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면 한국사람들이 주로 생각하는 것은?

탈레반, 내전, 미국의 침공 , 가끔 일부는 무자헤딘과 소련의 침공까지 기억하신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전부터 지역의 특성상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어왔다.

아프가니스탄의 북부와 서부, 즉 역사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이 침공을 받던 지역은

평지가 대부분이여서 들어오기는 쉽지만, 막상 침입하고 나면,

아프가니스탄 내부의 험악하고 괴랄한 산맥 지역 때문에 정복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정복에 성공한다고 해도,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세력의 존재는

제국들의 힘을 계속 빠지게하는 요인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을 비교적 장기간 지배하는데 성공한 제국들은, 대부분 같은 이슬람권 문화를 통해

문화적 통합에 성공한 융합적 제국뿐이었지, 오로지 힘을 통한 무력정벌을 추구하는 제국은

정벌에 실패하거나, 아니면 지역의 지배가 매우 불안정하였다.

 

 

오늘 글쓴이가 말하고 싶은 주제는, 현대 열강국들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시도이다.

근대 열강국의 최초 침공 시도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영국제국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영국은,

유럽 동부(발칸과 크림)에서 극동아시아(한반도)까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팽창, 그레이트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의 무대로는 중앙아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도를 식민지화한 영국은, 파키스탄으로까지 팽창을 노렸으며

이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도움을 받으려했으나,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국왕 무함마드 칸은 이를 거절하였고, 러시아와 접촉하는 등

영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영국은 아프간 침공을 결정했고,

역사적으로 주된 침공방식이 아닌

산악 지형이 많은 곳부터 침공하는 역행을 해버린 것.

 

위의 아프가니스탄 지형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영국의 주목표였던

파키스탄 북부에서 카불까지의 진격은 비교적 평야에 가까웠으므로 그나마 수월했다.

카불 점령 이후 영국은 왕을 갈아치우는 등, 급격한 내정간섭을 단행하자

 

아프간의 꼭두각시 정권의 영향력은 겨우 카불을 비롯한 수도권에만 국한되며

지방 세력에 대한 영향력이 거의 없어지듯 한다.

 

결국

아프간인들은 엄청난 불만이 쌓이고 쌓이다 결국 카불에서 반영국봉기로 터지게되자

지방 세력과 아프가니스탄인의 봉기에 영국군은 이에 대응하지도 못하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맛보아야 했다.

 


 

위 그림과 같이 가끔가끔 산맥의 계곡에 위치하는 평지에서 전투가 벌어질 경우, 기마를 주된 공격병력으로 삼아 영국이 훨씬 효율적인 공격을 할 수 있지만.

 


 

 

이처럼 산맥 위에서 전투를 벌이게되면, 영국군은 뼈도 못추렸다. 대부분이 전투가 이러한 양상을 띈 사실은 덤.

이후 두번 더 침공을 하여 결국에는 세번째 침공에서 전투에 승리해 아프간을 지배히긴 했지만

기존의 지배와는 다르게 주둔군도 전부 철수시키고, 관련 인사들도 바로 빠져나와

기존정권을 유지시키고 이들을 조종하는데 만족해야했다.
 

 

 

이 전쟁에서 아프간의 성공적 침공에 대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침공군이 기존의 영향력있던 아프간의 정권을 교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중앙정부의 지방세력에 대한 영향력이 아예 사라지게 되니,
 

지방세력은 무정부상태에 가깝게되고

이렇게 된다면 또다른 세력(반란세력 등)이 지방에 진출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통치체제가 붕괴하여 대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당연히 이렇게 된다면 지방세력을 평정하지 않고서는 침공군은 정복이나 정국 안정에 매우 힘들어진다.

그러나 그 지방세력은 험악한 산맥이라는 엄청난 지리적 무기를 가지고 있기에, 여간 까다로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지방세력은 침공군에 비해 아프가스탄인들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리하여 아프간을 성공적으로 침공하고 싶다면. 기존의 정당성 있는 정권의 교체는 죽어도 하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오는 모든 침공군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정권교체를 단행하는 사실은 덤

(스포일러 ㅎ)

 

 

 

 

 

 

그렇다면 이제 소련의 침공을 보자.

