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고려를 개국하고 즉위하다

무인 원년(918)후량 말제 정명 4, 거란 태조 신책 3년여름 6월 병진일에 태조(太祖)가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하고 연호를 고쳐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처음에 세조(世祖)가 송악산의 남쪽에 집을 짓는데, 승려 도선(道詵)이 와서 문 밖의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찬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이 마땅히 성인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조가 그 말을 듣고는 황급히 나가 맞아들였다[倒屣出迎]. 함께 송악산에 올랐는데, 도선이 지리를굽어 살피고 천문을우러러 보고는 이에 글 한 편을 써서 세조에게 주며 말하기를, “공께서는 내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니, 장성하거든 이것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 글은 비밀에 부쳐져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태조가 17세가 되었을 때 도선이 다시 와서 뵙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족하께서는 액운의 시기[百六之會]를 만나셨으니, 3대의 말세[三季]에 처한 백성[蒼生]들은 공께서 널리 구제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군대를 일으키고 진()을 치기에 유리한 지리와 때[天時]를 읽는 법과 산천의 신에게 차례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감통(感通)하여 보호와 도움을 받는 이치를 일러주었다.

이 때 신라는 정치가 쇠미하여져서 도둑떼가 앞을 다투어 일어났으며,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남쪽 지역[南州]에 웅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고 칭하였고, 궁예(弓裔)는 고구려(高句麗)의 땅을 차지하고 철원(鐵圓)에 도읍하여 국호를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세조는 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粲)으로서 군()을 거느리고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궁예가 기뻐하면서 곧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 세조가 이어 궁예를 설득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朝鮮숙신(肅愼변한(卞韓)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자를 성주(城主)로 삼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궁예가 그 말을 따라 태조로 하여금 발어참성(勃禦槧城)을 쌓게 하고 이어서 그를 성주로 삼았다. 이 때 태조의 나이는 20세였다. 후에 광주(廣州충주(忠州당성(唐城청주(靑州괴양(槐壤) 등의 군현을 정벌하여 평정하니, 그 공으로 아찬(阿粲)을 제수받았다. 또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가서 금성군(錦城郡)을 공략하여 함락시키고, 10여 개의 군현을 쳐서 빼앗았으니, 이에 금성을 고쳐 나주(羅州)로 삼았다. 양주(良州)에서 위급하다고 고하자 궁예가 태조로 하여금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돌아와서 변방을 안정시키고 경계를 확장시킬 계책을 아뢰니,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눈여겨보았으며, 궁예 역시 그를 기특하게 여겨 계()를 알찬(閼粲)으로 진급시켰다.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을 공격하여 견훤과 여러 차례 싸워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