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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대무신왕편에 호동의 최후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따.


十五年 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好童 王之次妃曷思王孫女所生也 顔容美麗 王甚愛之 故名好童 元妃恐奪 嫡爲太子 乃讒於王曰 󰡒好童不以禮待妾 殆欲亂乎󰡓 王曰 󰡒若以他兒憎疾乎󰡓 妃知王不信 恐禍將及 乃涕泣而告曰 󰡒請大王密候 若無此事 妾自伏罪󰡓 於是 大王不能不疑 將罪之 或謂好童曰 󰡒子何不自釋乎󰡓 答曰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 乃伏劍而死 論曰 今王信讒言 殺無辜之愛子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 겨울 11월에 왕자 호동은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 부인인 갈사왕의 손녀가 낳은 사람이다. 얼굴 모습이 아름다워 왕이 심히 사랑하여 호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첫째 왕비는 [그가] 계승권을 빼앗아 태자가 될까 염려하여 왕에게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접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행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고 참언하였다.

왕은 '당신은 남의 아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비는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장차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울면서 '청컨대 대왕께서는 몰래 살펴주십시요.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고 고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호동에게] 죄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너는 왜 스스로 변명하지 않느냐?' 하고 물었다. [호동은] 대답하였다.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이것은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칼에 엎어져 죽었다.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일 시 모함받은 사실을 밝히면 계모에게 불효가 된다며 자살했다는 건데, 이제부터 이 기사와 배치되는 기록을 열거해봄으로써 호동 사망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호동이 죽던 해인 대무신왕 15년 3월, 왕은 구도, 분구, 일구 등 구신들을 숙청했다. 그 후임은 당시 듣보잡이었던 추발소.

-같은 해 4월 느닷없이 호동왕자가 신행을 떠났고, 여행길에 낙랑군주를 만나 낙랑에 진입

-10월 고구려의 축제인 대동제에 호동이 참가했음으로 낙랑공주의 불같은 사랑과 낙랑멸망이 고작 6개월 안쪽에 벌어졌다는 뜻이다.

-11월 호동사망

-12월 제1왕비의 소생인 해우(解優)가 세자에 오름.


한가지만 더 첨부하자면 대무신왕(무휼왕) 27년에 고구려는 낙랑을 또 침공해야 했다.



이런 역사적 기록들은 따로 떼놓고 보면 연관성이 없어보이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이것들이 모두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여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호동이 있다.


일단 3월 숙청된 구도, 일구 등이 누구냐 하는 것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냥 관리가 아니라 고구려의 장군들이었다. 그것도 무휼왕의 부여전쟁에 종사한 역전의 명장들이다. 그런 그들을 몰아내고 등극한 추발소가 임명된 관직이 비류부장이라는 걸로 군권계통에 일대 변혁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달 뒤 고구려의 (주변국의 영주가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왕자(호동)가 궁정 다툼이 거듭될 게 분명한 상황에서 하릴없어보이는 여행을 떠나고 마치 맞춘 것처럼 낙랑영주의 눈에 띄어 낙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왕자가 낙랑에 진입한 후 낙랑멸망과 전후처리까지 고작 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낙랑공주의 불같은 로멘스는 차지하더라도 고구려군의 신속한 진퇴로 볼때 전쟁은 호동의 신행 이전 시점부터 계획된 것이 분명한 증거가 된다. 즉, 호동의 신행조차 계략의 일부분이었을 공산이 크다는 말이다. 로멘스야 계획한 바가 아니겠으나 빠른 작전을 위해서 충분히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헌데 로멘스 관련해서도 자명고를 찟으라는 지시를 내린 호동이 낙랑공주에게 닥칠 미래에 대해서 몰랐을 리가 만무하다. 실제로 낙랑영주 최리는 자명고의 일을 알게 된후 고구려군이 몰려온다는 소리에 공주를 죽이고 항복하는 걸로 역사에 기술되어 있다.

결론은 로멘스 자체가 호동에게는 계략의 일부였다는 말이 된다.


호동이 자신을 사모하는 여자를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구태여 낙랑을 접수하려고 한 까닭은 뭘까?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대동제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한 까닭은?

왕의 구신들까지 숙청해가며 추발소가 군권 책임자가 된 까닭은 뭘까?


이 모든 물음에 대한 유일한 답은 호동이 계승권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낙랑정복을 업적으로 하여 계승권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결론을 도출하기 어렵다.


호동의 행적을 살펴보며 그가 이러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시킨 것은 그의 출생에 관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호동의 어머니는 갈사국의 공주다.

헌데 갈사국이 어디냐면 고구려의 침공 이후 부여 유민들이 세운 나라이며, 그 왕(호동 어머니의 조부이며 호동에게는 외증조부가 된다)은 금와왕의 아들이며 부여의 철천지 원수인 대소왕과 형제다. 바로 주몽(동명왕)이 부여에 있을 때 갈구던 왕자중에 하나일 수도 있다.

이러다보니 호동어머니가 갈사국왕의 의해 선물로 고구려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호동의 입지가 좁아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만 확실할 것이다.

즉 호동이 적성국 최소 고구려왕실과 은원관계가 있는 외가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참고로 주몽은 호동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이는 호동이 낙랑침공이라는 군사적 모험을 걸게되는 직접적이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자신의 어머니보다 서열이 한참 위인 제1왕비의 소생과 다툼해야 하는 관계도 작용했을 것이다.


솔직히 호동이 계승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으면 제 1왕비가 호동을 참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호동은 애초부터 제 1왕비와 적대관계였고, 추발소 발탁(군권장악)과 낙랑멸망이 계승권 다툼을 위한 계획된 하나의 흐름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 증거로 호동이 죽고 한달도 되지 않아서 공석이던 고구려의 세자 자리가 결정되었다. 호동이 죽는 시점에서 경쟁자가 말살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호동관련 서술은 대부분은 궁정 계승권 다툼으로 엮으면 이해가 쉬우나,  딱 한 구절만 모든 내용과 불일치한다. 호동이 왕비에게 효를 다하기 위해서 칼에 엎어져 죽었다는 전술한 기록이다.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여 이웃국가를 멸망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까지도 헌신짝처럼 내던진 호동이 적대하던 왕비를 위해 죽었다?

그걸 믿을 사람이 있을까?

솔직히 왕비나 해우가 양심이란 게 있었으면 호동의 시체가 채 식기도 전에 세자 자리에 올랐을 것 같은가!!!


호동이 잘생긴 소년이라는 뜻이었으면, 해우가 무슨 뜻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해우(解優)는 이해하는 게 어리석다는 뜻으로 쉽게 말하자면 멍청이다.

이 멍청한 왕자와 왕비는 호동까지 죽이는 무리수를 두었고 호동의 업적을 깎아낼 필요가 있었기에 낙랑을 부활시키는 어리석은 삽질까지 한다. 결과 12년 뒤에 같은 무휼왕이 낙랑을 재침공할 수 밖에 없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설에 의하면 왕비가 세자책봉을 한에 윤허받기 위해서 낙랑을 한무제에게 넘겼다는 주장도 있다)


사람들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는 잘 알면서도 호동의 최후, 그리고 거기에 담긴 비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하지만 영민한 영웅이 효도하려다가 자살했다며 역사서에서 신생(申生)급으로 까이는 건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담으로 해우는 즉위 이후에도 멍청한 짓거리하다가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