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현충일날에 블로그에 썻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여기에 글올립니다.

오늘 현충일입니다. 6.25전쟁때 대한민국을 지키다 순국하신 순국선열들을 애도하기 위해 만든 공휴일로 알려져있습니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정확하게는 1014년 현종대왕님께서 2차 여요전쟁때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들의 유골을 집으로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렇게 망종 즈음에 전몰자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던 전통을 고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전 현종대왕님께서는 동아시아 깡패였던 거란의 3차 침입을 받았습니다. 철저하게 대비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거란 최고의 명장이었던 소배압은 예상을 깨고 병자호란의 청나라처럼 수도로 스트레이트 진격했었습니다. 전군을 국경으로 보낸 상황에서 수도의 몇 천명의 병사로 중국 통일왕조 송나라를 패배시켰던 거란의 최정예병단 우피실리군이 포함된 10만 기병대를 홀로 맞서게 된 대량원군 왕순 현종대왕님께서는 2차 여요전쟁때 죽었던 백성들과 병사들이 생각나셨을 겁니다. 고생길이었던 몽진에서 수도 개경에 돌아와보니 길거리에 널려있는 죽은 고려의 백성들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유골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현충일을 지정했습니다. 현종대왕님께서는 그때와 같은 참혹한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셨을겁니다. 그래서 목숨을 잃고 고려의 종묘사직이 끝날지라도 갑옷을 입고 칼을 차며 개경에서 항전할 것을 천명하셨습니다. 고려의 온 백성들은 현종의 뜻을 듣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결사항전을 다짐하였고 백전노장의 소배압과 거란군은 당황했습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촉나라의 유선처럼 항복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수도 개경의 성곽은 아주 견고해졌고 지키는 고려병사들의 눈은 황산벌의 백제군처럼 투지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거란군은 수도로 오긴했는데 말그대로 진격만 한거라 진격하는 도중에 말이 지쳐쓰러질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고 보급을 제대로 못 받아 비틀거렸습니다 더구나 국경지대의 고려군이 수도로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서 포위섬멸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회군한다고 뻥치고 300명의 정찰병을 수도에 몰래 파견해 성문을 열게하는 트로이 목마와 같은 기묘한 계책을 세우지만 고려의 헥토르셨던 현종대왕님께서는 그것을 간파하고 친위대 100명을 동원하여 금교역에서 거란의 300정찰병을 박살내었습니다. 이것이 고려의 운명을 바꾸었던 금교역 전투 입니다 결국 거란 최고의 명장 소배압은 퇴각을 결정합니다 당시 거란군이 퇴각하자 개경의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면서 개경의 수호신이자 고려의 헥토르였던 현종대왕님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경에는 송악산의 산신이 밤에 수만 그루의 소나무로 변해 사람 소리를 내자 거란군이 개경의 병력이 많은 줄 알고 퇴각해 버렸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하고요. 이후는 잘알려진 것과 같이 강감찬 장군님의 귀주대첩으로 거란군을 박살내버립니다. 귀주 대첩은 현종 10년(1019년) 2월 1일에 있었고, 고려군의 승리를 이끈 강감찬의 개선 행렬은 2월 5일에 현종대왕 본인이 직접 나와 영접하셨습니다. 1019년 2월 5일, 현종대왕님께서는 직접 영파역까지 나아가 강감찬장군님을 맞이하였고 전하는 글에 의하면, 이때 임시로 지은 누각에 현종대왕님은 친히 올라 주연을 베풀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8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직접 꽂아주었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파역을 흥의역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종대왕님은 강감찬을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과 식읍 3백호에 봉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내렸습니다. 이후 현종대왕님은 11년(1020년) 2월에 이작인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냈고 거란에게 예전처럼 사대의 예를 다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전쟁을 끝내셨습니다. 이렇게 천년 전 국가와 백성을 사랑하셨던 현종대왕님의 희생과 노력이 있으셨기에 오늘 날의 저와 가족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현충일이 존재하여 나라를 지켰던 애국자들을 위로하는 날이 존재하지않겠습니까? 오늘 하루 현종대왕님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