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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역시 왕에게 간택 될만한 매력적인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과분한 자리에 항상 감사했다. 실제로도 왕을 섬기고 사랑하였으며, 자신도 그에 못지 않는 총애를 받고 있음을 믿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어린 공주와도 잘 지내보려고 부던히 애를 쓰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덧없는 믿음으로 이어진 관계일 뿐. 결코 진심 어린 호의는 아닌 것을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딱하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온전한 애정을 쏟을 수 없는 배다른 아이. 그렇게 모두를 속여온 그녀였지만 자신마저는 속일 수가 없었는지 종종 자조섞인 다짐을 하곤 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원만하게 해결되리라. 그렇게 되뇌이며 애써 자신을 안심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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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책무는 너무나도 과중했다. 수많은 신민들의 소망을 홀로 짊어진 댓가는 값비싼 부귀와 명예따위에 비할바가 못되었으며, 고국에 신명을 바치며 살아가는게 왕의 삶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누구나 인정할만한 고귀한 성군이었다.


그리고 격무에 지친 왕과 그녀는 최소한의 부부간의 정을 나누는 일도 드물었다. 그 누구에게나 공명정대한 왕이었지만, 정작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한 그였다. 한때는 그런 점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이윽고 그런 위치에 계신 분이기에 그마저도 이해하려 했다. 그녀에게 간간히 짓는 부드러운 미소와 가끔 마주 쥐는 손의 온기를 버팀목 삼아 그녀는 왕비이며 공주의 어머니라는 책무를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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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벌써 몇 년째 그녀에게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왕의 뒤를 이을 후사를 남기지 못하는 왕비는 질타의 대상이었지만, 왕은 결코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리고 신하들 사이에 후사의 문제가 언급될때마다 왕은 드물게도 무서운 기세로 간언을 물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들 그녀의 마음이 편할리는 없었을 것이다. 


꽃다운 젊음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으며, 해마다 시들어가는 자신의 외모에 매일 같이 거울을 붙잡고 흐느끼곤 했다. 


그에 반해 그 아이는 어느덧 소녀의 티를 벗어나 어엿한 숙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막 봉우리에서 피어나는 상쾌한 꽃망울과 시들거리는 꽃잎을 흩날리는 자신을 비교해보자면 한없이 우울해져 더 이상 그것을 숨기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 더 부아가 치미는 것은 그 아이가 커갈수록 죽은 전 왕비의 모습과 꼭 닮아간다는 점이었다.


티없이 하얀 피부와 가녀린 팔다리 주목을 끄는 가련한 외모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외모를 칭송하며 죽은 왕비를 들먹이는 꼴을 보는건 현 왕비로서도 여자로서도 치욕스럽기 그지 없는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따랐다.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는 그 아이가 성가셔서 짜증을 낼 때마다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고 먼저 사과를 올렸다.


그 아이의 그런 올바른 성품마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감정을 추스르며 어머니의 역할에 충실하려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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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있어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보게 되었다.


늦은 밤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해 성안을 배회하는 도중에 귓가에 기분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흐느끼는 소리같기도 했고, 고통에 찬 비명같기도 했다. 그녀는 무서운 마음이 들면서도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의지하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한걸음씩 옮겨갔다.


다다른 곳은 공주의 침실이었다. 


머리가 곤두서는 것을 느끼면서도 문고리를 향하는 손을 거둘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소리가 나지않도록 눈으로만 볼 정도로 조금만 문을 열었다.


정갈해야할 공주의 침대에서는 서로의 몸을 포갠채 두 남녀가 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죽인채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투명할 정도로 흰 살결 발버둥을 친다. 여자는 공주임에 틀림이 없었다. 너무나도 몰라 헉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마시자 남자쪽이 재빨리 문쪽을 바라본다. 곧바로 몸을 빼 들키는 일은 없었지만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공명정대한 성군이자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해마지 않는 자신의 남편이었다. 


그렇게 덧없는 믿음이 산산히 부숴진 순간 그녀는 역겨움에 그 자리에서 구토를 쏟아내었고, 그제서야 자신이 한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할 아내가 아닌 왕비라는 책무를 다할 뿐인 인형이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늙어감에 따라 여자로서의 매력을 다해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그 여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그 아이와 헐떡거리는 왕의 모습은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모습이었기에 그녀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죽은 그 여자의 대체품조차 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왕비의 모습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머리 끝은 갈라져 산발이 되었으며, 식사를 먹어도 토해내는 일이 대부분이라 점점 흉측하게 말라갔고 피부는 죽은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생기가 없어졌다.          



*****

그 이후로 왕비의 침실에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왕은 물론이고 그렇게 어머니라고 따르던 공주의 발길마저 뚝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방 근처를 지날때마다 간간히 기괴한 소리가 들려온다는 소문은 이어졌다.


울다지쳐 쉬어빠진 목소리로 왕비는 거울을 잡고 절규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게 누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