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관심 없었는데, 노래를 들으니까, 

드라마를 보고 싶더라고요. 곡도 괜찮고, 노래도 잘 부르대요. 


전봉준 1차 심문을 퍼왔습니다. 한자는 제거했습니다.

출처는 http://donghak1894.kr/?page_id=1243 사단법인 전봉준장군 동상 건립위원회(위원장:이이화)


(동상은 작년에 서울에 세운 모양입니다)


개국 오백사년 2월 초구일 서기 1895년 2월 9일(음력)


問 너의 이름은 누구인가

供 전봉준이다


問 나이는 몇 살인가?

供 41세이다


살고 있는곳은 어느 고을인가?

供 태인 산외면 동곡리이다


問 하는 일은 무슨 일인가?

供 선비로써 일하고 있다


問 오늘은 법무관원과 일본영사가 회동심판하여 공정히 처결할 터이니 일일이 바로 고하라

供 일일이 바로 고하겠다


問 아까 이미 명유하였거니와 동학사는 일신에만 상관한 일이 아니라, 

즉 국가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니 비록 어떠한 높은지위에 관계되는 것이 있어도 숨기지 말고 바로 고하라.

供 마땅히 소교에 의하려니와 당초 본심에서 나온 일로 타인과 더불어 관계가 없다


問 너는 전라도 동학의 괴수라 하는데 과연 그런가

供 처음은 창의로 기포하였고 동학괴수라 일컬은적은 없었다.

(* 기포: 동학 농민 운동 때 농민 등이 동학의 조직인 포包를 중심으로 하여 봉기하다.)


너는 어디곳에서 인중을 불러 모았느냐?

供 전주.논산 땅에서 의병을 모았다.


問 작년 3월간 고부 등지에서 민중을 도취하였다 하는데 어떤 사연이 있어 그렇게 하였는가?

그 때 고부군수는 액외(*額外:일정한 인원의 수효 밖)의 가렴(*苛斂: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함)이 기만량인 고로 민심의 원한으로 이 거사가 있었다.


問 비록 탐관오리라 하여도 반드시 명색이 있었을 것이니 상세하게 말하라.

供 지금 그 세목을 다 말하지 못하겠으나 그 대개를 간단히 고하리라.

일(一)은 민보아래 축보하고 늑정으로 민간에 고시하여 상답인즉 일두락에 이두세(二斗稅)를 거두고, 하답인즉 일두락에 일두세(一斗稅)를 거두니 벼가 도합 700여석이요, 진황지를 백성들에게 그 경식을 허하고 관가로부터 문권을 주어 징세아니한다 하더니 그 추수시에는 늑징한 일이요. 

일(一)은 부민에게 돈을 2만량을 늑탈한 일이요. 

일(一)은 그의 부(父)가 일찍이 태인현감을 지낸고로 그 부(父)의 비각을 건립한다고 돈을 늑렴한 것이 천여량이요. 

일(一)은 대동미를 민간에서는 정백미로 16두식을 준가로 수렴하고 상납시에는 추미로 바꾸어 이조(利條)를 몰식한 일이요. 이외 허다한 조건은 이루 다 기득할 수가 없다.



問 지금 고한 가운데 2만냥의 늑탈한 돈은 어떠한 명목으로 행하였는가?

供 불효.불목.음행 및 잡기 등 명목으로 죄목을 구성하여 행하였다.


問 이같은 일은 한곳에서만 행했나? 또는 각처에서 행하였나?

供 이같은 일은 한 곳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수십처가 된다.


問 수십처에 이른다니 그 가운데 혹 이름을 아는 자가 있는가?

供 지금은 이름을 기득(記得)할 수 없다.


이 외에 고부군수가 어떠한 일을 행하였는가?

供 지금 진술한 바 사건이 모두 민간탐학의 일이나 축보지에 타산(他山)에서 수백년된 거목을 늑작(勒斫:늑탈해 베는것)하고 축보하는 역사(役事)에 민정을 일전도 주지 않고 늑역하였다.