이전 영국, 아프간 전쟁의 원인이 제국러시아의 팽창정책에 대응하는 맞대응이었던 만큼
이번 소련,아프간 전쟁의 배경도 소련의 팽창정책이 그 원인이 된다.

 

아프간은 독립 이후 지속적으로 왕국이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아프간은 근대화에 돌입했으며

한번의 반란시도가 있었으나, 이는 진압되었고 이후 두번에 걸친 평화적인 왕권과 권력의 계승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은 전성기가 오게 된다.

 

그리하여 보이는 아프가니스탄의 눈부시는 시절들.

여성 인권도 신장되어 남성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으며

평등한 고육의 기회를 보장하였으며 경제가 매우 활발하며

사람들은 엄청나게 행복했다고 한다.

 


(이... 이질감;) 여성이 평등하게 대우되어 히잡과 같은 이슬람 복장 착용은 자유였다.

 



평화롭던 시기의 일상생활과 아름다운 건축물들.(알프스 같은 유럽 삘과 터키 같은 아시아 삘이 동시에! 여행매니아들의 천국!)
교육의 보편화와 고등화.

수많은 상품이 진열된 시장. 경제가 활발했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보이스카웃. 걸스스카웃도 있었다고 한다.

등교하는 여자아이들. 교육평등의 실현이다.

 

문제는 내부 개혁이 원인이었다.

당시 참된 국왕의 표본이라고 할만한 자히르 샤는

입헌군주제 도입과 정당설립의 자유를 위한 민주적, 헌법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잘사는 국가의 국왕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하다니... 진짜 감동]

 

와중에 유학을 통해 신문물을 접한 지식인이나, 군인계열들은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의 도입이나

급진적 개혁을 꿈꾸고 있었고, 한편 지방의 이슬람세력들은 국왕의 개혁에 불만을 품으며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후 아프간의 비극은 국왕이 그의 사촌, 다우드 칸을 총리로 임명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러한 국왕의 민주적 절차의 도입시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공하국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 것.

게다가 서방과 소련을 자극시키지 않기 의해 어떻게든 중립을 표명했던 국왕과는 달리

그는 중립도 저버리니 국왕이 이에 매우 언짢아했다.


(국왕 자히르 샤와 다우드 칸)

 

 

 불편하다는 국왕의 입장을 들은 그는 기회를 노렸다가, 국왕이 해외순방을 위해 떠났을 때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적으로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그는 정당성도 없는데다가 반공을 표명하니 좌파계 군인인사들이 매우 불편해한 반면

공화국의 급진적인 정책으로 이슬람지방세력들도 손절하게 만드는 대단한 (ㅂㅅ같은) 정치를 펼치게 된다.

 

이후 좌파군인에 이한 공산쿠데타가 벌어지고, 아프간은 내부에서 삼파전을 벌이게 된다.

친서방, 친소, 이슬람지방세력으로.

 

와중 이슬람세력은 더 심각한 놈들이(공산세력과 급진적 개혁파들) 나타났다면서

자신들끼리 힘을 합쳐 무장세력을 편성, 이를 "무자헤딘"이라 한다.

 

이들은 자국 내의 친소 세력은 정당성이 없다고 판단, 이들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공산정부에 반란을 감행한 군세력 일부와 연계해

소련이 인도적 차원에서 파견한 원조단까지 납치하여 인질로 삼고,

결국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던 인질을 전부 죽여버리고 꼬챙이에 꽂아 거리에 전시함으로서

소련에게 극강의 분노를 사게된다.

 

또한 CIA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친소 성향의 아민 대통령이 사실 미국 유학 과정 중

CIA에게 포섭되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KGB가 이를 습득하게 한 뒤 아프간에 트롤짓을 벌이기를 기대했는데,

앞뒤 상황이 연계된 것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의 서막이다.


물론 아민이 혼란기를 심화시키는 등

정치를 더럽게 못펼쳐서 소련 입장에서도 그를 제거할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아까 침공군이 정권을 엎으면 어떻게 연계되는지는 전부 성명했제?

게다가 애초에 지방 세력들이 극혐한 것은 소련을 비롯한 좌파 세력이었으니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것은 결과가 너무나 뻔했다.

 

 

그러나 1979년 소련은 침공을 개시한다.

