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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通典 흥전』에 이르기를, "주몽이 漢 建昭 2년에 北扶餘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웅거하면서 (나라 이름을) 구려(句麗)라 하고, 고(高)로써 성씨를 삼았다" 하고, 『고기』에는,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흘승골성과 졸본은 한 곳인것 같다. 『漢書』(地理)志에는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과의 거리가(相距)가 3,600리요, 속현(屬縣)에 무려(無慮)가 있다"고 하였는데, 곧 주례(周禮)에서 말한 북진(北鎭)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다.

대요(大遼)가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현도군(玄菟郡)은 낙양(洛陽)과의 거리가(相距)가 동북쪽으로 4,000리요 속현(屬縣)이 셋인데, 고구려가 그 하나로 되어 있으니, 주몽(朱蒙)이 도읍하였다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대개 한(漢) 현도군(玄菟郡)의 경내(境內)요, 대요국(大遼國)의 동경(東京) 서쪽이니, 『漢志』의 이른바 현도군(玄菟郡)의 속현(屬縣)인 고구려가 (혹시) 이것인가? 옛날 대요(大遼)가 망하기 전에 요제(遼帝)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므로, 우리 나라(고려) 사신들이 동경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 만에 의주(醫州)에 이르고, 거기서 연계(燕薊)로 향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임을 알게 된다. ○ 주몽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한 후로 40년을 지나 (제2대) 유류왕(孺留王) 22년에는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위나암성(尉那巖城) 혹은 불이성(不而城)이라고 함]으로 옮겼다. ○ 『漢書』를 살펴보면, 낙랑군(樂浪郡) 속현(屬縣)에 불이(不而)가 있고, 또 총장(總章) 2년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칙명(勅命)을 받들어, 고구려의 여러 성에 도독부(都督府)와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는데, 그 목록에 이르기를, 압록(鴨淥) 이북의 이미 항복한 성(城)인데, 그 중 하나가 국내성(國內城)이요, 평양(平壤)에서 여기까지는 17驛이라 하였으니, 이 城이 역시 북조(北朝) 경내(境內)에 있는데, 다만 어느 곳인지는 모르겠다. ○ 국내성(國內)에 도읍한 지 425년을 지나 장수왕(長壽王) 15년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기고 156년을 지나 평원왕(平原王) 28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83년을 지나 보장왕(寶臧王) 27년에 망하였다[옛사람의 기록이, 시조 주몽에서부터 보장왕(寶臧王)에 이르기까지 역년(歷年)이 정녕(丁寧)하고 자세함이 이러하다. 그런데 혹은 말하기를,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에 평양(平壤) 동황성(東黃城)으로 이거(移居)하였는데, 성(城)이 지금의 서경(西京) 동쪽 수멱산중(水覓山中)에 있었다고 하니, 그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일이다]. ○ 평양(平壤)은 지금 서경(西京)인 것 같고, 패수(浿水)는 대동강(大同江)이다. 무엇으로 아는가 하면, 

『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이다. 산맥을 따라 에둘러(圍繞) 성곽(城郭)을 만들고,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지리지(志)에는 “등주(登州) 동북쪽 바다로 가서 남쪽으로 해안지방을 끼고 패강(浿江) 어귀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 서북쪽이 된다" 하였고, 또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東征) 조서(詔書)에는 "창해(滄海) 도군(道軍)이 주로(舟艫) 1,000리에 높은 돛은 번개 달리듯 하고 큰 함정(艦艇)은 구름 가듯 하여 패강(浿江)을 가로막고 멀리 평양(平壤)으로 나간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이 패수(浿水)임이 분명하며, 서경(西京)이 평양(平壤)임도 알 수 있다. 『唐書』에는 평양성(平壤城)은 또한 장안(長安)이라 한다 하고, 『古記』에는 평양(平壤)에서 장안(長安)으로 옮겼다 하였으니, 두 성(城)의 이동(異同)과 원근(遠近)은 알 수 없다. 고구려는 처음 중국 북쪽 지역에 있다가 점차 동쪽으로 패수(浿水) 곁에 왔을 것이다. 발해인 무예(武藝 : 제2대 武王)가 말하기를 "옛날 고구려는 