고부군수 이름은 누구냐? 

조병갑이다.


이로한 탐학한 일은 다만 고부군수에게만 그쳤느냐? 혹 이속배(*吏屬輩:다른 벼슬아치나 아전)들의 작간(作奸)은 없었는지?

供 고부 군수 단독으로 행하였다.


問 너는 태인땅에서 거생했는데 어찌하여 고부에서 기요했느냐? 

供 태인에서 살다가 고부로 이사한지 수년이 되었다.


問 그런즉 고부에는 너의 집이 있느냐?

불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원주: 고부(이평)에 있는 집은 불타버리고 없다고 진술했다.(안핵사 이용태가 소각했다는 뜻)


그때 너는 늑징의 피해가 없었느냐? 

없었다.


일경 인민이 다 늑렴의 피해를 입었는데 네 홀로 피해가 없었다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학구로서 업을 하기 때문에 전답이라고는 삼두락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너의 가족은 몇 명이나 되느냐? 

가족은 합해서 6명이다.


일경 인민이 모두 늑렴의 해를 입었는데 너만 홀로 없다 하니 참으로 심히 의혹이 간다.

나는 아침에는 밥, 저녁에는 죽을 먹을 정도이니 어찌 늑렴할 것이 있겠는가?


고부 군수가 도임한 것은 몇 년 몇 월인가? 

재작년 동지.섣달 양월간이다.


問 도임이 꼭 어느달인가?(*지방의 관리가 근무지에 도착함.)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거년이 일년입니다.


도임하자마자 처음부터 곧 학정을 행하였는가? 

처음부터 행하였다.


학정을 처음부터 행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즉시 기요하지 않았느냐?

일경 모든 인민이 참고 또 참고 견디다가 종말에 부득히 행하였다.


너는 피해가 없었다 하는데 무엇 때문에 기요하였느냐?(*소란을 일으켰느냐?)

한 몸의 해를 위해 기포하는 것이 어찌 남자의 일이라 하겠는가? 중민이 원탄하는 고로 백성을 위해 제해(除害)코져 하였다.


기포시에는 무엇 때문에 주모하였는가? 

중민이 모두 나를 추대하여 주모로 삼은고로 민언을 따랐다.


중민이 너를 주모로 삼았을 때 너의 집에 왔었는가? 

중민 수천명이 나의 집 근처에 모인고로 자연히 이를 하게 되었다.


수천명 중민이 무엇 때문에 너를 추대하여 주모로 하였는가? 

供 중민은 비록 수천명이나 모두가 어리석은 농민으로 나는 문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고부에 주접해 있을 때 동학을 가르치고 있지 않았는가? 

나는 훈도로서 어린 소년과는 관계하였으나 동학을 가르친 일은 없다.


고부 땅에는 동학이 없었는가? 

동학이 역시 있었다.


고부 기포시에는 동학이 많았는가? 원민이 많았는가? 

기포시에는 원민.동학이 비록 합하였으나 동학은 적고 원민이 많았다.


 #원주: 봉기군중의 성분은 동학교인은 소수이었고 대다수가 농민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주도세력은 동학의 지도인물들이었다. 沙鉢痛文:사발통문



기포 후에는 어떤 일을 하였는가?

기포 후에는 진황늑징세를 민간에 돌려주고 관에서 축조한 보를 훼파하였다.


그때는 어느때인가?

작년 3월초이다.


그 후에는 어떤 일을 행하였는가?

그 후 흩어졌다.


흩어진 후 무슨 일로 다시 기포하였는가?

供 그 후 장흥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써 본읍(本邑)에 와, 기포 인민을 동학으로 통칭해서 이름을 나열하여 체포하고 그 가옥을 불사르며 당사자가 없으면 그 처자를 붙잡아 살육을 자행하는고로 다시 기포하였다.


그런즉, 너는 처음 일차적으로 관정에 소장을 올린 일이 있었는가?

처음에는 40여명이 소를 제기하였으나 붙잡혀 갇히고, 재차 60여명이 호소를 하니 또 쫓겨났다.

