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백일장 채널
※작년 9월에 썼다가 폐기했지만 이번 백일장에 들고나왔음. 교과서에 나온 해석을 무시하고 내맘대로 해석한 버전이라 일반적인 해석과 들어맞지 않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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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함박눈이 살포시 내려와 내 옷에 떨어졌다. 약하게 반짝이는 가로등 빛을 받아 눈이 하얗게 반짝였다. 어제도 충분히 추웠는데 오늘은 더 춥겠구나. 그녀에게 이런 추운 밤에 보자고 한 게 걱정되고 후회되었다.

혹시 호주머니에 뭔가가 있을까 싶어 손을 집어넣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게 가난이라는 거겠지.

호주머니의 내용물은 뒤로 한 채 맥없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담 너머로 까치밥만 남은 감나무가 보였다. 감나무를 보니 옛집이 생각났자다. 우리 고향집도 감나무에서 감을 따고 까치밥으로 한 두개 남겨놨을 테지. 오늘따라 시골의 고향집에서 나를 기다리실 어머니가 자꾸만 보고 싶어졌다.

그래도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잘 사는 사람한테 갑자기 재개발을 하겠다면서 집을 옮기라니. 나는 그럴 틈도 없는 그럴 돈도 없는 공사장 막노동꾼인데. 억울한 마음에 구청이나 시청에 몇 번이나 항의를 해봤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집을 옮기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오래된 집을 얼마에나 팔 수 있을까. 이 불합리함을 타파해보고자 혼자서 궁리해봤으나 이 가난한 머리로는 어떤 해결책도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권력의 힘에 복종해버렸다. 하기야 그 용역깡패들을 내가 어떻게 처리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한숨을 쉬며 가로등 빛이 비추어지지 않는 어두운 곳을 바라보았다. 청바지에 코트를 간단하게 갖추고 나온 그녀가 쌓여있는 눈을 밟아 뽀드득거렸다.

"어, 왔구나."라고 눈웃음을 지으며 최대한 밝게 말해보았지만 내 목소리는 마음의 어두움을 숨겨주지 못했다. 그녀도 목소리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말이 없었다.

"나, 사실 말할 게 있어. 며칠 뒤에..."
"알아. 무슨 일인지. 너희 집 이번에 이사간다는 거. 그 재개발이니 뭔가때문에."
"너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다니, 너희 집에 뭐가 따닥따닥 붙어있는데 당연히 알지.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얼마나 슬펐는데."

고개가 절로 숙연해졌다. 그녀도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이 가난한 운명을 알고 얼마나 울었을지 생각이 들었다.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녀가 코를 한 번 훌쩍이더니 아무 말도 없는 나를 껴안았다. 나도 그녀의 허리춤에 팔을 감쌌다.

"알아. 다 안다고. 이게 이별이라는 거. 네가 떠나야만 한다는 거. 그래도 괜찮아. 이게 이별이라고 해도, 우리가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도, 내가 너랑 함께 한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네가 어디있어도, 나랑 멀리 떨어져있어도 우리의 사랑은 가난해지지 않을 거니까. 앞으로 만나는 횟수는 줄어들겠지만, 그때까지도 기다려줄게. 그러니까 걱정하지도 슬퍼하지도마."
"나도, 나도 너를 잊지 않을거야.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지만, 그래도 이게 사랑을 갈라놓지는 못할 거야. 사랑은 거리를 뛰어넘는 또다른 힘이니까."

내 코트의 어깨부분이 그녀의 눈물에 젖어져 축축해졌다. 내 눈가도 그녀의 눈처럼 축축해졌고 결국엔 눈물이 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이별의 대화는 멈추지 않고 계속 지속되었다. 껴안은 두 사람의 온기와 사랑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추위도 잊게 만들었다. 그녀가 내 귓가에 사랑한다고 속삭이고는 볼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의 온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새벽 2시가 넘어가도 둘의 작별인사는 멈출 줄을 몰랐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여느때처럼 용역깡패들이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남은 짐들만 간단히 챙겨 용역깡패들을 뒤로 한 채 대문을 나왔다. 뒤에서 건장한 남자들이 중장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을 나오고 조금 지나가니 그녀가 서있었다. 어제와 같은 긴 작별인사가 반복되었다.

어째서 운명은 우리들을 갈라놓았는가. 어째서 가난이 우리의 사랑을 갈라놓았을까. 왜 하필 우리 집이 재개발 대상이 되고 그녀의 집은 한두 블럭만 남기고 재개발 대상에서 빗겨나갔는가. 왜 우리 집 둘 다 가난해서 같이 살 곳마저 구할 수 없는가. 왜 우리 둘 다 생계를 위한 일이 많아서 거리가 멀어지면 서로 만나기 힘든 건가. 아무리 한탄해도 이 가난과 운명을 뒤집기는 어려웠다. 

긴 작별인사를 마치고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위에서 그녀가 참다 못한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조용히 가난한 울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