강성하여 군사 30만으로 당에 항거하여 대적하였다" 하였으니, 지역이 크고 군사가 강하다고 할 만하였다. 그런데 말기에 이르러서는 군신이 혼암(昏暗)하고 포학하여 도의(道義)가 없어지자, 대당(大唐)이 두 차례나 군사를 출동하고 신라에서 원조하여 이를 쳐 평정하였다. 그 지역이 많이 발해·말갈로 들어가고, 신라도 그 남쪽 지경을 얻어서 한(漢)·삭(朔)·명(溟) 3주(州)와 및 그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9주(州)의 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이하의 고구려 군현명(郡縣名)은 기술한 신라의 주(州)·군(郡)·현(縣) 연혁에서 추출한 것이나, 개중에는 다소의 이동(異同)과 출입(出入)이 있다). ○ 한산주(漢山州) 국원성(國原城)[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고, 탁장성(託長城)이라고도 함] 남천현(南川縣)[남매(南買)라고도 함] 구성(駒城)[멸오(滅烏)라고도 함] 잉근내군(仍斤內郡) 술천군(述川郡)[성지매(省知買)라고도 함] 골내근현(骨乃斤縣) 양근현(楊根縣)[거사참(去斯斬)이라고도 함] 금물내군(今勿內郡)[만노(萬弩)라고도 함] 도서현(道西縣)[도개(都蓋)라고도 함] 잉홀(仍忽) 개차산군(皆次山郡) 일죽(一竹) 노음죽현(奴音竹縣) 내혜홀(奈兮忽) 사복홀(沙伏忽) 사산현(蛇山縣) 매홀(買忽)[수성(水城)이라고도 함] 

당성군(唐城郡) 상홀(上忽)[차홀(車忽)이라고도 함] 부산현(釜山縣)[송촌활달(松村活達)이라고도 함] 율목군(栗木郡[동사힐(冬斯肹)이라고도 함] 잉벌노현(仍伐奴縣)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 매소홀현(買召忽縣)[미추홀(彌鄒忽)이라고도 함] 장항구현(獐項口縣)[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고도 함] 주부토군(主夫吐郡) 수이홀(首尒忽) 검포현(黔浦縣) 동자홀현(童子忽縣)[구사파의(仇斯波衣)라고도 함] 평회압현(平淮押縣)[별사파의(別史波衣)라고도 하고, 회(淮)는 유(唯)라고도 되어 있음] 북한산군(北漢山郡)[평양(平壤)이라고도 함] 골의내현(骨衣內縣) 왕봉현(王逢縣)[개백(皆伯)이라고도 하는데, 한인(漢人) 미녀가 안장왕(安臧王)을 맞이한 지방이므로 왕봉(王逢)이라 이름함] 매성군(買省郡)[마홀(馬忽)이라고도 함] 칠중현(七重縣)[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함]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액(額)이라고도 함] 천정구현(泉井口縣)[어을매곶(於乙買串)이라고도 함] 술이홀현(述奈忽縣)[수니홀(首泥忽)이라고도 함] 달을성현(達乙省縣)[한인(漢人) 미녀가 고산(高山) 위에서 봉화(烽火)를 피워 안장왕(安臧王)을 맞이한 곳이므로 후에 고봉(高烽)이라 이름하였음] 비성군(臂城郡)[마홀(馬忽)이라고도 함] 

