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랍 속에는 여전히 단도가 들어 있다. 아직 쓰임새를 다하지 못한 듯이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항상 이 방안의 공기를 휘어잡고 있다.
세상은 참으로 무료하다. 하루를 기점으로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는 나의 세상은 참으로 무료하다. 아침이 되면 학교로 간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온다. 며칠도 아니고, 거진 두 달을 족히, 단순한 하루하루를 언제고 언제고 그저 버티고만 있었으니 상쾌한 아침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일탈을 꿈꿀 만한 용기도, 옆으로 당겨줄 친구도 없었던 나였기에 이런 나날의 반복에도 그저 묵묵히 치아를 맞대며 걸었으나, 이제는 일탈의 두려움이라는 공백보다도 더 거대한 굴레에 대한 분노가 쏟아져 내리고 있던 참이었다. 목요일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아무개와 만나고 싶었다. 바깥에 나왔을 때 느껴진 오한을 녹이기 위해 아무렇게나 달려, 시내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다만 이런다고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태양이 정상에서 뛰놀고 있는 시간에 나는 명쾌한 해답도 명료한 계산도 없이 그저 벤치에 멍하니 앉아서는, 잠들듯 정신을 놓아 버린 채로 있었다. 그러다 뭐 어쩌겠어, 하고 밝은 잠에서 깨어 돌아가려는 때에 시계는 단순명료한 백삼십 오 도를 이루어 있었다. 태양이 저문 달의 시간에, 내가 두 발을 되돌려 다시 허망한 굴레에 편승하려던 때에, 그렇게 내가 상상했던, 다만 진정으로 원했을지는 모르는 아무개가 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딱히요. 별로 할 게 없네요."
 "길을 잃었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물리적인 얘기는 아니에요."
 "…예?"
 "낮빛이 어둡습니다. 달빛에 비춰질 때면 사람의 안면이 더욱 확실히 보이죠. 너무 밝으면 도리어 모르겠어서,"
 "으음…"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봐요?"
 "뭐, 그렇죠. 다들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어투가 성급한 분이시군요.“

 그러고는, 다급히,

 "카페라도 갈까요? 아직 열어둔 곳을 압니다."
 "갑자기요?"
 "갑자기요."
 "예……?"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맞잡은 손을 잡아끌고 걷기 시작했다. 떠날 수 있는 때라면 바로 이때였을 것이나, 다만 나에게는 뿌리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기에 그저 무력히 끌려가는 것을 제외하곤 수가 없었다. 사실 힘이 있었다 해도 떠났을지 모르겠다. 수 분간 걸어 도착한 가게는 좁은 다방이었다. 수수한 나무색의 벽, 조금 짙은 상, 간결한 풍의 의자, 그리고 작동을 멈춘 기계. 전등은 켜 놓았지만, 점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커피 한 잔을 주문하기에는 늦은 시간인 듯했다. 그는 음료에 관련해서는 한 마디도 없이,

 "이제 못다 한 얘기라도 해 볼까요."
 "으음…"

 다시 말하지만, 나는 뿌리칠 만한 힘이 없었다. 실질적으로는 어느 쪽으로도 그랬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걸요."
 "그냥 힘든 일을 털어놓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힘든 일이라니요, 하하…"
 "…"
 "…"
 "…"
 "…"
 "커피나 타와야겠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실래요? 아, 커피 드십니까?"
 "아, 예."
 "그럼 두 잔 타야겠군요."

