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백일장 채널


전망 좋은 방에서
조용했다. 숨을 쉬어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곳이었다. 넓고 검은 바다는 그녀의 귀를 먹먹하게 하며 천천히 감싸 안았다. 낯설지만 포근한 그 느낌에 그녀의 눈동자가 눈꺼풀 밑에서 꿈틀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빛은 파아란 빛이었다. 파란 동그라미에 드문드문 하얀 솜뭉치들이 흩어져 있는, 아름다운 보석과 같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하자, 속삭이듯 작은 소리가 들렸다. 소리도 무척 작았거니와, 처음에는 어느 나라 말인지조차 알지 못해서,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귀를 기울이자, 영어로 들렸고, 곧 그 속삭임이 `여기는 HQ, 판도라 1 응답하라'라는 말로 이해되었다.

HQ, 여기는 PND-001, 콜사인 판도라 1.

터져 나오는 탄성에 놀라서 그녀는 몸을 흠칫했다. 그녀의 귀에 속삭이던 사람들은 그녀가 대답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환호하는 소리가 잦아들자 그들은 그녀가 있는 곳이 어디이며, 그녀의 임무가 무엇인지, 임무를 위한 매뉴얼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를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주위로 아이보리색 벽, 천장 그리고 바닥이 둘러쳐졌다. 그녀의 시선방향으로는 베란다가 탁 트여 있어서 그녀는 파란 구체를, 이제는 매뉴얼에 지구라고 적힌 물체를 편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모르는 사이 방 한가운데에 푹신한 사무용 의자, 그리고 의자 위에는 카메라도 자리잡고 있었다. 조금 피곤해진 그녀는 의자에 얹어진 카메라를 목에 걸고,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대를
"사는 게 힘들죠. 바르게 사는 것 같은데, 주위 사람들은 무시하고, 그렇다고 묻어 가듯이 살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회식이 끝나고 어쩌다 같이 걸었을 때 들었던 그녀의 넋두리를 그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원래 밤공기에는 무슨 소리를 불어 넣어도 낭만적으로 울리기 마련이다.

평소 고민해의 답답한 태도에 고등학교 동창이자, 지금은 민해의 직장 근처 셋방 룸메이트인 도라이는 `네 놈은 여자하고 입 맞추는 순간에도 도덕 따지고 있을 놈'이라고 야유했다. 더 답답할 때에는 `넌 여자가 떡치자고 안아도 꼭 공자님 먼저 찾아라, 이 새끼야'라고 좀 더 원색적인 비난도 하곤 했다. 그때마다 민해는 그 순간에 더 길어질 잔소리로부터 피하고 싶어, 못내 민해의 의견에 동조하는 척을 하다가도, 결국은 자기 식대로 고지식하게 일을 처리해나갔다.


대학시절 이야기를 꺼내자면, 답 도출했나 안 했나만 대충 체크한다고 소문이 난 과제를 제대로 풀겠다며, 몇 일을 혼자서 고민하다가 풀지를 못 했다며 풀이과정만 적고, 답은 못 적는 일도 꽤 많았다. 주위에서 실컷 놀다가 잘 푸는 놈 것을 제출 전날 적당히 베끼고는 순조롭게 한 학기를 보내는 놈들도 꽤 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내가 그것을 따라 했다가 조교님한테 카피했다고 걸리면 어떡하지 하는 밑도 끝도 없는 걱정을 하면서, 아니면 이런 건 공부가 아니잖아 하는 얼간이 같은 정의감을 내세우면서, 한사코 편한 길을 같이 따라 걷지 않고 혼자서 모든 걸 끌어 안고 가려 하는 미련한 녀석이 바로 고민해였다.


그러면서도 그도 남들과 같은 인간이라, 항상 자문해왔다. 내가 등신인가? 왜 나는 뭐 좀 대충대충 해치우고 나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거지? 왜 나는 요령이 없는 걸까? 저렇게 필요 없을 때에는 대충대충 하고 중요한 때에만 빡세게 살아도 잘 살고 있잖아, 그럼 저렇게 사는 게 옳은 거야? 나는? 매일 무슨 경우에도 성실하게 나는 그럼 옳지 않은 거야? 왜? 기분이 안 좋으면 하루 종일 이런 고민만 하다가 할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잠자리에 눕는 경우도 있었다.