근대 아프가니스탄은 산맥이 주된 국토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한

1번 고속도로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들은 원의 모양이어서 원의 도로라고도 불리우며

기계화병력을 주된 병력으로 삼는(마치 영국제국의 기병 느낌이 나는) 소련에게는

이 도로의 확보와 안정이 1번 목표였다.

 



침공 이전 잘 닦여진 도로들과 터널들

 

 

 

 


아프간의 하이웨이 원[링 로드]

 

 

소련의 아프간 침공 계획


파란색 2번 선은 공군의 지원이다.

고로 계획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소련군에게는 저 도로가 1번 목표물이자, 점령 성공 이후에는 끝까지 방어해야할 최우선적 목표물이었다.

 

소련의 침공 개시

그 목표는 당연히 아프간의 험난한 산맥과는 케미가 죽어도 맞지 않아서

처음부터 실패할 목표였다.

 

 

또한

무자헤딘은 게릴라전에 능했으며, 지형지물을 너무나 잘 사용했다.

매우 구식의 장비를 사용하는데도 소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영국군 2차 세계대전 당시 제식소총이었던 리엔필드 개량 No.4 MK1과 .RPG2를 들고 있다. (또는 7. 정확히 구분이 안감.)

이들은 제국러시아군과 소련군의 제식 볼트액션 소총인 모신나강 등도 장비하는 등 상황은 열악했다.

 

 

하지만 오히려 산맥이 많은 아프간의 전쟁터에서는 이러한 구식 볼트액션 소총은 진가를 발휘하였으며,

강력한 위력과 긴 사정거리를 가진 이 소총들은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소련군을 노리는

저격총이 되어버렸다.

 


아군을 엄호하는 소련군 저격수

 

소련군도 이에 대응하여 전투 투입 부대에 저격수를 반드시 배치했으나, 그래도 무자헤딘의 저격솜씨는 대단하여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무자헤딘 측에서 800M 이상의 거리에서 저격이라는 엄청난 기록이 생겨났다고 하니...

아무런 광학장비도 없는 무기를 들고 저 수준의 장거리저격이면 대단한 것이다.

 

 

 

결국 소련군은 아프간에서의 도로 안정유지가 매우 어렵게 되자


 

사탄의 마차라 불리우는 Mi24와 무장을 탑재한 Mi8 헬리콥터를 동원해 탈레반을 조지려 하지만

 

 

미국의 CIA를 통한 탈레반 지원으로

신형 대공무기, 스팅어를 손에 넣게 되고


 

수많은 헬리콥터가 격추되어

결국 소련의 새로운 전략도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결국 소련은 마지막 선택지로 비대칭 전략들,

대량살상무기인 독가스를 비롯한 화학무기와 대규모 지뢰매설까지 손을 대었으며

그것은 오히려 민간인들에게 극심한 반발을 사는 역효과를 주게 된다.

 

 

 

결국 소련은 후퇴를 결정, 이렇게 냉전의 역사에 한획을 긋는 전쟁은 끝이 나게 뒨다.



소련군 T60전차의 잔해가 남아있다.

배경으로 보이는 드넓은 산맥과 비교하면, 소련이 얼마나 전쟁을 하기 어려웠는지 느껴진다.

 

 

 

소련의 마지막의 원의 도로 점령 지도


대부분 점령한 것 같지만, 저렇게 중간중간 끊긴 부분이 있다는 것은,  소련군이 압도적으로 모든 도로를 컨트롤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이 안좋으면 완벽히 점령한 것으로 표시된 도로도 게릴라 공격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 전쟁은 이후 베트남이 미국에게 주었던 영향과 비슷하게 소련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아니 오히려 심각했다. 대부분의 소련군 병사들이 아편같은 마약에 져든 상태여서 이후 소련사회에 엄청나게 안좋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소련의 붕괴로 이어졌다.

 

 

미국도 아프간 침공 이후, 기존 정권을 엎어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미군 역시 원의 도로 확보에 애를 먹고 있는 상황.

두 차례에 걸친 강대국의 침공으로 죽어나가는 건 아프간......

 


아프가니스탄은 전쟁만 없었으면 관광 명소로도 성공할 수 있었을텐데...

매우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