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히스 꽃과 괴물 늑대


그녀와 처음 만난 날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갇혔던 섬에 질리도록 많이 피어있는 히스 꽃을 닮은 붉은 빛이 도는 보라색 눈동자와 언뜻보면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이는 새하얀 히스꽃을 닮은 머리카락을 가진 발키리.


나를 속였던 신 놈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던 나는 그녀에게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을 내뱉었었다.


하지만 험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싱긋 웃으며 내 입안에 찔려있는 검을 뽑아 주던 그녀...



"무슨 속셈인거냐. 더러운 신들의 창녀야!"



...정말 잊혀지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그 때의 내 주둥아리를 걷어 차주고 싶을정도로 내 첫인상은 최악일테니까.


그럼에도 너는 마치 질리도록 봐온 히스 꽃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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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다른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신이라하여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에인헤랴르를 모으기 위해서 향한 전장의 열기에 혼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전사들에게 애도를 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름조차 없는 발키리.


그런 발키리가 자신은 원래 남자였다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다니니, 다른 발키리들에게 대놓고 따돌림을 당하며 기피되는 일을 떠맡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고...



- 철컥 철컥.



그것이 내가 암스바르트니르 호수에 있는 링비 섬에서 베틀로 천을 짜고 있는 이유였다.


발키리들은 링비 섬에 오는 것을 정말로 싫어 했고, 덕분에 영혼을 인도하러 가지 않는 날에는 다른 발키리들에게 시달릴 필요가 없어 좋았다.



"푼수야. 굳이 내 옆에서 베틀을 돌리는 이유가 뭐냐?"

"심심하실까봐요? 저 없으면 펜리르님 혼자 계셔야 하잖아요."



그리고 이 곳에 오면 입은 험하지만 은근히 친절한 늑대가 있었기에, 나는 링비 섬으로 일을 하러 오는 시간을 즐겼다.



"하. 얼빠진 네가 아스가르드에 있기 거북한 것이겠지."



지금도 투덜거리면서도 찬바람을 꼬리로 막아주는 모습을 보면 이게 어딜봐서 괴물이라는 걸까?


처음에는 거대한 몸집에 겁이 나기도 했으나, 한 달이나 링비 섬에서 지내다보니 이제는 투덜거리는 커다란 강아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황금빛 비단으로 꽁꽁 묶여있는 펜리르는 언뜻보면 귀엽기까지 했으니까.



"헤헤..."

"어딜 웃어 넘기려고! 이름이 없다고 무시를 당하면 직접 짓기라도 할 것이지!"



펜리르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유 모를 강한 거부감이 느껴져왔다.


직접 이름을 지어보려고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는 거부감에 이름을 지을 수 없었고, 죽은 전사들은 영혼에게 소개할 이름도 없는 나를 따라 오지 않았으니까.


그 탓에 반푼이라고 무시당해도 이름 없이 지내고 있었다.



"이러니 내가 널 푼수라고 부르는 거다."

"그럼, 지어주세요."

"뭐?"



일부러 이름 없이 지내는 것이 아닌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뾰족하게 말하는 펜리르에게 약간 심술이났다.



"지어주세요. 그렇게까지 말하시는 걸 보면 금방 짓겠네요."

"하! 농담마라. 푼수야, 괴물 늑대가 지어준 이름을 어디다가 쓰겠다고."

"펜리르님이 지어주실것도 아니면서 푼수라고 하지 마세요!"

"..."

"미드가르드로 내려갈 시간이라서요."


-철컥 철컥



베틀을 정리하는 소리만 들리는 어색한 침묵이 계속됐다.


신들도 다른 발키리들도 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거부해 왔기에, 펜리르가 거부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았다.


'역시 펜리르도 마찬가지구나.'  정도의 서운함만이 느껴졌을 뿐.


그렇기에 준비를 끝내고 몸을 돌렸을 때 들려온 소리에...



"에리카."



...너무 놀라서 주저 앉을 뻔 했다.



"녜헷?"



그 뿐만이 아니라 발음이 잔뜩 샌 이상한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에리카 반 리버."

"..."

"넌 반 강 주변에 질리도록 피어있는 히스 꽃을 닮았으니까."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무척, 무척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지금 행복한 표정을 하지 않는다면 행복한 표정을 지을 일이 없을 정도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부터 차오르는 행복에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왜? 짐승 냄새나는 강이름이 붙어서 싫으냐?"

"아뇨! 아니에요! 너무 좋아서 그래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는 펜리르의 질문을 있는 힘껏 부정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가져가버릴 것만 같아서, 간식을 빼앗기기 싫은 어린아이처럼 필사적으로 외쳤다.



"에리카... 에리카..."

"만족하냐. 푼수야?"

"네! 정말로 감사해요..."

"... 눈 좀 붙이게. 얼른 가라."



귀찮은 것일까. 부끄러운 것일까.


펜리르가 고개를 돌리고 앞 발로 얼른 가라는 듯한 시늉을 했다.



"헤헤... 해가 저물기 전에는 돌아 올게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분명 꼬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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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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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이름을 지어준 것이 저리도 기쁠까.


저리도 기뻐할 것이라면 직접 지었으면 되었을 텐데, 왜 푼수처럼 이름 없이 지낸 것일까.


한 달간 나를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링비 섬에 죽치고 앉은 신기한 발키리.


겨우 이름하나에 얼굴이 새빨게 질 정도로 기뻐한 푼수...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떠서 태양을 살폈다.


에리카가 돌아오기엔 태양이 아직 너무 높게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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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리르와 수간순애 발키리 꼭 적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