인간 관계에서도 그 특유의 고지식함, 내지는 촌놈 근성은 성실히 작용되었다. 쌍팔년도에 이미 장정일 시인은 사랑이 라디오를 껐다가 켜듯이 가볍고 즉흥적인 시대가 왔다고, 김춘수 시인이 말하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서로에게 꽃이 되고픈 사랑은 부담스러운 시대가 왔다고 노래했거늘, 고민해는 좀처럼 납득하지 못했다. 시대가 그렇게 변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나도 그렇게 행동해도 된다는 정당성이 부여되지는 않는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진지함이 부담스러워 고민해를 멀리하거나, 비웃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면, 이 촌놈의 가슴에도 조각칼로 후벼내듯 빠알간 생채기가 하나, 둘 늘어갔다. 점차 고민해는 이 생채기 얻는 과정이 무서워 타인을 적정선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는 버릇이 생겼다. 비록 서로 껍데기만 확인하고 고개 돌리는 가벼운 관계만을 주고 받겠지만, 뭐, 그 시간만 대충 지나 보내면, 슬픈 일도 안 생기잖아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그는 타인의 적정 궤도 주위만을 맴돌고, 더이상 가까이 가려고는 하지 않는 그 처세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말하는 아가씨를 만났을 때에는 기분이 남달랐다. 세상에 나와 같은 생각을 사람이 있구나 라는 놀라움부터 시작하여, 역시 나도 정상인이었어 하는 묘한 안도감 내지는 동질감, 이 사람을 내가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자 특유의) 정의감 등등. 그 혼탁한 만감(萬感)의 용광로에 여인의 미모가 녹아 들어가자, 민해는 그것을 `그녀를 좋아한다'라고 결론 내려버렸다. 그 성급한 결정이 바로 이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바라본다
그녀는 하루 종일 사진만 찍었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지구 곳곳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주로 본부에서 지시하는 북한, 이란 등지의 군사시설 사진을 찍지만, 임무 외에 다른 곳의 사진을 임의로 더 찍어도 본부에서 특별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것 말고는 움직여야할 일도 별로 없었다. 그녀는 묵묵히 일했다. 사람이 있건 말건 상관 않고 일했다.


판도라의 방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꽤 많았다. 동물 구경하듯이 판도라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찔러보고 때려보고 가는 사람, 대뜸 주사기로 병균을 심고 어찌 되나 관찰하러 오는 사람 등등. 재밌는 건, 판도라의 집에는 애당초에 출입문이라는 것이 없었기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다들 제멋대로 남의 집에 톱질을 해서 자기들만의 뒷문을 뚫고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본부에서는 외부인과의 접촉은 엄금했으나, 뒷문 만드는 것을 방해하라는 지시하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그냥 외부인들이 방에 들어와서 뭘 어쩌건 간에 무시하고 지구의 사진만을 찍었다. 외부인이 일으킨 말썽은 본부에서 알아서 다 처리해주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지구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는 언제나 새로웠다. 점차 그녀는 임무 외의 사진을 찍는 데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 흥미는 날이 갈수록 깊어져서 나중에는 지구의 모든 모습을 다 담아내겠다고, 그의 모든 모습을 알아내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새 판도라에게 있어 지구는 `그'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생명들이 뛰놀 수 있도록 아늑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는지, 어떻게 저렇게 자신의 피부를 썩히고 더럽히는 버러지 같은 것들을 자애롭게 그냥 지켜봐 줄 수 있는지,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그에 대한 관심은 커져만 갔다. 그녀는 이 정해진 궤도에 끊임없이 돌고 돌 수 있어 무척, 행복했다, 그 때까지는.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접근할 방법을 이리저리 궁리했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같은 직장, 그것도 같은 부서에 있다고 해도, 오히려 같은 부서에 있어서 더 말 걸기가 힘들었다. 자기 직속 상관도 아닌 대리님 책상에 신입 사원이 무슨 이유로 업무 시간에 가까이 가겠나 아무리 고민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같은 부서라도 선배들마다 맡은 일이 서로 달라서 퇴근 시간도 서로 들쭉날쭉했다. 정말 작정하지 않으면 업무 시간 외에 말 거는 것도 고민해에게는 터무니 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 날 그녀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도 정말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정말 어쩌다. 회식 자리가 파하고 막내인 고민해가 이 사람 저 사람 다 택시에 태워서 귀가시키고 나니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그녀였다. 집이 근처라며 택시는 타지 않겠다고 말하기에, 그럼 바래다 드리겠다고 말씀 드리고 걷다 보니 그 날 밤 처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그녀의 위치는 안정적이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대리 4년차에 이제 곧 과장으로 올라갈 차례인데, 부장님이 인상 깊어 하는 실적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일은 진짜 열심히 하는데 보는 사람이 안타깝다 라고 선배 대리들이 담배 피우면서 노가리 까는 것을 고민해는 지나가는 길에 들었다.


