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항 일행의 표류와 조선 귀환 경로


제모곡 인근의 아이누가 거주하는 어느 한 섬


사람 사는 집은 없고, 다만 산기슭 밑에 임시로 지어 놓은 초가 20여 채가 보일 뿐이었다. 가서 그 집들을 보니, 집 안에는 무수한 고기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고기는 거의 대구ㆍ청어였고, 이름도 알 수 없는 기타 잡어는 건포를 만들려고 많이 매달아 놓았다.

곧 배를 이동시켜 나아가면서 멀리서 바라보니, 과연 7~8채의 인가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소금 고는 사람들의 소금 고는 곳과 매우 비슷하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모두 누른 옷을 입었고, 검푸른 머리칼에 긴 수염에다가 얼굴은 검었다. 그들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로 일본인들은 아니고, 끝내 무엇들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들 중의 늙은 몇 사람은 몸에 검은 털가죽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서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하였는데, 일본어와는 아주 달랐다.

그들의 연장을 살펴보니, 별로 창검이나 예리한 칼 같은 것은 없고, 다만 조그마한 칼 한 자루만을 차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염막과 같고, 은밀한 곳이란 없었다. 그들이 저장하고 있는 물건은 말린 물고기, 익힌 복어, 유피의 옷들에 불과했고, 그 밖의 연장으로는 낫, 도끼, 반 발-1발은 양팔을 벌린 길이 정도의 크기로 된 나무활, 사슴의 뿔로 만든 화살촉을 단 한 자 정도 길이의 나무화살 등뿐이었다.

그들의 집 앞에는 횃대를 무수히 만들어 놓아 물고기를 숲처럼 걸어 놓았고, 고래의 포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남녀가 혹은 나무 껍질로 짠 누른 베의 긴 옷을 입었고, 혹은 곰 가죽과 여우 가죽 또는 담비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입었다. 그들의 머리털은 겨우 한 치 남짓하였고, 수염은 다 매었는데, 혹은 한 자 혹은 한 발이나 되었다. 귀에는 큰 은고리를 달았고, 몸에는 검은 털이 나 있었다. 눈자위는 모두 희고, 남녀가 신과 버선을 신지 않고 있었다. 

형용은 남녀가 모두 같았는데, 여자는 수염이 없어서 이것으로 남녀를 분별할 뿐이었다. 60세 가량의 늙은이가 목에다 푸른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풀기를 청하여 그것을 보니, 수염이 매우 길어서 귀찮아, 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다 수염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손으로 수염을 잡아 재니, 한 발 반 남짓이나 되었다. 

날이 저무니, 그들은 또 어탕 한 그릇과 고래 포 몇 조각을 주는 것 외에는 끝내 밥을 짓는 거동이 없었다. 집집마다 가서 밥을 짓는가를 알아 보았더니, 모두 밥을 짓지 않고, 다만 어탕에다 물고기의 기름을 섞어서 먹고 있어서, 그들이 본시 밥을 지어 먹지 않는 자들임을 알았다.


제모곡


일시에 배를 저어, 한 작은 바다를 건너가 정박하였더니, 거기도 역시 그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을 가리키며 땅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다만 제모곡이라 하였다.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시늉을 하니, 그들은 또 작은 그릇에 담은 어탕을 줄 뿐이었다.


점모곡


순풍을 타고 30여 리를 옮아 가, 어느 한 곳에 정박했는데,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땅 이름을 물으니 점모곡이라 하였다. 그들의 말은 이같았으나, 그들이 무슨 말로 알아듣고 대답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대구와 청어를 달라고 청했더니, 삶아 먹도록 많이 주었다. 그곳에는 벚나무 껍질이 많이 있어서, 그것으로 횃불로 사용하니, 불꽃이 아주 밝았다. 

산모퉁이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동남간에 긴 육지가 있는데 산이 창공에 솟아 있어, 그 지세는 큰 육지같이 보였다. 그곳을 가리켜 물었더니, 다만 지곡이라고만 했다. 거리를 가늠해 보니, 불과 30여 리밖에 되지 않았다.


소유아


그곳에 배를 대니, 역시 앞에 나온 무리들과 같아서 그들의 언어를 알 수 있는 방도가 없고, 다만 물고기만 먹는 것이었다. 지명을 물으니, 소유아라고 하였다.

