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 채널

 왜 일본은 패망했는가

[5편-과달카날의 지옥]


4편 링크


미드웨이에서 일본은 주력 함대를 상실했으나, 아직 일본군은 건재했다. 정규항모도 3~4척 남아 있었고, 경항모들의 손실은 없었다. 이에 일본은 태평양들의 섬을 차근차근 점령해 나가며 전진하기로 한다.


이에 일본 해군은 솔로몬 제도에 있는 과달카날에 상륙한다. 이곳에 비행장을 건설하면 미국과 호주의 연결라인을 차단할 수 있게 된다.

과달카날의 위치-일본군의 항공기가 배치되면 미-호 항로가 위험해짐


이에 미국은 크게 당황한다. 호주는 절대 뺏기면 안되는 전략거점이다. 혹여 안작(호주&뉴질랜드)이 일본군 손에 넘어가면 일본이 동태평양으로 진출할 발판이 된다. 동태평양이 일본군 것이 되면, 그다음은 미 본토다.


이에 미군은 일본이 비행장을 완성하기 전에 과달카날을 점령하기로 한다. 그리고 1942년 8월 7일, 미 해병 1사단이 과달카날에 상륙한다. 일본군은 이때 기지건설을 맡은 설영대가 주력이었기에 미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과달카날을 점령한다.

그런데 그날 밤, 미 해군 최악의 해전이라고 칭해지는 사보 섬 해전으로 미 해군이 작살나버린다. 그나마 일본군이 미 항모를 두려워해 수송선단은 도착해서 물자를 전해 줬지만, 그 이후의 보급은 전해주기 힘들었다. 미 해병대가 고립된 것이다.


일본군은 마치 미군을 농락이라도 하듯, 정해진 시간마다 폭격을 하고 해안가에 와서 함포를 쏘고 갔다. 미군은 이를 일본 수상 이름은 따서 '도조 타임'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 해병대는 일본이 남긴 물자와 겨우 하역한 트랙터 1대로 8월 20일, 일본이 만들던 비행장을 완성시키고 '헨더슨 비행장' 이라고 명명한다.(참고로 이 헨더슨 비행장은 지금 호니아라 국제공항이 되었다)


한편, 과달카날의 소식을 전해들은 일본 대본영은 육군 28연대를 과달카날 탈환에 투입한다. 이치키 대좌가 지휘하는 선발대 900명이 8월 18일 과달카날에 상륙했고,후속부대가 합류하면 미군을 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미군은 원주민과 안작군으로 구성된 해안 감시원들을 곳곳에 배치시켜 놓았고 이 일본군 선발대의 존재를 알아챈다. 일본군도 해안감시원 한 명을 붙잡았으나 도망치는 바람에(나무에 묶고 총검으로 배와 얼굴, 팔, 목을 찌르고 갔는데 이로 줄을 끊고 수마일을 달려 미군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미군에게 들켰음을 알게 된다. 이에 이치키 대좌는 900명을 이끌고 미 교두보로 반자이 돌격을 시전했으나 이미 중기관총과 전차까지 단단히 배치해둔 미군에게 제대로 털려 126명만이 살아남았다. 


일본은 이에 약 6천명의 병력을 증원하고, (진주만과 미드웨이의 그)나구모 제독이 지휘하는 3함대를 보낸다. 곧 벌어진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일본은 정규항모 류조를 상실했다. 미군도 USS 엔터프라이즈함이 중파당했지만 때마침 내린 스콜로 화재를 진압하고 미 함대도 철수해 버린다. 사실 거의 성공할뻔 했는데 나구모가 갑자기 3함대를 철수시켜서 상륙부대는 헨더슨 비행장에서 뜬 항공기들의 공격으로 철수한다.


그러나 미군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앞서 말한 엔터프라이즈의 뒤를 이어 USS 새러토가도 8월 31일, 일본 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진주만으로 갔고 경항모 USS 와스프도 격침당한다. 다만, 이때 날려보낸 함재기들이 헨더슨 비행장에 착륙했고 이를 바탕으로 창설한 것이 그 유명한 캑터스 항공대(Cactus Air Force)다. 