하루는 일이 조금 늦게 끝나서 밤 여덟시 반쯤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녀 역시 퇴근을 하지 않은 모양인지 외투와 가방이 그대로 자리에 있었다. 기억을 되새겨 보니 저녁 먹으러 나간다고 나가는 것까지는 보고, 돌아오는 것을 못 봤다. 삼월이라도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어 외투 없이 어디 갔다 온다는 것은 멀리 가지 않겠다는 뜻이라 추측했다. 저녁 시간 두 시간 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걸 보자 약간 이상했다. 잠깐 산책하는 척 우리 부서 사람들이 업무 상 있을 법한 장소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해봤으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퍼뜩 오늘 회의에서 그녀가 발표할 때 부장님이 발표내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논지로 언성을 높였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많이 실망한 걸까? 이 추운 때에 외투도 안 입고 어디를 서성이고 있단 말인가?


자판기 앞 의자에 앉아서 계속 엘리베이터를 주시했다. 엘리베이터가 이 곳 7층에서 멈출 때마다 이미 비어버린 커피잔을 입에 대며 커피를 먹는 척, 엘리베이터에 누가 내리는지 관심 따위 없는 척, 곁눈질로 누가 내리나 보고 있었다. 그녀는 저런 옷 안 입었는데 싶어도 아쉬워서 한 번 더 확인하고, 그녀는 저런 머리 스타일이 아닌데 싶어도 또 한 번 더 확인하고, 그녀는 저렇게 웃지 않는데, 그녀 발자국 소리는 저런 소리가 아닌데, 그리고 그녀라면 적어도 무슨 일로 지금까지 있어요 라고 정도는 물어줄 텐데, 그래도 아쉬워서 다시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엘리베이터가 열릴 때마다 가슴 설레어 했다. 그렇게 모두가 그녀였다가, 그녀였다가, 그녀일 것이다가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다.


고민해는 오늘 딱히 잔업이 없었다. 야근할 놈도 아닌데 너무 늦게까지 기다리면 또 그건 그거 나름대로 이상하게 보일까 지레 찔려서 11시까지 기다리다 귀가했다. 그러나 원룸방에서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안 되겠다 하고 츄리닝 바람으로 새벽 4시에 회사에 와보니 다행히도 외투와 가방이 그녀의 책상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사히 귀가했겠다고 안심했다. 한 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어 기뻤으나,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가슴이 먹먹하게 물 먹은 듯이 무거웠다. 왜 끝까지 기다려주지 못했을까 미안했다. 그녀는 신경도 안 쓸 텐데 말이다.


문이 닫힌다
좀 더 그와 가까이 있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그녀의 방의 고도를 낮춰야만 했다. 고도를 낮추는 버튼을 찾아보았으나, 그녀의 방에는 인공위성의 고도를 낮춰주는 버튼이 존재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귓속말로 본부에서 임무를 전달하고는 형식적으로 묻는 그 말.

 

판도라1, 혹시 필요한 것이 있는가?


지구에 더 가까이 가고 싶습니다.


궤도이탈은 안정성의 이유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녀의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다른 필요한 것이 있는가?


