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공장들은 연신 희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돌아가고 있었으며, 도로위의 차들은 해도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꼭두새벽부터 끊임없이 줄을 이었으며, 사람들은 제각기 목적지를 찾아 어떨때는 걸으며, 어떨때는 뜀박질을 하며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


나만 빼고.


나는 고등학교를 자퇴한 자퇴생이다. 이유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굳이 학교를 다녀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실의감 내지는 허무감이 마음속에서부터 계속 멍울져왔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선 말했다. 너는 불량학생도 아니거니와 성적도 좋은 편인데, 1년만 꾹 참고 다니면 졸업증이라도 받어 그걸로 취직을하든 대학진학을 하든 뭐라도 할 수 있는데 왜 그런 선택을 급하게 하냐고.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급한 선택이 아니라 너무나도 늦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를 갓 입학하고 얼마 안가서부터 그런생각이 계속해서 들었으니.


고등학교시절 난 유독 문학을 잘했다. 문학으로 우수상도 받아봤고, 교내 글짓기나 백일장에서 상도 좀 받아봤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너는 나중에 문학분야로 가면 좋겠다"는 소리도 몇 번 들었다. 하지만 감흥은 없었다. 기쁨도 없었다. 독서를 하며 내 삶의 기쁨과 내 안의 흥미와 열정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번번히 실패로 돌아간것일 뿐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쳇바퀴를 끊임없이 도는 다람쥐가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그리하여 숨이 턱끝에 찰때까지 뜀박질을 해보지만, 결국은 거대한 쳇바퀴 안일 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는 어느새 근육이 붙어버린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나에게있어 뛰어난 문학성적은 그것이었다. '쳇바퀴로 다져진 다람쥐의 근육'.


문학에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 있다. 작품 밖의 서술자가 관찰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시점이다. 이때 서술자는 인물의 내면을 서술하지 않고, 사건에 대한 평가 등도 직접적으로 하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따라서 독자로 하여금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한다. 그렇기에 나도 이러한 시점의 소설을 자주 읽었다.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상은 현실과 달리 자유로웠다. 상상 속에서는 누구도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이따금 벌어지는 학교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꿀수도 있었으며, 이참에 세상에서 학교폭력을 지워버리는것도 가능했다. 또한 상냥한 엄마, 자상하고 책임감 있는 아빠, 함께있으면 뭘 해도 즐거운 친구들도 상상속에서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상상은 상상. 현실로 돌아오면 너무나도 비참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 구역질 나는 곳이 바로 현실이였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할때면 그 중 두어개정도에 누군가 학교폭력을 당하는 그림이 끼워져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매일 탁자위에 어디서 났는지 모를 10만원을 던져놓고 3,4일씩 집을 쳐 나가 수상한곳을 전전하는 엄마와 집을 떠나 몇년 넘게 돌아오지않는 아빠 뿐이었지 상냥한 엄마나 자상한 아빠 따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해서, 나는 세상마저 구역질 나는 냄새의 방향제로 삼아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보고있는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