내을매(內乙買)[내이미(內尒米)라고도 함] 철월군(鐵圓郡)[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함] 양골현(梁骨縣) 승량현(僧梁縣)[비물(非勿)이라고도 함] 공목달(功木達)[웅섬산(熊閃山)이라고도 함] 부여군(夫如郡) 어사내현(於斯內縣)[부양(斧壤)이라고도 함] 오사함달(烏斯含達) 아진압현(阿珍押縣)[궁악(窮嶽)이라고도 함] 소읍두현(所邑豆縣) 이진매현(伊珍買縣) 우잠군(牛岑郡)[우령(牛嶺)이라고도 하고 수지의(首知衣)라고도 함] 장항현(獐項縣)[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고도 함] 장천성현(長淺城縣)[야야(耶耶)라고도 하고, 야아(夜牙)라고도 함] 마전천현(麻田淺縣)[이사파홀(泥沙波忽)이라고도 함] 부소갑(扶蘇岬) 약지두치현(若只頭恥縣)[삭두(朔頭)라고도 하고, 의두(衣頭)라고도 함] 굴어압(屈於押)[홍서(紅西)라고도 함] 동비홀(冬比忽) 덕물현(德勿縣) 진림성현(津臨城縣)[오아홀(烏阿忽)이라고도 함] 혈구군(穴口郡)[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함] 동음내현(冬音奈縣)[휴음(休陰)이라고도 함] 고목근현(高木根縣)[달을참(達乙斬)이라고도 함] 

수지현(首知縣)[신지(新知)라고도 함] 대곡군(大谷郡)[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함] 수곡성현(水谷城縣)[매단홀(買旦忽)이라고도 함] 십곡현(十谷縣)[덕돈홀(德頓忽)이라고도 함] 동음홀(冬音忽)[시염성(豉鹽城)이라고도 함] 도랍현(刀臘縣)[치악성(雉嶽城)이라고도 함] 오곡군(五谷郡)[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고도 함] 내미홀(內米忽)[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함] 한성군(漢城郡)[한홀(漢忽)이라고도 하고, 식성(息城)이라고도 하며, 내홀(乃忽)이라고도 함] 휴류현(鵂鶹縣)[조파의(粗波衣)라고도 하고, 휴암군(鵂巖郡)이라고도 함] 장새현(獐塞縣)[고소어(古所於)라고도 함] 동홀(冬忽)[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도 함] 금달(今達)(신달(薪達)이라고도 하고, 식달(息達)이라고도 함] 구을현(仇乙峴)[굴천(屈遷)이라고도 함] 궐구(闕口)는 지금(고려)의 유주(儒州)이다. 율구(栗口)[율천(栗川)라고도 함]는 지금의 은율현(殷栗縣)이다. 장연(長淵)은 지금 그대로이다. 마경이(麻耕伊)는 지금의 청송현(靑松縣)이다. 양악(楊岳)은 지금의 안악군(安嶽郡)이다. 판남곶(板麻串)은 지금의 가화현(嘉禾縣)이고, 웅한이(熊閑伊)는 지금의 수령현(水寧縣)이다. 

옹천(甕遷)은 지금의 옹진현(甕津縣)이고, 부진이(付珍伊)는 지금의 영강현(永康縣)이다. 곡도(鵠島)는 지금의 백령진(白嶺鎭)이다. 승산(升山)은 지금의 신주(信州)이다. 加火押(가화압)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 ○ 우수주(牛首州)[수(首)는 두(頭)로도 되어 있음. 수차약(首次若)이라고도 하고,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함] 벌력천현(伐力川縣) 횡천현(橫川縣)[어사매(於斯買)라고도 함] 지현현(砥峴縣) 평원군(平原郡) 내토군(奈吐郡)[대제(大堤)라고도 함] 사열이현(沙熱伊縣) 적산현(赤山縣) 근평군(斤平郡)[병평(並平)이라고도 함] 심천현(深川縣)[복사매(伏斯買)라고도 함] 양구군(楊口郡)[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도 함] 저족현(猪足縣)[오사회(烏斯廻)라고도 함] 옥기현(玉岐縣)[개차정(皆次丁)이라고도 함] 삼현현(三峴縣)[밀파혜(密波兮)라고도 함] 생천군(狌川郡)[야시매(也尸買)라고도 함] 대양관군(大楊菅郡)[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함] 매곡현(買谷峴) 고사마현(古斯馬縣) 