* 등소 -> *등장等狀: 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올려 하소연함


장성에서도 접전하였는가?

경군(양호초토사 *홍계훈)과 더불어 접전하였다. (黃龍 황룡촌)


問 군기ㆍ군량은 어느 곳에서 구획했는가?

군기ㆍ군량은 모두 민간에서 마련했다.


고부 군기고의 군물 역시 네가 탈취하지 않았느냐?

그 때는 탈취한 일이 없었다.


그 때도 역시 네가 주모하였느냐?

그렇다.


그 후 오래도록 고부에 있었느냐?

장성으로 갔었다.


장성에서도 접전하였는가?

경군(양호초토사 *홍계훈)과 더불어 접전하였다. (황룡촌 싸움)


경군과 더불어 접전하여 어느쪽이 이기고 어느쪽이 패했나?

아군이 취식할 때 경군이 대포로 사격하여 아군의 4,50명이 죽자 아군은 일제히 추축하니 관군은 패주하여서 대포 이(二)좌와 탄환을 탈취파여 왔다.


그 때 양군의 수는 각각 얼마나 되었던가?

경군은 7백명이고, 아군은 4천여명이었다.


그 때 장성에서 행한 일을 바른대로 일일이 고하라.

경군이 패주한 후 아군은 배도(倍道=발걸음을 두배로 빨리 하는 것)하여 경군보다 먼저 전주에 들어가 수성하였다.


그 때 감사는 없었는가?

감사는 우리 군대가 오는 것을 보고 도주했다.


수성후 무엇을 행하였는가?

그 후 경군이 뒤따라 완산에 이르러 용두현에 유진하고 성중을 향하여 대포로 공격하므로써 경기전이 훼상되었다. 이 연유를 경군에게 허급하였더니 경영 중에서는 효유문을 만들어 「너희 소원대로 따르겠다」하므로 감격하여 해산하였다.

(*경기전에는 이성계의 어진이 있다.)


그 후에는 어떤 일을 행하였는가?

그 후 각각 집으로 돌아가 농사에 힘쓴이도 있었고, 그 나머지는 불항의 무리가 되어 민간에 표략한 것도 있었다.


불항의 도(徒) 표략군은 너와는 관계가 없었느냐?

관계가 없었다. (*표략剽掠:남을 협박하여 빼앗음)


그 후 다시 행한 일은 없었느냐?

작년 10월에 나는 전주에서 기포하고 손화중은 광주에서 기포하였다.


問 다시 기포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供 그 후 들은즉 귀국(日本)이 개화를 한답시고 처음엔 민간에게 일언반사의 알림도 없었고 또 격서도 없이 솔병하고 도성에 들어와 야반에 왕궁을 격파, 주상(임금)을 경동케 하였다는 말이 들리는 고로 시골선비 등 은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분개를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 일인(日人)과 더불어 접전하여 일차적으로 이 사실을 청문하고자 하였다.


그 후 다시 어떠한 일을 행하였는고?

供 그 후 곰곰히 생각하여 보니 공주감영은 산이 막히고 강이 둘러 있어 지리가 형승하기 때문에 그 땅에 웅거하여 고수를 도모한다면 일병이 용이하게 처들어 오지 못할 것을 알고 공주로 들어가 일병과 상치코저 하였는데 일병이 먼저 공주에 확거하였으므로 사세는 불가피 접전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런고로 2차 접전후 1만여명의 군병을 점고한 즉 남은자가 불과 3천명이요, 그 후 또다시 2차 접전후 점고한즉 5백여명에 불과하였다. 그런고로 패주하여 금구에 이르러 다시 초모한즉 수효는 좀 증가하였으나 기율이 없어 다시 개전하기는 극히 곤란하였다. 그런데 일병이 뒤따라와서 2차 접전하여 패주하고 각기 해산하였다. 금구 해산 후 나는 경중(서울)의 이면을 상세히 알고 상경할려고 하다가 순창 땅에서 민병에 의하여 붙잡혔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