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백일장 채널

이설음 법률상담소는 오늘도 조용하다. 자그마한 걸상 위엔 낡은 책 몇 권, 그리고 김 솟는 커피 한 잔. 4평 채 안 되는 사무실은 걸상 하나, 커다란 가죽의자 하나, 작은 나무의자 둘, 오래된 기름난로, 그리고 거대한 커피머신이 가득 채우고 있다. 이곳은 사람 많은 신도시 어귀 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이 많아야 할 터이다. 하지만 그동안 손님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바닥엔 먼지가 솔솔 쌓여 있다. 그리고 금이 간 창문 밑 가죽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음에 취한 변호사.

터벅터벅 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뒤 문이 슬쩍 열린다. 틈새로 스미는 차가운 버스 경적에 변호사는 눈 한번 껌뻑,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문 앞에는 우물쭈물 자기를 바라보는 젊은 남자와 허리 굽은 할머니가 서 있다. 이설음은 그들을 보고서 작은 의자에 앉히고 묻는다.

이설음 변호사입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제 이야기를 좀 들어주세요. 꼭 도움을 받고 싶어요.”

기어들어가는 남자의 목소리. 변호사는 그들의 꾀죄죄한 옷차림을 우선 본다. 할머니의 차림새를 보고서 그들의 돈 씀씀이가 못나다 선뜻 짐작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인정이 아직 남아 있어 일단 응낙한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여기에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우리 어머니... 불쌍하고 가엾으신 우리 어머니는 지금, 지금 어떤 가슴 아픈 고생을 하고 계신지...”

변호사는 붉어가는 그의 눈시울을 흘긋 본다. 효자의 대단한 이야기가 장황해질 것을 짐작하고 거두절미,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는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눈물이 흐르는 중에도 그의 말은 조금도 멈추지 않는다.

긴 이야기가 견디기 힘든 변호사. 그러나 용케도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부덕이라는 회사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다. 작았던 회사는 날로 커져 상장을 받아 주식회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가 청소했던 그곳은 무지갯빛이었다.

문제는 이 회사가 어디론가 인수된 다음부터였다. 사장이 어느 땅딸막한 배불뚝이로 바뀌더니 회사는 어머니에게 월급대신 주식을 준다고 했다. 어머니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분간 주가는 계속 하늘로 올랐고, 어머니의 귀중한 재산은 한껏 불어났다. 신이 난 어머니는 재산을 몽땅 털어 주식을 샀다. 주식쪼가리를 가족으로 삼고 항상 그것만 품에 달고 살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가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졌다. 배불뚝이가 회삿돈 먹고 필리핀으로 떠났다나. 사장이 도망가자마자 회사는 곧바로 사라졌고, 주식은 꿈에서 깨듯 풀풀 흩어졌다. 금요일까지도 멀쩡히 일했건만, 월요일에 갑자기 문을 닫다니! 주말동안 아무것도 몰라 대처도 못한 어머니는 소중한 의미와 목적들 전부를 잃어버린 뒤 함구증에 걸린 채 방구석에만 붙어 계시다고 한다.

변호사는 이 열렬한 비극을 듣는다. 그러나 그는 가엾은 남자의 눈물 고인 눈두덩을 피하며 말한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쪽 분야에 식견이 없어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어머님 분 사정은 매우 유감입니다. 그럼 이제 돌아가 주시면...”

남자를 두 번 죽이며 작별하는 변호사. 변호사의 작은 두 눈에는 생기가 전혀 없다. 과연 남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는 한 걸까.

안 됩니다. 이대로는 안 돼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란 말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위해 번듯한 일도 내던지고 돈도 전부 다 버려가면서 노력했는데, 그렇게 했는데도 아직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이야기가 눈물겹지만, 애석하게도 저의 능력이 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안 돼요, 변호사님. 단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피같은 돈을 떼먹은 회사를 부수려는 마음에서 그런 마음에서 이러는 것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사장놈을 감옥에 처넣으려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를 고소했습니다, 법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는데, 누가 봐도 우리가 인정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법원조차도 우리 편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남자는 점점 눈물범벅이 되어가며 절규한다. 눈물이 흐른 자국을 따라 강이 흐르는 듯이 보인다.

아니, 사장이 대판 뒷돈을 뿌렸나, 내가 맞고소를 당하고, 벌금을 물고, 돈이 없어 감옥에 가고... 이게, 이게 말이나 되나?! 저기요, 이게 말이나 되냐고요!”

온몸을 뒤틀며 변호사에게 악을 쓰는 남자를 지켜보는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변호사의 어두워진 얼굴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말을, 말좀 해봐요... 억울하게 감옥에 간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죽어버리겠는데, 회사에서 잘리고, 날 벌레 보듯 흘겨보고, 당하고 내쳐지고 밀쳐지고 하는 내가, 내 어머니가 아무한테도 보이지가 않았나? ...옆집, 옆집에 그렇게 인사 잘 했던 그 애가 날 보는 꼴, 그 꼬라지를 참을 수가 없어...”

말을 멈추지 않는 그에게 지친 변호사는 할머니를 일으킨다. 그에게 큰 소리로 대꾸한다.

도움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된 것...”

그러나 변호사는 말을 마치지 못한다. 남자가 쉰 목소리로 마지막 비명을 지른다.

내가 그렇게나 힘들었는데, 그토록 힘을 다했는데, 아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모든 걸 다해 온몸이 부서지도록 애쓰는 나를! 그동안 한 번을 봐주지를 않았다고요! 이제는, 이렇게는 살 수가 없어... 한번만, 한번만 다시 생각하시면 안 될까요...”

변호사는 그냥은 못 간다고, 이렇게는 살 수가 없다고, 절박함에 빠져 완전히 쉰 목소리로 재차 도움을 울부짖는 이 불행한 남자를 기어이 물리치고 다시 의자에 앉는다. 그들을 서둘러 내보내고 그가 한 일은, 아직 뜨거운 커피 싹 들이켜고 그저 꾸벅꾸벅 조는 것일 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