급벌산군(及伐山郡) 이벌지현(伊伐支縣)[자벌지(自伐支)라고도도 함] 수생천현(藪狌川縣)[수천(藪川)이라고도 함] 문현현(文峴縣)[근시파혜(斤尸波兮)라고도 함] 모성군(母城郡)[야차홀(也次忽)이라고도 함] 동사홀(冬斯忽) 수입현(水入縣)[매이현(買伊縣)이라고도 함] 객연군(客連郡)[객(客)은 각(各)으로도 되어 있고,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함] 적목현(赤木縣)[사비근을(沙非斤乙)이라고도 함] 관술현(管述縣) 저란현현(猪闌峴縣)[오생파의(烏生波衣)고도 하고, 저수(猪守)라고도 함] 천성군(淺城郡)[비열홀(比烈忽)이라고도 함] 경곡현( 谷縣)[수을탄(首乙呑)이라고도 함] 청달현(菁達縣)[석달(昔達)이라고도 함] 살한현(薩寒縣) 가지달현(加支達縣) 어지탄(於支呑)[익곡(翼谷)이라고도 함) 매시달(買尸達) 천정군(泉井郡)[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함] 부사달현(夫斯達縣) 동허현(東墟縣)[가지근(加知斤)이라고도 함] 내생군(奈生郡) 을아단현(乙阿旦縣) 우오현(于烏縣)[욱오(郁烏)라고도 함] 

 

地理(지리) 2 新羅(신라)

○ 漢州(한주)는 본시 高句麗(고구려)의 漢山郡(한산군)으로 新羅(신라)가 빼앗았는데 景德王(경덕왕)이 漢州(한주)로 改稱(개칭)하였다. 지금의 廣州[광주:州治(주치)]니, 領縣(영현)이 둘이다. ① 黃武縣(황무현)은 본시 고구려의 南川縣(남천현)으로, 신라가 이를 아울러 眞興王(진흥왕)이 州[주:南川州(남천주)]를 삼고 軍主(군주)를 두었다. 경덕왕이 [黃武(황무)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利川縣[이천현:지금 利川郡(이천군)]이다. ② 巨黍縣(거서현)은 본시 고구려의 駒城縣(구성현)으로, 경덕왕이 [巨黍(거서)로] 改名(개명), 지금의 龍駒縣[용구현:지금 龍仁郡(용인군) 駒城面(구성면)]이다.

○ 中原京(중원경)은 본시 高句麗(고구려)의 國原城(국원성)인데, 新羅(신라)가 平定(평정)하여 眞興王(진흥왕)이 小京(소경)을 설치하였다(同王(동왕) 18년). 文武王(문무왕) 때(13년)에 城(성)을 쌓으니 주위가 2,592步(보)이다. 景德王(경덕왕)이 이를 고쳐 中原京(중원경)으로 하였다. 지금 忠州(충주)다.

○ 槐壤郡(괴양군)은 본시 고구려의 仍斤內郡(잉근내군)으로, 景德王(경덕왕)이 [槐壤(괴양)으로] 改名(개명)하니 지금 槐州[괴주:지금 忠北(충북) 槐山郡(괴산군)]다.

○ 泝[沂(기)로도 되어 있음]川郡(소천군)은 본시 고구려의 述川郡(술천군)인데, 景德王(경덕왕)이 [泝川(소천)으로] 改名(개명)하였다. 지금 川寧郡[천녕군:지금 京畿道(경기도) 驪州郡(여주군)]이니 領縣(영현)이 둘이다. ① 黃驍縣(황효현)은 본시 고구려의 骨乃斤縣(골내근현)으로, 경덕왕이 [黃驍(황효)로] 개명하였으니 지금의 黃驪縣[황려현:지금 驪州邑(여주읍)]이다. ② 濱陽縣(빈양현)은 본시 고구려 楊根縣(양근현)으로, 경덕왕이 [濱陽(빈양)으로] 개명하였는데, 지금은 다시 예전대로 [楊根(양근)으로] 하였다[지금 楊平郡(양평군) 楊平面(양평면)].