 그 말을 뒤로, 그는 똑똑히 주방을 향해 걸어, 소문을 열고 커피 가루 한 봉지를 꺼내 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생각이랄 것을 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가슴팍을 에어대는 달빛보다는 느지막이 비치던 주색의 전구가 더욱 따듯했기에 발을 쉬이 움직이려 하지 못했던가 싶었다. 물이 차츰 끓어오르며 일어내는 불규칙한 진동에 맞춰 부정확하게 박동하는 심장에 대고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노려봤다. 양철 주전자가 쇳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식은땀이 알싸한 내음과 함께 밀려나갔다. 생각해 보면 그 알싸한 내음은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엷은 탄내가 늙은 단내와 짙은 쓴내의 풍향에 올라타 부드러운 내음으로 변해 콧끝으로 스며 온다.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제서야 그자의 손에 들린 두 잔의 커피 중 하나를 그나마 자신 있게 받아들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커피를 마시기 힘들었던 이유는 다방이나 상대 따위가 이유이지는 않고, 그저 눈이 감겼어야 할 새벽에 뇌내에서 울리는 잔향을 있는 힘껏 밀어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덕에 학교는 아주 보기 좋게 늦었다. 금요일이었다. 이제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내게 선생이 꾸짖는 행위에 대해 철면피하는 것도 아니었고, 동급생들에게서 들려오는 세상살이에 대해 맞장구하는 것도 아니었고, 결국 새벽과는 반대로, 감기는 눈을 치켜뜨고선 앞을 주시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람은 사람에 대해 자신의 생각보다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자에게 별 일이라도 있다 싶을 뿐이지, 섣불리 다가올 사람이 딱히 없는 것이 그때에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뭐해? 일어나."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지니지는 않았을 테고, 야릇한 상황의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온다는 것 또한 보통과는 다른 경우였을 테니, 그에 대해 퉁명스레 밀쳐낸 내 행동은 여지없는 패착이라 부를 수 있었다. 첫 번째 탈선은 반 보만큼 내밀은 손을 누가 잡아끌어준 거지만, 두 번째 탈선은 쳇바퀴를 타인이 일부러 넘어뜨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도돌이표가 잘려 나간 시점에서 더 이상은 보편성을 가지고 행동할 법은 없게 되었다.

 "말로 하면 될 것이지 밀치는 건 뭐냐?"
 "시끄러…"
 "이놈 독종이네,"

 하고, 머리채가 잡혀 끌어올려진 것은 불과 몇 초 후의 일이었다. 흐릿한 시야에서는 이름표 따위의 가느다란 것은 보이지 않았고, 앞의 인물이 누구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나는 직감적으로 곧 다시 만날 사람이라는 것이 예상되었다.

 "졸린갑다, 그지? 하하."

 그러고서 그자는 한 움큼 움켜쥔 손을 도로 펴고선, 박수를 털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잿빛머리가 시야에 섣불리 반짝여 왔다. 나중에는 조금 달랐지만, 그때에는 내 머리채고 저 녀석이고 생각 따위랄 것을 하질 못했으니 회상할 만한 감정도 졸음에 씻겨버렸을 뿐이다.

 싸늘한 바람과 함께, 달이 차오른 밤빛이 내 눈을 아리따이 바라보는 중이었다. 토요일, 아니, 아직은 금요일이었다. 돌아온 뒤로 내리 몇 시간을 침대 위에서 죽은 채로 있었다. 세 시쯤에 조퇴신청서를 내었으니 여덟 시간을 조금 넘긴 것이다. 요새 여섯 시간 동안 잠을 청한 것도 손에 꼽는데, 카페인만으로 이런 효과가 있다면야 마약 따위는 손에 대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문을 여는 소리가 또렷이 들리운다. 그래, 이때까지는 토요일이었다.

 차오른 만월 아래를 내가 걷고 있는 까닭은, 하루와 하루 사이에서 만난 그 사람과 다시 한 번이라도 소매를 맞대기 위함이었다. 다만 이번에도 접촉의 주체는 상대에게 있다는 것이 그저 못내 아쉬웠다, 어디서 나타나 어디서 사라지는지조차도 모르니. 이번에는 돌바닥에서 할 얘기랄 것이 딱히 없었으니, 자연스레 어제, 또는 오늘이나 그제의 다방을 되만날 일도 당연지사, 그러고서 그가 뱉어낸 문장은,

 "힘든 일이 있습니까? 제가 물어볼 건 이것 하나뿐입니다. 다만 대답에 따라 다른 대답을 기대는 하고 있죠."
 "…"
 "…"
 "머리가 아프네요, 조금."

 거짓말은 아니었다. 머리채를 잡힌 것이 원인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이유로요?"
 "글쎄요, 머리채를 잡혀서 아닐까요."
 "누구한테, 잘못이라도 했나요?"
 "딱히요."
 "끌어당긴 사람은 누구죠?"
 "그러게요. 그런데 제가 왜 얘기를 했었죠? 기억이…"
 "털어놓으면 됩니다. 편한 일이예요."
 "…됐어요."
 "…"

 굳이 대답을 늘어놓은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애초에 없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특정되지 않는 답변만으로 대화를 끊어낸 셈이다, 그가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뇌리로 흘러들어온 한 단어에 나는 몸을 떨어대야만 했다.