좀 더 지구를 가까이서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렌즈 조정을 하라. 렌즈에 대한 매뉴얼은 책상 서랍에 보관되어 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알겠다, 판도라1. 다음 대원 판도라2에게 제공될 카메라는 귀관에게 제공된 카메라보다 보다 개선된 카메라를 지급하도록 기술팀에 권고하겠다. 기술팀에게 전달할 요구 사항을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해서 제출하도록. 다른 문제는 더 없나?


그녀는 입을 벌려 뭐라 말을 더 하려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 아니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렇게 며칠을 두고 본 결과, 그녀에게는 임자까지는 아니라도 썸남되는 사람은 있구나 싶은 관찰을 몇 번 했다. 직접 물어본 것도, 아니고, 그냥 추측이지만, 적어도 고민해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것보다는 더 가까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사람처럼 보였다.


짝사랑에 거절 당한 일만 일곱 번은 족히 되는 고민해 씨가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면서 얻은 단 하나의 원칙은, 이미 다른 남자한테 관심 가지고 있는 아가씨한테는 절대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자에게는 무척이나 성가신 일일테고, 남자에게는 되지도 않는 일에 가슴만 아픈 둘 다 불행해져서 나중에는 서로 얼굴 쳐다보기도 민망해지는 지옥행 고속버스를 타는 짓이라,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고민해는 그 때 여자분에게 미안해지는 동시에 화가 나서 어깨를 부르르 떤다.


썸남이 있다고 결론내린 그날밤, 방에 돌아오자마자 뜬금없이 초등학교 시절 문방구 앞에서 백원짜리 동전 넣고 놀던 오락기 이야기를 꺼냈다.

``야, 라이야. 너 그거 아냐?"

``뭐?" 

``그 어렸을 때 문방구 앞에 백원 넣고 하는 오락기."

``아, 그거?"

``나 그거 진짜 못했다?"

``등신, 무슨 게임이었는데?"

``뭐든 다 못했어, 스노우 브라더스, 야구왕, 철권, 비행기게임, 보글보글, PUMP, 던전 앤 드래곤. 다 젬병이었어."

``와, 그것도 재주네, 어떻게 그걸 다 못하냐?"

``모르겠어, 오락기가 내 맘대로 안 움직여 주던걸."

한숨을 쉬고는 고민해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말야, 게임 내용은 엄청 궁금한거야, 다음 탄은 어떤 모양일까, 무슨 보스가 나오지, 엔딩은 어떻게 되지, 이렇게 말야."

``그럼 집에서 에뮬레이터하고 게임 깔고 하면 되잖아."

``아냐, 그런 느낌이 아니야. 계속 들어봐, 그래서 다음이 궁금하니까, 잘 하는 애들이 오락기에 동전 넣으면 꼭 뒤에서 그거 잠자코 구경하고 있었어. 다 죽어서 동전 모자르면 내가 대신 넣어주고 말야. 내 대신에 게임 다 깨주고 난 뒷내용 다 구경하는 거지."

도라이는 저런 등신이 어딨냐며 어이 없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웃기단 말야. 그런데 말야, 그렇게 구경하는 게 나는 정말 재밌었어. 구경만 해도 정말 즐거웠단 말야."

고민해는 창 밖 너머 먼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 얘기는 왜 하는데?"

``썸남이 있는 모양이야."

``그 사람? 그래서?"

``좋아하는 거 그만둘까봐."

매일 퇴근하고나서 그녀에 관해 조잘거리는 고민해를 보고 어지간히 빠졌구나 싶었던 도라이는 뜬금없는 고민해의 포기선언에 왜 하고 이유를 물었다.

``나보다 그녀를 더 즐겁게 해주는 남자가 있으면 뭐하러 내가 더 접근해야 해? 내가 바라는 것이 진짜 그녀의 행복이라면, 뭣하러 지금 행복해하는 그녀를 방해하고 그 옆자리에 내가 낑겨 들어가려고 발버둥 쳐야 하냐 이 말이야. 난 그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 할텐데."

도라이는 일순 웃음기를 거두고 잠시 고민해를 쳐다 봤다. 

``너 말야, 너 자신이 그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거야?"

``감이랄까......?"

