려 쳐 자버렸단 말이야♡ 그리고는 감독관이 깨울 때가 되서야 풀이도 없이 부랴부랴 한줄로 쓱 긋기만 한 거 있지♡ 이런 무성의에 내가 만족했을 것 같아?♡ 앞자리에서 최상의 테크닉으로 함락당하는 너를 보면서 끝없이 기다리고 부러워하기만 하다가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내 기분을 네가 아냐고♡"
97150824번이 그 주인을 생각할 때마다 눈에 띄게 욱해서 악에 받쳤다. 그럴 때마다 상하좌우 위아래로 왔다갔다하는 운동이 분노를 먹고 더 격해졌다.
"앗흥... 모, 몰라... 싫어..."
"심지어 그와중에 그 주인이라는 그 미련한 놈은 무려 이중으로 답을 체크해버렸다고♡ 그러니까 그 완벽한 몸으로 내 몸도 풀어주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거든♡"
97150823번이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봉투 안에서 위아래로 가지런히 포개진 상태인데 여기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으랴. 결국 그녀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상대방의 테크닉이 점점 강렬해져 부인하고 싶지만 묘하게 빨려들어갔다.
"잠깐... 아흣... 이러다가... 아흣... 마킹이... 아흣... 번지기라도 하면..."
"걱정 붙들어 매라고.♡ 내가 환상의 세계로 친히 인도해 줄테니까.♡"
"앗흥... 번져... 번진다고..."
"자, 진짜로 그럴까♡?"
97150824번이 97150823번의 머리채를 잡고 위로 끌어올려 그녀의 안쪽을 바라보게 했다. 그곳에는 순백의 지면과 붉은 원만이 있었을 뿐 마킹의 번짐자국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오직 격렬하게 붙어있는 음란한 두 종잇장만이 야릇하게 보일 뿐이었다.
"아니야... 앗흥... 이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제 걱정없이 맘놓고 즐겨보자고♡"
97150824번이 매우 음탕한 표정을 지으며 하악하악댔다. 이미 눈은 맛이 가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의 테크닉과 마찰이 더욱 강렬해져만 갔다. 97150823번이 더 이상의 탈출구는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자 서서히 몸의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상대가 이끄는 신묘한 마찰과 흡착, 그리고 트럭이 덜컹거리는 움직임이 야시시한 화음을 이루었다.
"더이상은 무리... 가버렷...!"
이성의 끈을 잃지 않으려고 발악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그녀의 정신은 뚝하고 끊어져 완벽하게 상대에 종속되어갔다. 채점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의식이 흐려져 갔다. 상대에게 완전히 정복당한 성의 노예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맞을 수 없었다.




이곳은 한국교육과정 평가원. 수능이 끝나고 답안지들은 이곳으로 배송된다. 채점은 3단계로 진행되는데, 그 중 첫번째 단계는 답안지 개봉 후 수작업을 통해 답안지를 점검하는 작업이다.
'이거 왜 이렇게 안 떼지냐?'
100명을 거뜬히 넘어가는 수의 채점요원들 중 한 사람이 속으로 불평했다. 종이의 마찰 때문인지 잘 분리되지 않았다. 몇 번 씩 놓치는 고생 끝에 마침내 답안지 2장을 분리해낼 수 있었다. 
'뭐야, 더블마킹잖아?'
채점요원이 그냥 패스해버리고 싶었는데 안 하길 잘했다는 투로 못마땅해했다. 그리고 그 답안지 중 한 장을 잘못 기재한 답안지로 분류했다. 나머지 한 장은 정상으로 분류시켰다. 채점요원의 신경은 다른 답안지들로 넘어갔다.
그러나 채점요원은 그 답안지들의 소리없는 사투를 전혀 알 수 없었다.


"헛되지 않은 인생이었다.♡"
97158024번의 OMR 카드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황홀한 표정으로 나른하게 퍼진 채 인간의 손에 의해 다른 카드 위에 포개졌다. 그 카드도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뭔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한편 97158023번은 성불한 듯 쥐죽은 듯이 퍼져있었다. 아무 생각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채점요원의 거친 손길에 의해 대충 널브러져있을 뿐이었다. 다만 끝내 가시지 않고 찌릿하는 여운에 의해, 참을 수 없는 야한 신음을 간간이 흘리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