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쌔액거리는 소리와 함께, 번역기는 전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말투로 그녀의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민재를 믿어야 할 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알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민재라는 사실."

 

 리돌이 지금까지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 이 아이가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처음 지구에 왔을 때 지구인 모두가 그녀를 정신병자로 오해하여 백안시하였다. 그러다가 유일하게 구원의 손길을 준 사람이 나였던 것이다. 그 사실에 나를 같이 살 사람으로 결정하였지만, 실상 마음 속에 있던 경계의 벽은 여전히 놔 둘 수밖에는 없었다. 이 곳은 다른 행성이고, 그녀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수 밖에는 없었으니까. 그러다 지금 내가 한 이야기에, 그녀의 마음이 열려 버린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 든다. 확신이 아닌 유추인 까닭은, 내가 뭐라고 남의 마음을 단정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저놈의 번역기에 대한 확신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허, 참. 물론 고마운 이야기이긴 한데, 이 상황은 지금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노래방에서 한 곡 끝났을 때 나오던 멘트가 생각난다. '이 분위기 그대로...' 그래. 일단은 그녀와 분위기를 맞추어 보자. 나는 한쪽 팔을 내려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래. 그래. 넌 나만 믿으면 돼." 

 

 너무 무책임한 말을 직통으로 내뱉은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든다. 보통 이런 얘기는 순정만화 같은 곳에서 꽃미남 주인공들이 하거나, 아니면 공포영화에서 죽을 애들이 내뱉은 대사인데. 둘 다 나하고는 그렇게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 뭐 남자라면 이럴 때 멋있는 대사 하나 쯤은 날려 보고 싶을 때가 있잖아? 그런데, 나 스스로는 멋쩍기가 그지없는데, 이 녀석한테는 제대로 먹힌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리돌은 갑자기 어떤 스위치가 들어간 듯, 눈빛이 확 달라지더니, 갑자기 내 허리를 잡은 채로 나를 돌려 침대로 던져 버렸다. 흐억?!

 

 "민재."

 

 나는 침대에 걸려 누워 버렸고,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내 앞에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 단 한 단어를 불렀다. 그렇다. 떨리는 목소리, 번역기를 거치지 않은 순수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다. 갑자기 내 가슴도 같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심장박동 소리가 그대로 내 귀에 전해질 정도로.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문 두드리는 소리도. 쾅쾅쾅! 쾅쾅쾅!

 

 외부의 자극에 리돌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려고 했는지 이제야 눈치챈 양, 새빨개진 얼굴을 붙잡고서는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고, 나는 심란하게 문을 열러 갔다. 갑자기 확 짜증이 나네?! 도대체 어떤 놈이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집 문을 두들기는 거야?! 택배 시킨 것도 없는데! 

 

 "아, 누구세요!"

 

 그 곳에는, 어제 계단에서 보았던 엄청난 금발미인이 서 있었다. 그런데 복장이... 무척이나 파격적이다. 머리는 완전 산발을 해서, 끈으로 연결된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 재질이 너무 얇다. 안쪽이 막 비친다. 눈 둘 데가 마땅치가 않다. 아무래도 잠옷을 그대로 입고 나온 것 같다. 그리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거의 아래쪽이 찢어져 너덜너덜하다. 허벅지는 거의 다 보이고, 옆구리 쪽은 아예 뻥 뚫려 조금만 바람에 나풀거리면 배 안쪽이 다 보이게 생겼다. 
 뭐지?  호랑이한테 쫓겼나?
 무엇보다 이 아가씨, 무언가를 엄청나게 갈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두 손을 맞붙잡고서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내 반바지의 고무줄 아랫 부위와 내 얼굴을 계속해서 오르락 내리락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처음 보았을 때  섹시함이 철철 넘친다고 느끼기는 했다. 그런데, 이건 지금 색기가 넘치다 못해... 미쳐 버린 것 같다.

 

 "저기... 부탁이, 있어요..."

 

  말투도 눈빛마냥 느물느물하고 농염하다. 왠지 이런 일을 어디선가 겪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일단 내 기억은 기억이고, 지금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 아가씨가 부탁할만한 일이 도대체 뭐가 있지?