시장기가 아주 심하여 걸음을 걸을 수가 없어서 곳곳에서 앉아 쉬었다. 마침 길가에 집 한 채가 있고, 연기가 많이 피어 올랐다. 그 집을 찾아 들어가 보니, 솥을 걸어 놓고 불을 때는데, 마치 죽을 쑤는 것 같았다. 솥 안의 것을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이 먹는 수제비 같았다. 입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좀 달라고 청했더니, 한 그릇을 주었다. 받아 먹어보니, 맛은 의이-율무, 식용 또는 약용으로 포아풀과에 속하는 1년초 같았는데, 곡식 가루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먹어도 쓰지 않았고 배부르고 속이 편안했다. 원 모양을 구해 보니, 과연 풀뿌리인데, 형체가 어린애의 주먹같이 생겼고, 색은 희고 잎은 파랗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풀로, 잎은 파초잎과 비슷하고, 뿌리는 무와 비슷했으며, 별로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풀의 이름을 물으니, 요로화나라 했다. 곧 선인을 불러 그 풀뿌리를 보이고, 또 공중철을 불러 죽의 맛을 말해 주고, 한 그릇을 얻어서 두 사람에게 먹였더니, 모두 속이 편하고 배부르다고 말하였다. 다른 선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얻어먹고자 했다.

나는 언덕 위로 올라가, 두루 다니며 구경을 해보니, 평원과 광야는 옥토 아님이 없었고, 흐르는 냇물, 두터운 둑이 다 논으로 만들 수가 있었는데, 한 자도 갈지 않았다. 면죽이 우거지고 갖가지 풀과 큰 나무 숲에 살쾡이ㆍ수달ㆍ담비ㆍ토끼ㆍ여우ㆍ곰 등의 짐승이 무수히 있었다. 

육지에는 길이라곤 없고, 또 죽은 사람을 묻은 묘도 없었다. 5월인데도 산 중턱 위에는 눈이 녹지 않았으니,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또 어떤 곳에 이르니, 마침 날씨는 바람이 불고 추웠는데, 하나는 곰 가죽의 털옷을 입었고, 하나는 여우 가죽을 입었으며, 둘은 담비 가죽의 털옷을 입은 네 사람이 바다와 하수가 통하는 어구에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물은 7~8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실로 짠 것이 아니라, 나무 껍질의 실로 짠 것이었다. 잡은 고기는, 송어와 그 외 이름 모를 잡어가 무수했다. 

내가 잡아 놓은 물고기를 보고 부러워하며 만지니, 그중에서 한 자가 넘는 송어 20여 마리를 내 앞에 던지고는 가져가라고 가리켰다. 

또 담비 가죽의 옷을 입은 자가 내 앞으로 다가서서 내가 입고 있는 남빛 명주의 유의를 가리키고, 제가 입고 있는 담비 가죽 옷을 벗어서는, 번갈아 가리키며 지껄이는데, 바꾸어 입자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바꾸고자 하는 것인줄 알고는 즉시 허락하여 옷을 벗어 주고 바꾸었는데, 그가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도 좀 낫다고 보이는 한 사람을 데리고 선두로 나가서 배를 가리키고 사방을 향해서 돌아갈 길을 애써 물었더니, 내 면전에 같이 서서 손으로 남쪽을 가리키고 입으로 바람을 내는 모양을 지으면서 ‘마즈마이……’라 말하였다.


소유아 이남 아이누 거주 지역들


배 댈 곳이면 정박하여 상륙을 했다. 인가를 찾아 들어가 보면 다 역시 그들 무리였다. 하루도 머무름이 없이 장장 10일을 가, 약 천여 리까지 갔는데도 끝내 그들 무리만이 있었다. 실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방책을 물을 길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시 남쪽을 향해 7일을 갔지만 역시 그 무리들과 같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당도한 곳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을 데리고 배 있는 데로 끌고 가서, 배를 가리키며 전과 같이 물었더니, 또 남쪽을 향해 가리키면서 ‘마즈마이’라고 할 뿐이었다. 여전히 동쪽의 육지를 따라 남쪽을 향해서 육지가 끊어질 때까지 갈 생각으로 갔다.


계서우


계속 남쪽을 향하여 가다가 4일이 되던 날, 해안의 높은 곳에서 갑자기 손을 흔들며 부르는 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모습은 전의 무리들과 아주 같지 않았다. 즉시 돛을 내리고 앞으로 가 보니, 일본인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남촌부의 왜인들이었고, 금을 캐려고 그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가옥을 크게 짓고, 50여 명의 왜인을 거느리고, 거기서 앞으로 며칠 가야 하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중의 장왜는,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근방에 표류하여 굶주리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기에, 그들을 보내어 찾아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50여 리를 가니, 날이 저물어 포구에 정박했다. 거기에는 인가 일곱 채가 시냇가에 벌여 있었다. 배에서 내려 왜인들과 같이 그 무리들의 집에서 잤다. 나는 조용히 김백선을 시켜서 그 국명과 지명을 상세히 묻게 했더니 그가 말하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종이에 붓으로 일본 글자로 써서 묻게 했더니, 국명은 '하이'이고, 지명은 ‘계서우’라고 했다.
우리는 5월 초 9일부터 밥을 먹지 못했다가, 29일에서야 비로소 밥맛을 보았으니, 배가 고파도 밥을 맛보지 못하기를 28일까지 한 것이다.