 "가성고등학교."

 극한이 답습한다. 이리도 추위에 떨었던 날이 언제 있었던가? 걸음했던 것부터가 패착인 듯했다. 내 눈 앞에서 턱을 괴건 빙긋이 웃고만 있는 저자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파악할 길이 없다. 통로 또한 걸음할 길이 없다. 눈동자는 바삐 도망하지만 발끝은 석판에 붙은 듯이 무지근하다. 귀는 냉기에 에인 것처럼 세차게 아려 온다.

 "아니던가?"

 괜시리 두렵다.

 "맞나 보네."

 창은 언제고 닫혀 있었고, 이제야 나무가 옷을 고쳐 입는데, 이 오한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학년 ○반,"

 아니, 애초에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도란 있는 것인가? 이곳에서 탈락한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지?

 "저는 당신 이름도 알아요, ~씨."

 그 다음에는 심장을 속속들이 저당 잡혀 죽겠지. 퍼뜩 정신이 돌아온 것은 제 성명 석 자가 불리고 나서였다. 목줄이 매인 듯한 괴로움을 쓴맛에 태워 넘겨 간신히 숨을 고쳐 쉬고, 그럼에도 수십 초쯤 지나서야 입을 떼어낼 수 있었다.

 "뭐죠…"
 "뭐긴."
 "…"
 "질문을 바꿔 해 볼까요?"
 "…"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
 "그런 일변도는 섭섭한데."
 "…"
 "여기서 끝내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자문자답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여기서 도망치치 않은 이유라도 생각해볼까요?"
 "…있어요."
 "그래, 누구죠?"
 "딱히… 이름을 알진 못해요."
 "특징적인 인상착의는 없었나요?"
 "어, 어어… 머리카락이요, 회색의…"
 "예, 그쯤이면 되겠네요."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자리를 뒤로 밀었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인가, 다만 이제 쉬이 잘 만한 형편은 못 될 듯하다. 달은 서서히 저물어, 열두사흘 뒤에는 반달로까지 줄어 있겠지. 푸른빛을 내는 달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다 보면 커튼이 없다는 것이 후회스럽다, 오늘은 더욱이. 엔도르핀을 이렇게 얻기는 싫었는데, 이명이 한층 짙어진 향취를 갖고 다가온다. 이 향은 두려움인가? 아니면 절망인가? 안도감일까? 역함일까? 다만 온 세상은 무료함이다. 또한 나는 무지하다. 이것을 몰랐던 것이 한이다.

 습한 안구가 흉몽 위로 떠오른 때엔 태양이 밑으로 막 달리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꿈을 꾸지는 못했다, 차라리 꿈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으나. 차라리 나도 저 태양처럼 막 달아나라도 볼까?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쓸어버리고서야 눈이 뜨였다. 다만 울음의 이유는 모르겠어서, 나는 무지에 대해 우는 이유에 대한 무지에 대해 다시 우는 이유에 대한 무지에 또다시 나는 울고… 그렇게 다시 눈을 뜬 날엔 아직 토요일이었다.

 바깥에서는 곤충 따위의 지저귐이 들렸다. 벌써 귀뚜라미가 있었나?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딴 잡다하고 조잡한 상황에 대해 신경쓸 여유도 없다. 인상을 찌푸러트려대며 핸드폰을 무의식적으로 열어보았고, 그 속에는,

 ‘1통의 부재중 전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눈물을 흘릴 줄을 알게 되었다.

 자조적인 한탄을 내뱉는다. 이 숨은 어디서 있고 또 어디로 가는가, 나도 한 줌의 숨에 올라타 하늘로 날아갈까. 그러면 깃털이 빠진 날개는 심연으로 추락하리라, 그곳에서 무엇을 만날지 몰라 나는 화면이 띄운 번호로 돌려 걸었다.

 "일어났나 보네요."
 "…"
 "하지만 오늘은 아니예요, 준비되면 부르죠."