그리고 일본군은 다시 4600여 명의 병력을 모아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미 해병 정찰대대가 상륙지를 급습해 물자를 다 털어갔고 또 계획이 들통난다. 결국, 반자이 어택을 하던 일본군은 M2 중기관총, 37mm 전차포, 105mm 야포에 항공 공습까지 종합선물세트로 얻어맞고 이 능선에 피의 능선이란 별명을 지어준 채 후퇴한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70%의 병력을 상실했고, 물자가 없어 아사 위기에 놓인데다 말라리아까지 번지게 된다. 

이소식을 받아든 대본영은 전차와 화포를 가진 2만여 명을 새로 증원한다. 그리고 미군도 포병을 증강하고 육군 아메리칼 사단도 합세, 1만 9천여 명의 병력을 확보한다. 특히, 화포도 20문 가량 더 많았고 전차의 성능도 뛰어난데다 항공 지원도 받을 수 있어 미군이 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일본도 이를 알아서 헨더슨 필드에 함포사격을 가해 이를 무력화하려고 했다. 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서 10월 13일, 공고급 전함 공고와 하루나의 14인치포 포격을 가했고 다음날 중순양함들의 8인치 포도 헨더슨 필드를 공격한다 . 그러나, 미 해병대는 악착같이 활주로를 보수하고 부서진 항공기에서 멀쩡한 부품만 골라 항공기를 재조립해서 헨더슨 비행장을 복구한다. 거기다 헨더슨 비행장 포격소식을 듣고 달려온 항모 USS 호넷의 항공대와 함께 일본군 상륙지를 공습해서 각종 물자, 특히 식량을 상실하게 한다. 


이후로도 일본군은 '다시' 반자이 공격을 감행했고, '다시' 개털린다. 그러던 와중에 일본과 미 항모부대간의 산타크루즈 해전이 벌어진다. 이 해전의 결과 미 항모 호넷이 격침당하고 엔터프라이즈가 중파당했지만 일본군 함재기들 다수가 격추당한다. 거기다 항모 쇼카쿠도 중파당해서 일본의 제해권은 완벽하게 빼앗긴다. 


그후 일본군의 상황이 어떻게 됬는지는 이 링크 참조

12월 9일, 햐병 1사단은 호주로 철수하고 그자리를 육군 아메리칼 사단에 메꾼다. 일본도 이때쯤 항공 작전의 어려움을 깨닫고 뉴조지아 섬에 비행장을 만들려 했으나 공습으로 지연된다. 그럼에도 완성된 비행장에 34기의 제로 전투기가 배치되지만 곧 대부분 파괴되며 기능을 상실한다. 


그 뒤로도 오스텐 산을 시작으로 거점을 상실하던 일본은 1월 23일, 사령부가 있는 코컴부나를 상실한다. 

대본영은 12월 31일, 과달카날 철수를 결정하고 항공작전 증가와 증원부대 파견을 통해 미군을 기만한다. 거기다 미 함대의 실책으로 순양함을 잃자 미군은 일본군의 공세를 확신, 방어선을 구축했고 그동안 일본군은 조금씩 철수해서 2월 7일 철수 완료, 2월 9일 미군도 과달카날 전투 종료를 발표한다.


과달카날이 미군에게 넘어감에 따라, 일본은 서태평양의 제해권도 위협받게 되고 미군은 사이판, 티니안 등의 전략거점을 천천히 접수한다. 그리고 기어이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로 가는 길이 열리고 만다.


과달카날은 전략 거점이지만, 일본의 지원을 받기 너무 멀었다. 라바울에서 제로 전투기가 뜨면 지원은 되는제 전투가능시간은 15분, 거기다 왕복 7시간의 비행은 많은 파일럿이 신경쇠약에 걸려 격추되게 만들었다. 

거기다 제해권을 장악했음에도 무의미한 돌격을 반복해 미국에게 제해권 탈환을 위한 시간을 벌어다 주었다. 일본 입장에선 불행히, 이 무의미한 돌격은 이오지마 전투 전까지 이어진다.

결국, 과달카날 전투는 일본군의 무능과, 장비의 질적 차이를 포함해 미군과 일본군의 격차를 보여준 전투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