``그런 건 부딪치지 않고서는 몰라."

``틀렸어 이제, 임자가 있으면 다 끝난 거야. 그걸 방해하는 건 잘못된 거야. 나라고 왜 아쉽지 않겠어? 이제 겨우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그런 마음씨 고운 사람을 찾았는데."

``임마, 그런 건 부딪치지 않고서는 모른다고."

도라이는 또 잔소리를 피하려고 억지 웃음을 지으며 대꾸하는 도라이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너 정말 그런 게 사랑이라 생각하는 거야? 남이 행복해하는 것만 보면 된다는 그게? 야, 그럼 내가 옆에 있지 않아도 그 사람이 즐거운 것만 보면 된다는 식으로 즐거워 하는 놈이, 야동보고 즐거워 하는 놈하고 다른 게 뭐야? 관음증 같은 건가?"

도라이의 과한 비유에 화가 나서 민해는 대꾸하려하자, 라이는 외투를 집어들고 방 밖으로 나섰다.

``나 담배 피우고 온다."

문소리가 메마르게 쾅 울리자, 민해는 혼자서 쪼그려 앉아 분을 삭이며, 동시에 그녀를 떠올렸다.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나? 왜 옆에 있고 싶어했지? 좀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고 싶었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지냈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고, 나도 그런 이야기들을 해주고 싶었어. 손도 잡으면 좋겠지, 입맞춤도 좋겠고. 남사스런 일까지 상상을 하자, 얼굴을 붉히다가, 감정에 휩쓸려, 도라이의 말에 잠시 기울어진 채, 그래도 한 번 제대로 물어보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처음으로 그녀는 그녀의 주위를 기웃거리던 불청객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불곰 한 마리와, 인민복 차림의 동양인 하나가 몇 일전부터 언제 그녀가 사진기를 내려놓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이 방에 들어오기 위한 뒷문도 아주 정교하게 만든 것으로보아 보통 실력의 도둑놈들은 아니겠거니 싶어서 그녀는 그 둘을 찍었다. 처음으로 이쪽에서 말을 걸자, 둘은 자신들의 잠입이 들켰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서, 여러모로 놀란 눈치였다. 혹시 대화를 빙자한 선제공격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외부인과의 접촉에 대한 매뉴얼은 서랍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둘에게 뭐라고 더 말을 붙여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딱 한가지였다. 지구에 더 가까이 가는 것. 그래서 별 고민 없이 그녀는 자신의 요구사항을 단도직입적으로 밝혔다. 본부로부터 고도 제어권을 내게 넘겨달라, 그러면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겠다. 둘은 눈을 끔뻑이더니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마침내 나는 너에게

판도라는 인공위성의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한 3분 정도 낮췄을까? 귀 속에서 다시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한다. 여기는 HQ, 판도라01 고도 유지장치 확인 바란다. 여기는 HQ, 판도라01 고도 유지$\cdots$. 반복된 속삭임은 인공위성의 고도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더 다급해졌고, 고함소리로 변해갔다. 귀가 쨍쨍 울릴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이 세상 누구보다도 평온했다.