○ 黑壤郡(흑양군)[黃壤郡(황양군)이라고도 함]은 본시 고구려 今勿奴郡(금물노군)인데 景德王(경덕왕)이 [黑壤(흑양)으로] 改名(개명)하였다(지금 鎭川郡(진천군)의 대부분). 지금 鎭州(진주:지금 忠北(충북) 鎭川郡(진천군))니, 領縣(영현)이 둘이다. ① 都西縣(도서현)은 본시 고구려 道西縣(도서현)으로, 경덕왕이 [都西(도서)로] 개명하였으니 지금 道安縣[도안현:지금 槐山郡(괴산군) 道安面(도안면)]이다. ② 陰城縣(음성현)은 본시 고구려 仍忽縣(잉홀현)인데, 경덕왕이 [陰城(음성)으로] 개명, 지금도 그대로다.

○ 介山郡(개산군)은 본시 고구려 皆次山郡(개차산군)으로, 景德王(경덕왕)이 [介山(개산)으로] 改名(개명), 지금 竹州(죽주)니, 領縣(영현)이 하나다. 陰竹縣(음죽현)은 본시 고구려 奴音竹縣(노음죽현)인데, 경덕왕이 [陰竹(음죽)으로] 개명, 지금도 그대로다.

○ 白城郡(백성군)은 본시 고구려의 奈兮忽(내혜홀)인데 景德王(경덕왕)이 [白城(백성)으로] 改名(개명)하였다. 지금의 安城郡[안성군:今同(금동)]이니, 領縣(영현)이 둘이다. ① 赤城縣(적성현)은 본시 고구려의 沙伏忽(사복홀)인데, 경덕왕이 [赤城(적성)으로] 개명하였으니 지금 陽城縣[양성현:지금 安城郡(안성군) 陽城面(양성면)]이다. ② 蛇山縣(사산현)은 본시 고구려의 縣(현)이었는데, 경덕왕이 그대로 (이름)하였으니 지금 稷山縣[직산현:지금 天安郡(천안군) 稷山面(직산면)]이다.

○ 水城郡(수성군)은 본시 고구려의 買忽郡(매홀군)인데, 景德王(경덕왕)이 [水城(수성)으로] 改名(개명)하였으니 지금 水州[수주:水原(수원)]다.
○ 唐恩郡(당은군)은 본시 고구려의 唐城郡(당성군)으로, 景德王(경덕왕)이 [唐恩(당은)으로] 改名(개명)하였는데, 지금은 다시 예전대로 [唐城(당성)으로] 하였다(지금 華城郡(화성군) 南陽面(남양면) 일대). 領縣(영현)이 둘이다. ① 車城縣(거성현)은 본시 고구려 上[車(거)로도 되었음]忽縣(상홀현)인데, 경덕왕이 [車城(거성)으로] 개명하였으니 지금의 龍城縣(용성현:지금 華城郡(화성군) 남쪽)이다. ② 振威縣(진위현)은 본시 고구려 釜山縣(부산현)인데, 경덕왕이 [振威(진위)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지금 華城郡(화성군) 松炭面(송탄면)].

○ 栗津郡(율진군)은 본시 고구려의 栗木郡(율목군)으로, 景德王(경덕왕)이 [栗津(율진)으로] 改名(개명), 지금의 菓州(과주:지금 始興郡(시흥군) 일대)니, 領縣(영현)이 셋이다. ① 穀壤縣(곡양현)은 본시 고구려의 仍伐奴縣(잉벌노현)으로, 경덕왕이 [穀壤(곡양)으로] 개명하였으니 지금의 黔州[검주:서울市(시) 冠岳區(관악구) 奉天洞(봉천동)·新林洞(신림동)]다. ② 孔巖縣(공암현)은 본시 고구려의 齊次巴衣縣(제차파의현)인데, 경덕왕이 [孔巖(공암)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한다[지금 金浦郡(김포군) 陽村面(양촌면)]. ③ 邵城縣(소성현)은 본시 고구려 買召忽縣(매소홀현)인데, 경덕왕이 [邵城(소성)으로] 개명, 지금의 仁州[인주[慶原買召(경원매소)라고도 하고 彌鄒(미추)라고도 한다]:지금 仁川(인천)]다.