계서우에서 떨어진 일본인 마을


아침, 새벽에 발선했다. 약 70~80리쯤 가니, 해안에 초가가 많이 있었다. 포구에 정박하니, 시내가 계서우에서와 같이 흐르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 들어가니, 30여 칸의 초가에는 각각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의복과 기명, 기타 집물을 늘어놓은 모양은 부산의 관왜의 거처와 같았다. 그중의 우두머리 왜인 한 사람이 맞아들여 대좌하고서는, 생선과 술로 대접을 잘하였다. 속으로 기뻐하고 이제는 살 길을 얻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 왜인이 한 장의 글을 써 보이기를,
“나는 송전 봉행의 사람으로 이름을 신곡 십랑병위라 합니다. 모집한 군인을 이끌고 송전 태수의 명을 받아, 여기에 집을 짓고 머물면서 금을 캐고 있은 지 이미 1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혹 3년 만에 한 번씩 송전부에 세금으로 황금 50냥을 바칩니다.”

십랑병위는 그 타고 온 배를 정돈시키고 무전대병위ㆍ선대 육우위문ㆍ추전 희좌위문 등의 왜인을 거느리고 나섰다. 그들 중에는 고산간병위라는 자도 있었으니, 하이어의 통사였다.


일본인 마을에서 떨어진 아이누 마을들


낮에 순풍을 만나면, 해안을 따라 항해하고, 만일 순풍을 만나지 못하면 포구에 배를 정박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박하는 곳에 비록 인가가 있기는 하였지만, 모두 하이의 무리들이어서 그 집의 습기와 몰려드는 벼룩 때문에 배 위만 못하였다.


예사치


송전부의 북쪽 백여 리 밖에 도달했다. 지명은 ‘예사치’라 했다. 그곳 큰 마을 중에는 수변장 한 사람이 있는데, 큰 관사를 짓고 호위병에 둘러싸여 존중을 받았다. 백성이 5백여 호 거주하는데, 시장에는 물산을 벌여 놓았고 남녀의 의복은 극히 화려하고 묘했으며, 인물들은 영리하고 여자들은 아름다웠다. 구경꾼들이 양쪽 길가에 늘어서 있었는데, 그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서 다 좋아했다. 변장은 풍성하게 차려 놓고 나를 맞아 공손히 절하였다. 그와 마주앉아 음식과 기이한 찬을 시회의 소반에다 낭자하게 벌여 놓고 화자배로 제백주를 잔질하며 무수히 마셨다.
김백선과 다른 선인들을 밖의 대청에 따로 앉게 하고, 딴 사람으로 하여금 대접하게 하였다. 그곳에 사흘을 머물렀는데, 대접하는 음식은 대단히 풍성하고 좋았다.

나만은 가마를 태웠는데, 산이 높고 마을은 깊으며 초목이 우거지고, 길이 아주 험악했다.


마쓰마에에서 떨어진 어느 마을


유시쯤에, 송전까지 70리쯤 되는 데에 도착해서, 어느 마을의 집을 숙소로 정했다.


송전-마쓰마에


새벽에 다시 송전을 향하여 송전까지 10리쯤 되는 데서, 말을 끌고 인가로 들어가니, 약간의 술과 밥을 들여왔다. 그 뒤에, 나는 의관을 단정히 하고 부중으로 들어가는 중, 날이 이미 저물었다. 도중에 거느리고 오는 봉행 왜인에게 여러 번 글을 전하여 심히 부산을 떠는 것 같았는데, 어째서 그러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5리쯤 가니, 여러 사람들이 호위하고 촛불을 환하게 밝혔다. 성 밖에 이르자, 봉행왜 10여 인이 하인들을 많이 거느리고 좌우에 두 줄로 행렬을 지었는데,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창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맞이하여 읍하며 계속 호위하여 부중의 공사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잔치 자리를 풍성하게 차려 놓고, 호위하고 왔던 봉행 등이 영접해서 동편의 자리에 따로 앉혔고 저네들은 서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밖의 대청에 자리 잡게 했다.