 

 "뭔데요. 무슨 부탁?"

 

 "바지..."

 

 "네?"

 

 ".. 바지를 벗어 주지 않을래요...? 그 안쪽에, 시켜볼게 있어요..."

 

 이게 무슨 개소리? 지금 뭘 해달라고?! 나는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 문을 닫기 위해서 바깥쪽으로 손을 뻗었으.... 나, 그녀는 양 손으로 나의 손을 저지했다. 정확하게는, 문으로 가는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쪽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다!

 

 "어제부터... 쭈욱... 더는 참을 수 없어요, 민재 씨..." 

 

 "으아아 무슨 소리 하시는 거에요, 지금! 어제는 또 뭐고, 제 이름은 어떻게 압니까!"

 

 어제라고 해봤자 계단에서 만난게 전부잖아! 그리고,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야. 혹시 스토커?!

 

 "어제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이 중요한 거지..."

 

 1초 전에 한 이야기는 그냥 없는 이야기 같은 거냐! 이런 미인이, 나를 이렇게 유혹한다면 물론 나야 두 손 들고 환영이기는 하지만, 머리꼬리 다 잘라먹고 일단 하자 라고 말하면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지 누가 듣겠냐! 무엇보다, 지금 뒤에는 리돌이 있다고! 

 

 "아, 안에 사람 있어요! 다른 사람 있다구요!"

 

 "그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건, 지금 여기 있는... 당신과... 나."

 

 안되겠어. 완전히 막무가내다. 지금 이 아가씨의 분위기대로라면, 나는 같이 사는 여자애가 있는 방 안에서 라이브로 야구동영상을 찍게 생겼어! 으아아, 살려줘! 

 그 때, 영웅은 언제나 가장 급박한 상황에서 등장한다고 하였나. 내 손이 그녀의 살결에 닿기 직전, 머리 위로 날아드는 무언가가 눈에 보였다. 

 저것은... 프라이팬? 

 나중에 버리려고 베란다 바깥쪽에 내놓았던 무쇠 프라이팬이었다. 
 저게 왜 갑자기 집 안에서 나와? 

 

 여하간 프라이팬 비행물체는 내 뒤에서, 그대로 문밖으로 나가, 그대로 누군가의 손에 잡혀 백주대낮 성추행 미수범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깡!

 

 "역시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했군요." 

 

 힘없이 허물어지는 그 여자의 뒤에선, 캐롤라인이 왼손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오른손에 든 프라이팬을 옥상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 한 마리의 야생마같았던 아가씨는 눈을 까뒤집은 채 내 방 문틀에 기대어 널부러졌고,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새 리돌은 불안한 눈빛으로 내 옆에 서 있었다. 

 캐롤라인은 문지방에 걸려 있는 저 아가씨가 문을 여닫는 데 걸리적거린다고 판단한 듯, 양 손을 겨드랑이 아래 넣고 들어 아가씨를 질질 끌어서... 옥상 바닥에 내팽개쳤다. 거의 옷이 없다시피 한데, 저래도 되는 거야? 캐롤라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신발을 벗고 들어와 대문을 닫을 뿐이었다.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나를 대신해서, 리돌은 내 앞으로 밥상을 깔고서는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캐롤라인은 자연스럽게 그 앞으로 착석하였다.

 잠깐 시간이 지나자 좀 제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일단 지금 가장 궁금한 사항부터 물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관계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저 아가씨 누군지 아세요?"

 

 캐롤라인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대답하였다.

 

 "원래는 정식으로 소개를 드리려고 하였으나,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군요. 지금 저기 밖에 있는 분은 민재 씨 아래층에 살고 있는 김성희 양이라고 합니다. 저와는 원래 알고 있는 사이였고, 방금 말씀 드린대로 오늘 같이 소개를 시켜 드리기 위해서 같이 방문하려 하였으나, 아래층에 가 보니 집 문이 열려있는 채로 있고, 집 안은 비어 있더군요. 그래서 올라와 보았더니, 뭐, 결과는 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역시 아는 사람이었구만. 분명히 캐롤라인이 알고 있는 사람이니 정상은 아닐 것이다. 방금 똑똑히 보았지, 어떤 사람인지.

