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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祖 때에 釗의 증손 註 032璉이 처음으로 사신 安東을 파견하여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치면서 아울러 國諱를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詔命으로 帝系의 이름 字를 그 나라에 내려 주고, 員外散騎侍郞 李敖를 파견하여 璉을 都篤遼海諸軍事 征東將軍註 033 領護東夷中郞將註 034 遼東郡開國公註 035 高句麗王에 拜授하였다.註 036
敖가 그들이 사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나라의 여러 곳을 방문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
“[高句麗는]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 떨어진 곳으로서, 동쪽으로는 栅城,註 037 남쪽으로는 小海에 이르고,註 038 북쪽은 예전의 부여에 이른다. 民戶의 수는 전 魏나라 때보다 3배가 많았다.註 039 그 나라는 동서가 2천여리이며 남북은 1천여리나 된다. 백성은 모두 토착민으로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하고, 삼베와 비단 및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土質이 척박하여 양잠과 농업으로는 자급하기에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 위서 고구려전

여기서 ‘[高句麗는]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 떨어진 곳으로서’ 라는 대목을 보면 요동이 어디를 기준으로 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중국 북위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도량형이 사용되었다.

북위전척 (398년 음력 8월에 제작, 북위 천흥 원년, 后魏前尺实比晋前尺一尺二寸七厘。后魏前尺比周一尺二寸七厘, (624년 이후, 이전에는 6척이 1보였음) 始定律令。以度田之制:五尺為步,步二百四十為畝)

0.27868m (약 27.88cm, 1尺 2寸 0分 7厘으로 계산할때, 수서 율력편의 기록, 23.1×1.207 = 27.8817cm) or 25.57cm (약 25.6cm, 1尺 1寸 0分 7厘으로 계산할때, 송서 율력편의 기록, 근래에 수서 율력편의 1尺 2寸 0分 7厘은 오기로 보는 주장이 정설이 되었다, 23.1×1.107=25.5717cm)

북위중척 (中尺实比晋前尺一尺二寸一分一厘。)

0.2796036m or 27.97cm

북위후척+북주옥척 (북(후)주시척, 后尺实比晋前尺一尺二寸八分一厘。即开皇官尺及后周市尺)

0.2957656m or 29.59cm (약 29.6cm)

中国歴史博物館에 소장된 북위 銅尺

30.9cm

중국 학계에서 보는 북위의 1리

418.5cm~419.61cm (북위 시대의 1척을 28cm로 설정하고 步를 5척으로 설정해 계산, 약 420cm이다)

486~504cm (수서 율력편의 북위 시대의 1척을 27~28cm로 설정하고 步를 6척으로 설정해 계산)

武德七年(624)始定律令,以度田之制五尺為步。

  • 舊唐書‧食貨志

“步”为古代旧制长度单位,举足两次为“步”。“唐武德七年(624)始以五尺为步,前此皆以六尺为步。”参见何炳棣:《北魏洛阳城郭规划》,《庆祝李济先生七十岁论文集》上册,清华学报社1965年版,第230页。其时之“一步”相当于今日之五尺,因此三百步即为一华里(500米)。参见赵福茹:《北魏洛阳里坊制度浅识》,洛阳市文物局、洛阳白马寺汉魏故城文物保管所编:《汉魏洛阳故城研究》,科学出版社2000年版,第528页。

하지만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 식화지에 의하면 중국 도량형의 역사에서 최초로 步를 5척으로 한것은 당나라 고조 무관 7년(624년) 이후이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의 척관법은 무조건 步를 6척으로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수서 율력편에 나오는 북위전척은 진전척(23.1cm)의 1척 2촌 0푼 7량(1.207배)로 계산해야한다 나오는데 송서 율력편에서는 진전척의 1척 1촌 0푼 7량(1.107배)로 계산해야한다 나오며 근래에 중국 계량사학계에선 수서 율력편의 북위전척의 기록을 오기로 보는 것이 공통 인식이다.

위서 고구려전의 이오가 고구려를 방문한 시기는 435년이고 북위가 북위전척을 만든 시기는 서기 398년 음력 8월이므로 북위전척을 기준으로 리(里)를 계산하는 것이 맞다.

北魏時一里三百步,故「方三百步」恰恰是一方里。

즉, 진전척(23.1cm) x 1.107 = 25.57cm가 북위전척임을 알 수 있고 25.57cm 의 6배인 153.42cm가 북위전척이 사용되던 시기의 1步임을 알 수 있고 북위 시기에는 300보를 1리라고 하였으므로 여기에 300을 곱하면 460.26m가 되는데 이것이 북위전척이 사용되던 시기의 1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요동성을 기준으로 이를 계산하면 국내성까지 550리 안팎밖에 안되고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까지는 730~750리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 북연~북위 시기에는 요동이라 불리는 지역이 2개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요동성(원래 한나라 양평군)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학계에선 랴오닝성 이셴과 베이파오시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면서 위치 미상으로 파악하지만 중국 학계에선 랴오닝성 베이전시 일대로 확정시하는 요서 지역의 영주 요동군의 치소 고도성이다.

고도성이 위치하였던 베이전시를 기준으로 측정하면 국내성까지는 800리 안팎이고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까지는 1천여리가 된다.

이를 보면 북위의 사신 이오가 서기 435년에 고구려를 방문했을때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