 두 줄을 끝으로 하고 전화는 부러 늘어 끊어진다. 이 늙은 소음은 누구의 것일지, 모르겠다. 이제는 두려움에 떨어야 할 시간이다. 일어난 것은 대략 유추할 수라도 있는 사실일 테지, 하지만 준비라 함은 무엇일까? 나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일까 싶었으나 그리 단순한 이유로 준비라는 말을 그리도 무지근하게 내뱉지는 않았으리라 느껴졌다. 부를 날은 언제일까, 오늘인가 또는 내일인가, 낮일까 혹은 밤일까, 어쩌면 이렇게 끝맺어 버린다는 가능성 또한 존재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얄궂게도 넘실대며 넘쳐오른 기울음 때문에 그 짧은 자문자답으로써 긍정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그렇게 한동안 처박혀 있던 깊은 수렁에서 깨어나, 본명이 불린 것은 월요일이었다. 요 대충 서른 시간 정도에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해내지를 못했다. 약에라도 취해 있던 걸까, 그리 중요한 시간은 아닌 듯했지만 말이다.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린 때부터야 기억한다.

 "이리로 오세요."

 뜻을 담은 말은 이것뿐이었다. 육하원칙이고 뭐고, 그딴 것은 더 이상은 내게 중요한 말이 되지 못했다. 이제 나는 언제나 자석과 무쇠가 이끌리듯이, 그자한테로 걸어가야 했다. 나를 무쇠로 만든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내는 그곳에서 나를 잠시간이나마 기다리는 참일 테지. 나는 짙어지는 우울감에 발맞추어 걷는다. 이 우울감은 어디서 왔을까.

 결국 도착한 그곳은, 두세 번 발을 들인 다방은 아니었다. 서늘히 붉은 벽돌로 켜켜이 쌓인 빌라, 백회색 조명이 어스러이 껌벅거리지마는 사람 냄새는 없이 두텁한 향만이 남아 있다. 사내는 가벼이 띤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들어갑시다."
 "…여긴…"
 "괜찮아요, 당신에게 위해는 없습니다."
 "…왜죠?"
 "무슨 말일까요."
 "왜 저인가요? 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하필 저인 이유가…"
 "이유는 따로 있지만, 그걸 얘기해주기에는 이르군요."

 그리고 다각대는 구둣굽 소리는 먹먹한 암적색의 빌라 내부로 걸음했다. 뒤를 따라 얌전한 발굽 소리도 들어간다. 신발을 신었던가 싶었다. 안에는 단층이 빼곡히 쌓여 있었고, 바깥에는 상뢰를 빼고선 적막뿐이 남았다. 문팎에 붙었던 침묵은 어떤 말을 담고 있었을까, 모르겠다. 유리문은 초라하게 닫혔고, 2층에는 두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왼쪽 문을 유유히 돌려 열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잰걸음을 하며 문지방을 밟았다.

 먹먹한 소리는 이곳에서 나고 있었다. 한 걸음씩 가까이 할수록, 저 먹먹한 소리가 무엇인지 곧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잿빛머리! 또래 한 명이 철제 의자에 묶여 있었다. 저것을 묶은 자는 응당 내 앞의 사내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데리고 온 거지? 그는 타인의 독백에는 신경 쓸 일이 없다는 듯이, 휘릭- 하고 돌아 나를 잠시간 바라보고는, 그러고는 나에게로 걸어와, 내 등을 떠밀며,

 "뭐가 보이죠?"

 방문 앞의 선반에는 단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 묶인 저것과 짧은 칼로 미루어 보건대, 저자는 공포에 질릴 이유가 충분했다. 나도 의자에 묶인 것만 같았지만, 나와 저자의 차이점은 밧줄을 잘라낼 수 있느냐 없느냐였을 터이다. 다만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손발이 녹아내려 운동하지를 못했다, 그것을 사내도 알고 있다는 듯이 직접 검은 손으로 단도를 집어서는 여린 손에 쥐어주었다.

 "뭐가, 보이죠?"

 귀축?

 사람?