○ 獐口郡(장구군)은 본시 고구려의 獐項口縣(장항구현)인데, 景德王(경덕왕)이 [獐口(장구)로] 改名(개명)하였으니, 지금 安山縣[안산현:지금 始興郡(시흥군) 秀岩面(수암면)]이다.

○ 長堤郡(장제군)은 본시 고구려의 主夫吐郡(주부토군)인데, 景德王(경덕왕)이 [長堤(장제)로] 改名(개명)하였다. 지금의 樹州[수주:지금 富川郡(부천군)]니, 領縣(영현)이 넷이다. ① 戍城縣(수성현)은 본시 고구려 首尒忽(수이홀)로, 경덕왕이 [戍城(수성)으로] 개명하였으니 지금의 守安縣[수안현:지금 金浦郡(김포군) 舊邑(구읍) 南(남)]이다. ② 金浦縣(김포현)은 본시 고구려 黔浦縣(검포현)인데, 경덕왕이 [金浦(김포)로] 개명하여 지금 그대로 일컫는다[지금 金浦郡(김포군) 金浦面(김포면)]. ③ 童城縣(동성현)은 본시 고구려 童子忽[㠉山縣(동산현)이라고도 함]縣(동자홀현)인데, 경덕왕이 [童城(동성)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通津古邑(통진고읍)]. ④ 分津縣(분진현)은 본시 고구려 乎唯[平淮(평회)]押縣(호유압현)]으로, 경덕왕이 [分津(분진)으로] 개명, 지금의 通津縣[통진현:지금 金浦郡(김포군) 月串面(월곶면)]이다.

○ 漢陽郡(한양군)은 본시 고구려의 北漢山郡(북한산군:平壤(평양)이라고도 함)인데, 眞興王(진흥왕)이 州(주)로 삼고 軍主(군주)를 두었다. 景德王(경덕왕)이 [漢陽(한양)으로] 改名(개명)하였으니 지금 楊州(양주) 옛터로, 領縣(영현)이 둘이다. ① 荒壤縣(황양현)은 본시 고구려의 骨衣奴縣(골의노현)으로, 경덕왕이 [黃壤(황양)으로] 改名(개명)하였는데 지금의 豐壤縣(풍양현:지금 楊州郡(양주군) 榛接面(진접면) 일대)이다. ② 遇王縣(우왕현)은 본시 고구려 皆伯縣(개백현)으로, 경덕왕이 [遇王(우왕)으로] 개명하였으니 지금 幸州[행주:지금 高陽郡(고양군) 知道面(지도면)]다.

○ 來蘇郡(내소군)은 본시 고구려의 買城縣(매성현)인데, 景德王(경덕왕)이 [來蘇(내소)로] 改名(개명)하였다. 지금 見州[견주:지금 楊州郡(양주군) 州內面(주내면)]니, 領縣(영현)이 둘이다. ① 重城縣(중성현)은 본시 고구려의 七重縣(칠중현)으로, 경덕왕이 [重城(중성)으로] 개명, 지금의 積城縣[적성현:지금 坡州郡(파주군) 積城面(적성면)]이다. ② 波平縣(파평현)은 본시 고구려의 波害平史縣(파해평사현)인데, 경덕왕이 [波平(파평)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지금 坡州郡(파주군) 坡平面(파평면)].

○ 交河郡(교하군)은 본시 고구려의 泉井口縣(천정구현)인데, 景德王(경덕왕)이 [交河(교하)로] 改名(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지금 坡州郡(파주군) 交河面(교하면)]. 領縣(영현)이 둘이다. ① 峯城縣(봉성현)은 본시 고구려의 述尒忽縣(술이홀현)인데, 경덕왕이 [峯城(봉성)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지금 坡州郡(파주군) 州內面(주내면)]. ② 高烽縣(고봉현)은 본시 고구려의 達乙省縣(달을성현)인데, 경덕왕이 [高烽(고봉)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지금 高陽郡(고양군) 碧蹄面(벽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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