인공위성의 태양열 전지판이 지구의 대기와 마찰을 일으키며 불이 붙으려 하자, 그녀의 팔에도 서서히 뜨거움이 전달되었다. 뜨거움은 단순히 뜨거움으로 끝나지 않고, 그녀의 살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몸에도 견디기 힘든 뜨거움이 휩싸이기 시작할 즈음에는 그녀의 팔에 붙은 살덩이들이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에게,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인공위성은 이미 궤도를 수정할 방법이 없을 만큼 내려오고 말았다. NASA의 직원들은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에서 최대한 판도라와 교신을 하며, 마지막 치명적인 에러의 이유를 알아내려 골몰했으나, 헛수고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판도라는 몸 전체가 시꺼멓게 익었다. 눈은 진즉 오그라져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앞으로 또 앞으로 전진해 나아갔다. 오직 바라만 보던 너에게 이렇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데, 이제는 너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순간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다. 온 몸이 타 들어 가도, 눈이 멀어 그를 볼 수 없게 되어도, 그래도 그녀는 지구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불길은 그녀의 살을 녹여내고, 그녀의 뼈를 시꺼멓게 태워 으스러뜨리고, 그녀의 뇌를 살라먹기 시작했다. 점차 그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게 되었다. 그의 주위를 돌면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은 이미 새까맣게 타들어간지 오래다. 이제는 그의 이름도 무엇인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모습도 기억나지 않고, 그가 누구인지도 생각나지 않거늘, 이래도 계속 가까이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순간 망설임이 스쳤지만, 다시 그녀는 굳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에게는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고마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같이 숨 쉴 수 있어 기뻤다. 비록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그의 아름다움을 눈에 새길 수 있어 행복했다. 가까이 더 갈 수 없어 몹시 가슴 아팠다. 넋조차 있을지 없을지 애매한 찰나에, 판도라는 그녀 자신이 느꼈던 이 고마운 감정을 그에게 직접 건네주고 싶다고, 그에게도 이 가슴 속 울렁이는 안타까움을 안겨주고 싶다고, 너도 나로 인해 무언가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결국 스러졌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고백을 돌아온 민해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썸남 같은 건 그녀에게 없었더란다. 일면 기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피 엔딩은 아니었다. 여자 쪽에서는 고백을 거절한 모양이었다. 일이 너무 바쁘다나 뭐라나, 도라이는 그 여성분이 사람 볼 줄은 아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민해의 등을 토닥였다.

``바깥 공기 좀 마실래?"

민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피곤하네. 그는 물기가 서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침대에 올라 이불로 자신의 온 몸을 감췄다. 라이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내 그만뒀다. 그는 새벽 3시까지 버그 찾는 잔업을 하다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아침 회의가 있어 억지로 7시 40분 알람에 눈을 뜬 라이는 여전히 어젯밤 그대로 이불에 둘러싸여 웅크리고 있는 민해를 보고는 회사에 아프다고 병가낸다고 전화해주랴 하고 물었다. 좀 있다가 그래주면 좋고 하고 느릿느릿 민해는 대답했다. 평소처럼 옷 갈아입고, 랩톱 하나 챙겨 들고 '나 간다. 오늘은 회의만 하고 재택근무 해도 되니까, 점심밥 같이 먹자.' 라고 말하며 문을 나섰다.


문이 찰카닥 닫히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부스스 일어난 민해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컵라면이었다. 귀찮지만 생으로 씹어먹을 의향은 없었기에 민해는 침대에서 기어 나와, 커피 포트를 찾았다. 포트는 비어 있었다. 도라이 이 놈은 물 처먹고 지 손으로 포트에 물 끓이는 법이 없어! 짜증을 내며 포트에 수돗물을 받고 버튼을 눌렀다. 컵라면 뚜껑 껍데기를 여는데 어찌나 그리도 안 열리는지, 홧김에 힘을 확 주자 가장자리를 따라 찢어지지 않고 중앙을 한 가운데로 가르며 찢어져 버렸다. 빌어먹을 고물 포트는 어찌나 말썽을 부리던지, 좀 끓더니 갑자기 꺼졌다. 항상 있던 일이라 반사적으로 다시 콘센트 뺐다 꽂아서 작동시키려는데 커피 포트의 금속 부분에 손을 대버렸다. 지지직! 월세가 싸길래 후닥닥 계약하고 이사했더니 접지도 안 되어 있는 미친 건물에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집주인에게도 부자면 다냐며 들리지도 않을 욕을 하며 커피 포트를 재작동시켰다. 물 붓고 한 숨 돌리며 이제는 먹어야지 하고 컵라면을 들고 이동하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크게 울렸다. 엉겁결에 손에서 컵라면을 놓치고, 화가 끝까지 난 채, 전화를 받으니 피싱 전화였다. 양말에 뜨뜻한 라면국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

이게 다 컵라면 때문이야! 하고 컵을 집어 찼다가 그는 국물에 미끄러져, 이번엔 뒤로 넘어졌다. 한참 동안 넘어진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자, 그는 천장이 미웠다.