봉행 왜인들 중에 한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태수 앞으로 들어가더니, 여러 왜인들이 일시에 우리를 보호하며 숙소로 갔다. 그리고는, 큰 판자로 만들어진 담에 붙은 외문에, 하왜 세 사람을 정해서 지키게 하고, 내문에는 파수 보는 두왜 두 사람을 지키게 해서 3일마다 교대케 하였다. 어지러이 차린 상에 술과 국수 등을 후하게 대접받고 파했다.

숙소로 올 적에 봉행 왜인 등이 앞에 서서 인도하여 돌아왔다. 비록 노상에는 구경꾼들이 많았지만, 조금도 떠들지 않았다. 송전 태수의 시위의 융성함과 고을 안의 인물 및 시전 물산의 풍성함은 우리나라 주부보다 백 배나 더하였으니, 그 직을 대대로 물려주기 때문에 이같이 성한 것이나 아닌가?

태수는 시사-시를 짓게 하는 사상ㆍ감정, 또는 시를 짓는 태도 를 제법 즐기고, 또 회화를 좋아해서 그 자신도 그림을 잘 그리며, 항상 강호에서 온 중 서류라는 이와 시와 그림 논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숙식도 같이 한다 하였다.

강호의 관백으로부터 육로로 데리고 오라는 통보가 8월 26일에 왔다.


마쓰마에에서 에도까지의 고을들


선창에서 배에 올라 돛을 가득 올려 달고서, 한 작은 바다를 나는 듯이 건너 갔는데, 그곳은 진경군이었다. 바닷가에 있는 마을에서 숙박했는데, 그 군에서 출참하여 후하게 대접하였다.

아침에, 데리러 온 송전부의 다섯 봉행이 가마를 정돈해 들여와서 내게 타라 하고 사람들에게 메게 했다. 곳곳의 지경에서 정연하게 기다렸다. 길을 안내하는 나장이 6명, 심부름하는 사환이 무수히 따르고 있어, 마치 우리나라의 별성행차와도 같았다.

우리가 지낸 길의 각 고을은 진경군ㆍ남부현ㆍ선대부ㆍ오주ㆍ목신우군 등 다섯 고을이었다. 각 고을은 북쪽 성문에서 남쪽 문까지 혹은 20여 리가 되고, 혹은 30리나 되며, 사람과 물산의 많음은 우리나라 서울보다 배나 되었다. 각 고을의 지경을 6~7일을 지나야 했는데, 각 고을을 지낸 날을 계산해 보니, 27일간의 일정이었다.


도호쿠 지역의 번화한 고을들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지나간 게 아쉬운 듯


그리고


나는 글로 써서 대답하기를,
“처음 정박했던 곳은, 산이 높이 솟아 하늘에 닿는 듯하고, 바다를 자꾸 건너도 독산만이 해중에 솟아 있었는데, 그 끝은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곳의 사람은 제모곡이라 했습니다.”
하였다. 제모곡이라는 지명을 김백선으로 하여금 직접 발음해서 들려 주었더니, 그 왜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치하하기를,
“하이의 지경입니다. 여기서 2천여 리나 떨어져 있고, 송전에서는 합계 3천 6백 리나 됩니다. 이 나라는 사방이 다 바다이고, 우리나라의 아주 먼 북방의 지역입니다. 해포가 서로 이어져 있고, 땅의 넓이는 어느 곳은 4백여 리가 되고, 어느 곳은 7백여 리가 됩니다. 길이는 3천 7백~3천 8백 리나, 혹 4천여 리도 됩니다.

당신께서 처음 정박했던 곳의 외방에 별도로 갈악도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 땅인지 모르지만, 그곳의 사람은 키가 8~9척이나 되고, 얼굴ㆍ눈ㆍ입ㆍ코가 모두 하이족과 같고, 모발은 길지 않고 그 색깔은 다 붉으며, 창으로 찌르기를 잘 합니다. 혹간 하이족이나 일본인이 그곳으로 표류를 하면, 다 죽여 그 고기를 먹는다고 가끔 살아 도망쳐 온 자들이 전해 줍니다. 만일 며칠만 더 표류했더라면, 더욱 무섭고 위험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를 면했으니 이 또한 하늘이 도운 것이어서, 그대는 꼭 장수할 분입니다.”


홋카이도의 일본인과 이지항이 나눈 대화에서 갈악도와 그곳에 사는 아이누인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갈악도가 사할린 섬이고

섬의 원주민들은 사할린 아이누일 수도 있을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