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자정을 지나기엔 한참이나 멀 때. 창밖에는 훨훨 눈밭이다. 앞 집 창문을 걸쳐 흘러 바닥으로 내리 사라지는 눈송이를 보며 1년만의 조우를 환영한다. 아마도 10년 전 오늘도 눈이 내리고 있었을 거다. 왜 그런지 묻는다면 그저 ‘감’이라고 밖에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감이라도 좋다라는 입 발린 말마따나 나 자신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자연스러워져 버린 것에, 내심 축포를 터트린다.


다만 그 나이가 이립(而立)이 가까워, 작은 눈천사를 그리고 싶다는 마음은 잠시 접어들고 지금 이 공간과 소리에 죽음을 덧씌워보며 은은한 눈송이의 빛에 감탄을 자아낼 뿐이다. 먹먹하고도 멀어져버린 소리에 울음이 나올 것만 같고, 공허한 기운만 웃돈다. 나는 왜 눈을 보고 있지? 눈은 내 인생에 몇 십 분을 낭비할 만큼 가치가 있는 법이었던가?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닌 얼음덩어리가 아닌가? 어느새 나는 눈덩이에 가치를 매기는 사람이 되어있던가? 그야 눈이라는 것도 만지고 느낄 수 있기에 숫자를 매길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건 29살의 나이에 홀로서 눈을 바라보는 거밖에 할 수 없는 한명의 사내가 하기에는 분에 차는 행동이다. 


‘언제부터 난 눈을 잊고 있었던 걸까.’


뻔하디 뻔한 문제 속에서 난 묻히고 빛을 잃고 썩어 문드러지던 나의 20대 시절을 떠올린다. 나의 20대는 평범한 사람의 전형을 여차 없이 드러내는 장이었다. 불행하다면 불행해보이고 행복하기엔 무언가 부족해보이기도한 삶. 꿈이 많았던 23살은 어느덧 30대라는 단어를 곱씹는다. 언젠가 저 눈을 원고지에 담아보기도 하고 음파 속에 묻어버리기도 하고 운문 속에 사뿐히 담아보기고 싶기라도 하는 듯 격렬하게 눈을 탐한다. 


‘언젠간 언젠간 저 눈을 내 걸로 만들어보자.’


호기로운 뜻을 표한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