오후 한 시 반. 라이가 돌아왔다. 민해는 여전히 누워있었다. 라면 면발과 국물이 방 전체에 수묵화를 그려놓은 것만 제외하면 아까 그가 나왔을 때와 전혀 방이 달라져 있지 않았다. 라이는 자신의 데스크탑에 라면 면발과 국물이 흐드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방열구로도 들어갔으리라.

``야, 일어나봐."

민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야, 씨발 일어나보라고."

여전히 말이 없었다.

라이는 라면 국물로 젖은 양말 신은 발로 번데기같이 웅크린 민해의 등짝을 걷어 차버렸다.

``무슨 짓이야?"

라이는 여전히 발길질을 멈추지 않으며,

``널 발로 차고 있지."

``그만! 왜 그러냐고? 방 어지럽힌 것 땜에 그런 거야?"

``아니야."

``그만 좀 때려! 네 컴퓨터, 라면 묻은 거 알아, 그깟 컴퓨터 다시 사주면 되잖아!"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참다 못한 민해도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동네 개싸움처럼 서로 물고 늘어지며 방 안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옷으로 바닥의 라면 국물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성이 난 민해는 그 이후로도 한참 횡설수설하며 네가 예전에 내 옷걸이 부숴먹은 거며, 잔업한답시고 맨날 밤새 컴퓨터 켜고 키보드 잘그락거리느라고 잠 자는 거 방해하는 거며 도라이 너는 나한테 잘못한 거 없는 줄 아냐며 미주알고주알 울분을 터뜨렸다. 아무 말도 않던 라이는 짐짓 힘을 빼며 방안에 드러누웠다. 민해는 라이를 마운트 자세로 올라탄 채, 씩씩대며 물었다.

``넌 잘못한 적 없어?!!!! 매번 나더러 생각이 너무 많다고 놀려대는 것도 지긋지긋해! 넌 뭐가 그렇게 잘 났냐고!! 그 사람한테 깨끗하게 말했는데,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인데?!!!!"

라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그랬잖아. 나랑 같이 점심 먹자고."

민해는 뭔가 벙쪘으면서도, 슬픈 표정을 지었다.

``라면을 먹고 싶었으면 나가기 전에 나더러 끓여 달라 하지 그랬어. 너 깨어 있었잖아? 고백 실패한 친구놈한테 라면 끓여주는 것 정도는 나도 해 줄 수 있어. 회의 좀 늦는 게 대순가. 그런데 넌 그러지 않았지."

민해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라이의 멱살을 움켜쥔 손의 힘도, 이글거리던 눈의 힘도 차차 풀어졌다. 그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지 알려줄까? 네가 겁쟁이라서 그래. 넌 너무 생각이 많아."

민해는 반사적으로 개소리마 라고 중얼거렸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어쩌라고? 애인 비스무리한 사람이 있는데 어쩌라고? 고백 좀 차였는데 어쩌라고? 그냥 지나가는 일이야. 기분 나쁘지만, 넌 씨발, 오늘을 살아야지."

그만, 그만 이라고 입은 뻥끗해도, 민해는 목이 메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라이는 손을 들어 자기 위에 올라타 엉엉 우는 민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렇게 방안의 모든 라면 국물은 라이의 등짝과, 바지 뒷면, 그리고 민해의 무르팍이 다 빨아 먹어갈 즈음이 되자 라이는 웃으면서 물었다.

"바깥 공기 좀 마실까?"

둘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방문을 나섰다.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조용했다. 숨을 쉬어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곳이었다. 넓고 검은 바다는 그녀의 귀를 먹먹하게 하며 천천히 감싸 안았다. 낯설지만 포근한 그 느낌에 그녀의 눈동자가 눈꺼풀 밑에서 꿈틀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빛은 파아란 빛이었다. 파란 동그라미에 드문드문 하얀 솜뭉치들이 흩어져 있는, 아름다운 보석과 같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하자, 속삭이듯 작은 소리가 들렸다. 소리도 무척 작았거니와, 처음에는 어느 나라 말인지조차 알지 못해서,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귀를 기울이자, 영어로 들렸고, 곧 그 속삭임이 `여기는 HQ, 판도라 2 응답하라'라는 말로 이해되었다.

HQ, 여기는 PND-002, 콜사인 판도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