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이 복도를 비추자음험한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복도가 그 입을 벌려 맞이한다창가는 물론이고바닥과 촛대에까지 두껍게 먼지가 쌓인데다 기둥과 벽에 발라져 있던 금박은 세월의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혹은 도굴꾼들에 의해 군데군데 벗겨져 과거의 찬란한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린 상태였다다행히 입구에 조각된 아카르 분파의 상징물은 거의 훼손되지 않아그나마 수월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지만

 

구불구불한 복도를 따라 걸으니사방이 탁 트인 방이 모습을 드러낸다십자가 모양으로 깔린 붉은 카펫의 교차점에는 황동으로 만들어진 뱀 조각상이 올려져 있고방의 모서리에는 엄숙한 얼굴을 한 순교자 석상이 각자 다르게 생긴 석장을 들고 있다조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기운이네 석상으로 흐릿하게 이어져석상의 움직임을 억누르고 있었다적절한 조치 없이 무턱대고 조각상을 뽑으려 들면 저것들이 움직여공격해올 것이 분명했다

 

검은 바람은 동쪽에서 불어겨우살이를 키워낸다돋아난 가지로하늘에 군림하는 광휘를 맞춰 떨어뜨릴지니.”

 

푸른 달이 뜨기 전부터 하늘에 떠 있던 건물인 만큼꽤 어렵지 않게 첫 번째 석상을 무력화시켰다남은 석상은 셋중추에 연결되어 있던 마법을 해제한 만큼이제부터는 좀 쉽다조각상에 손을 대기 전까지는 공격해오지 않으므로동시대의 봉인마법을 모조리 찾아 그 해제 주문을 하나하나 열거해가며 주먹구구식으로 풀어내면 된다

 

“...케케묵은 옛 지배자들의 이름으로.”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마지막 석상이 고개를 떨군다조금 전까지 바닥에 그저 올려져 있던 조각상은 밑에서 솟아오른 제단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다 헤져가는 필사본을 꺼내제단 밑에 적힌 글귀에 따라 조각상을 동쪽으로 두 번남쪽으로 한번 돌리고양 손 엄지로 붉은 눈동자를 동시에 꾹하고 누르자바닥이 갈라지듯 열린다움푹 들어간 조각상의 양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와제단 양옆으로 파여 있는 홈을 따라 밑바닥을 향해 흐르기 시작한다제단의 튀어나온 부분에 밧줄을 묶고그대로 죽 바닥까지 내려간다

 

젠장비행 마법을 더 열심히 공부할 걸 그랬나..”

 

철퍽거리는 소리와 함께단단한 땅이 느껴진다습한 공기와 퀴퀴한 곰팡내정말 이런 음침한 공간에 유물이 숨겨져 있는 건가포자에 뒤덮여 있지나 않았으면

 

“...드디어 왔구나너무 오랫동안 이 지루하고 음침한 동굴에 갇혀 있느라 미쳐버리는 줄 알았는데위대한 요툰께서 드디어 자비를 베풀어 주셨군.”

 

갑자기 온 사방의 등불에 불이 들어와한낮의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나는 듯했다자홍색 잔상이 눈에서 떠나갈 즈음에야제 눈앞에 놓인 옥좌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수수하지만 공들여 조각된 여러 상징그리고 무엇보다도사방에 몇 겹씩 덧칠된 고대 아카르 문자들비록 갈라져서 썩어가는 목각 인형 안에 갇혀 있지만그가 이 섬의 마지막 왕미시르라는 것은 분명했다불쌍하게도팔다리를 이루던 부부분들은 이미 포자로 뒤덮여 있었고이목구비조차 없는 낯은 고통스러운 듯 따다닥 소리는 내며 흔들렸다

 

잠깐어떻게 우리 말을 알죠당신은 지난 천년이나 이곳에 갇혀 있던 걸로 아는데요.”

 

인형은 목 부분의 관절을 똑딱거리는 것으로 웃음을 대신했다또도도독자기 전에 들으면 꽤 편안한 소리였다.

 

여기 갇혔다고 해서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를 줄 알았나내 몸을 잃은 뒤에도요툰께서 내려주신 천리안의 힘으로 지상의 일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지그런데 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지상이 좀처럼 보이질 않아무언가 반투명한 막으로 가로막힌 것 같은그런 느낌이라네.”

 

푸른 달 전쟁이라면 이미 700년도 더 된 일이에요당신이 섬기던 요툰은 패배해 구름 너머로 도망쳤고그 많던 신들도 대부분 힘을 잃거나 죽어버렸어요그 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도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요.”

 

요툰이 도망쳤다는 말에꽤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인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에게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 동굴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조각상에서 흘러나오던 물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흘러나와어느새 제 무릎까지 물이 차 있었다그를 이곳에 가둘 때다른 조력자가 이곳으로 들어와 그를 탈출시키지 못하도록 제단을 개조한 모양이다서둘러 동굴 안쪽으로 돌아가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내가 말해주는 걸 잊었군미안하네너무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이것저것 까먹는 게 많아져서 말이지혹시 저 구석에 자라난 버섯들을 좀 떼올 수 있겠나마력이 나오는 물건이나시체에 기생해서 남은 마력을 빨아먹으면서 살아가는 녀석들이지만아직 작동하는 물건이라면 어느 정도 기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네아주 잠깐이지만 말일세.”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곳곳이 갈라진 목 관절을 분리하고벽면에 붙은 버섯들을 떼어내 그의 머리에 붙였다어느새 더욱 불어난 물이 동굴 안까지 밀려 들어와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그의 머리를 배낭에 넣고 동굴 밖으로 빠져나간다다행히 부유 마법은 제대로 익혀 두었기에조각상이 있었던 높이까지는 어렵지 않게 도달했지만중간에 마법이 풀리는 바람에 아까 제단에 걸어둔 밧줄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떨어질 뻔했다.

 

괜찮아요?

 

좁고 답답하지만저 아래의 감옥만 할까어디든 좋으니 빨리 이 저주받은 곳에서 벗어나세.“

 

후들거리는 손으로 덩어리진 송진을 꺼내그 가루로 귀환의 표식을 그린다탁 트인 공간은 아니지만바닥이 열려 돌아가는 길이 끊어져 버린 탓에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그의 머리를 표식 안쪽에 세워두고중심에 선 다음 주문을 외운다따스한 빛이 우리를 감싸자그대로 눈을 감았다 뜬다등에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낯에 불어와 닿는 서늘한 바람아무래도 이번에는 집에 제대로 돌아온 모양이었다언제나 드는 생각이지만역시 집이 최고다미시르의 머리는내일 가져다주지 뭐어차피 이틀은 더 작동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