 그런 생각 따위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때라도 손을 뿌리쳐 저 쇳덩이에 심장이 베이지 말았어야 했지, 그러나 손발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 반푼이었을 뿐. 본디 내리깔려야 할 눈동자는 눈물을 흘려대며 사람 앞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뒤에도 사람이 하나 있었지, 저 사람은 어떻지? 아아, 또다시 두렵다. 기껏해야 펜으로 검정색 한 획을 그었던 것이 전부였던 이 손이, 칼로 붉은색 수십 획을 휘갈겨야만 하는 것인가? 그러나 나의 절망은, 한 사람에게는 필요가치가 없는 휴짓조각이었고, 한 사람에게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으니 정신이 아득히, 깊은 나락을 향해 곤두박질치는가 싶었다. 하지만 높은 사내는 이 목석이 내심 못마땅했나 보다- 다리를 밀어 하루를 걸음하도록 시키고, 팔을 밀어 하루를 찔러내도록 시키고, 몸을 당겨 하루를 토해내도록 시켰으니,

 홍채가 선혈 한 방울만으로 짙게 물든 것은 진실이리라. 뵈는 것이 적색뿐이었던 지라, 나는 그 광경에 압도되어 지니고 있던 모든 육체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지, 아름답고도 추악한 세상이여! 나에게 주어진 시련은 고작 이런 것이었던가? 재빠른 결과만이 나에게 진정으로 답해주었고, 내가 시도할 수라도 있었던 갓은 두 눈을 감아버리는 것, 그뿐이었다.

 아마도 수 시간은 지났을까, 깊고도 얕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방안에 있었다. 내 앞에 있던 잿빛머리는? 신비한 수면향을 풍기며 적색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어제? 혹은 그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나는 여전히 꿈에 묻혀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이 꿈은 그다지 달콤쌉싸름하지는 않고, 밍밍한 냉국을 들이키는 듯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오묘한 맛이로다, 나는 이 꿈에서 깨어나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이 꿈에 갇힌 채로 잠들려 하지는 않아서, 나는 또다시, 한 번의 꿈에서 깨어났다.

 아니, 이건 꿈이 아니야. 내 앞에 놓인 그것은 꿈처럼 아주 달큰한 빨강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문을 열 수 있다. 이제는 그자도 보이지 않는 듯하고. 그리고 문을 연 순간에는 도로 나를 거대한 수렁으로 이끌 잿빛의 머리칼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좁은 틈새로 사내가 또렷이 걸어들어왔다. 이 두터운 향은 꿈이 아니었고, 눈앞에 놓인 사과 한 알, 아아! 나는 저곳으로 가야만 해, 그래. 동강난 심장은 바닥으로 힘없이 생을 떨군다. 현재에 갇힌 듯한 세 명, 나는 이제 과거를 필사적으로 밀어내야만 했다. 그래, 나는 하루아침에 연쇄도축사가 되어 있던 것이다… 연쇄도축사라니? 연쇄살인마겠지.

 사내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붉은 세 선을 보고 구역질을 해야 하나, 아니면 환호성을 질러야 하나? 너무도 이례적인 일을 마주하면 도리어 아무 감정도 들지를 않는 것이었구나. 참으로…

 무료하다. 이것이 맞는 걸까? 그 어느 감정도 없는 기계 의체 따위가 된 듯한 기분이다. 양철 나무꾼 흉내라도 내어야 할까? 무슨 일인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는 단도를 지어짐당했고, 그리고……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러 버린 거지?

 이제야 안구에 투명이 들어차 온다. 사내는 이것을 기다렸던 것인가, 신물이 입속에 가득 차 나는 눈알을 굴려대며 무색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들지를 못하겠다. 저자의 면면에 비친 감정은 무엇일지 부끄럽다. 그자는 나를 보았는지, 나는 그자를 보았는지, 내가 모든 것을 딛고 도로 발을 굴려 일으킨 시점에 그자는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내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 라이터도 있었다. 담배를 피우거나 한 적은 없는데, 조잡한 불씨가 주머니에 담겨진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하나의 짐승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흑갈색의 더벅머리, 격노와 후회로 가득찬 눈망울, 살점을 짓씹고 있는 입, 날카로이 세워진 귀, 이것은 영락없는 짐승의 몰골이다. 그리고…

 내 서랍 속에는 여전히 단도가 들어 있다. 아직 쓰임새를 다하지 못한 듯이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항상 이 방안의 공기를 휘어잡고 있다. 그리고 나는 피에서 나는 향기를 알고 있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