 

 "아시는 분이면... 저 분 원래 저런 사람인가요? 다른 사람 눈 전혀 신경 안 쓰는 그런...?"

 

 "발정기라 그렇습니다."

 

 "네?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진담입니다."

 

 그러니까... 갈 곳 잃은 고양이에 이어서 다음에 소개시켜 줄 사람은 발정기가 있는 사람이란 말이지, 지금? 이 아줌마 막말하는 버릇은 나중에 좀 얘기를 해야 겠다. 그리고 그 여파로 다시 한 번 나의 어이없음은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경험치는 이 정도의 자극으로는 눈썹 하나 꿈쩍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보다, 지금 이런 상황은 어디선가 분명히 겪은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도대체 어디서?!

 캐롤라인은 원래 그러했던 것 처럼, 내 반응이 어이없거나 말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쭉 이어가고 있었다. 

 

 "저런 상태가 얼마 가지는 않습니다. 일단 저렇게 기절한 상태로 조금 더 두면 아마 정상적으로 일어날 겁니다. 발정기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부정기적으로 오는 발작과 같은 증상이기 때문에, 언제가 다음 차례가 될지는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마치 의사같은 말을 하시는구만요 기래. 

 

 "원래 민재 씨와 리돌 양이 성희 양하고 만날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오늘 이렇게 왔는데, 어쨌든 이렇게 되면 딱히 할 말은 없네요.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잠깐요."

 

 캐롤라인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나의 말에 잠시 동작을 멈추고서는 의아한 눈초리로 대답하였다.

 

 "뭡니까, 민재 씨?"

 

 "이거 말이죠."

 

 나는 주머니에서 돈봉투를 꺼냈다. 그녀가 어제 이 곳에 왔다는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를. 캐롤라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봉투를 쳐다보다, 다시 나를 보면서 말했다.
 
 "제가 전에 드린 봉투로군요." 

 

 이 한 마디에 심증이 확 굳어졌다. 분명히 이 아줌마는 어제 이 곳에 왔고, 리돌과 같이 나에게 무슨 짓인가를 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물건이 여기 남아 있었을 리가 없지. 캐롤라인은 여전히 감정선에 변화가 없는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말씀 드렸을 텐데요. 돈이 부족하시면 일을 더 하시라고요."

 

 "아니, 지금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잠깐, 그런 얘기를 하셨다고요?"

 

 고개를 끄덕끄덕. 생각보다 더 어이가 없어진다. 일단, 지금 해결해야 할 일부터 정리하고 보자. 지금 중요한 건 액수가 아니다. 이 아줌마에게서 어제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어쨌든 어저께 왔다 가신 건 맞는 거죠? 그런데 자, 잘 들어보세요. 캐롤라인 씨가 방금 말씀하신 게, 어제 분명히 우리 집도 왔었고, 저한테 이 봉투를 건네주시면서 방금 전 말씀하신 것 처럼 무척이나 어이없는 말도 저한테 하셨다 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거에 대한 기억이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혹시 제가 기억이 나지 않는 동안에 뭐라도 잘못한 게 있는지, 아니면 혹시 다른 일이 있다면 좀 말씀해 주실래요?"

 

 말은 최대한 예의바르게.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상대를 협박하듯이. 내 말의 골자는 이거다. 어차피 지금 너희들이 우리집에서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내가 없는 것은 그간의 기억 뿐이니 지금 당장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라.

 캐롤라인은 갑자기 골몰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이 아줌마가 이렇게 까지 대답이 늦어지는 걸 보면, 분명히 무언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군. 이번에야 말로 정체를 제대로 밝혀 주겠어.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그래, 뭐든지 말해 보시지. 결의에 찬 내 얼굴 위로,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펜 비슷한 것을 꺼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러고서는 내 눈 앞에서 끝부분을 눌렀다. 잠깐만, 이거 영화에서 본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