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리 자네를 애타게 하는 것인가? "


"어떤 이유에서, 편안한 임종을 뿌리치고 지겨운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이곳으로 돌아온 것인가?"


"오랫동안 잊어 왔던 찬란한 영광의 순간인가? "


"아니면 이제는 바스라저 저 북방 너머의 찬바람으로 사라진 종의 복수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잠깐이나마 입술에 머물렀던 짧은 달콤함 때문인가? "


....

......

.......


 되었네. 중요한건 다시, 여기, 이 자리로.  자네가 돌아왔다는 것일 뿐이니.  


 나왔던 시간 만큼이나 처음부터, 다시 고통스러울 것이네. 진정한 의미에서 영원히, 자네는 원하는 결말에 닿지 못 할수도 

있을게야. 하지만 자네는 기어코 다시 이 길을 선택했으니 언제나 그랬듯이 안부의 말 하나, 전하네.


 부디, 뜻한바를 이루시길.



""


 열여섯의 영지. 


아홉의 기사. 


여섯의 마법사.


한명의, 죄수.



12번의 종소리.


침식되어가는 세계.


희미한 기억 속 새파란 눈동자, 하나.


하나씩 되내이면서 검은 죄수는 다시 처음의 이 방으로, 되돌아왔다.


"....."


 구름에 닿을듯이 드높은 종탑이 울렸다.  열 두번째, 마지막 종탑 소리에 맞춰 검은 죄수는 그의 시커먼 투구 안쪽에서 안광을 

번뜩였다.  


 한 차원을 녹여 낸듯 입체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시커먼 중갑.  그것으로 피부를 빼곡히 덮어 씌운 검은 죄수. 녹이 잔뜩 슨 쇠사슬이 죄수의 양팔 끝에 묶여있었다.  죄수는 헐거워진 사슬을 힘을 주어 끊어내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적힌 낡은 룬 문자에 빛이 돌더니  녹슨 감옥의 문이 열렸다. 검은 죄수는 힘을 주어 두 손으로 문을 밀어내고 밖을 향해

나아갔다.


""


 삐걱삐걱. 기름칠 하나 되지 않는  녹슨 갑옷에서 접합부위가 부딧치며 기분나쁜 소리를 냈다. 바깥에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망령

들 여섯이 삐걱 삐걱, 소리를 내고 다리를 절어가면서도 순찰을 이어가고 있었다.


 검은 죄수는 그런 망령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쉰소리를 내며 망령은 들고 있던 녹이 슨 무기를 죄수에게 휘둘렀다.  허나, 

피골이 상접한 망령들의 힘은 검은 죄수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였다.  


 날아 온 녹이 슨 할버드를 양 손으로 잡고 쥐어 챈 죄수는 그를 향해 날아온 할버드를 꺼꾸로 쥐고 역으로 망령들을 하나 둘씩 베어 나갔다.


 옆으로 피하고 한번, 앞으로 구르고, 두번. 허리를 한바퀴 돌리며, 세번. 아래서 위로 크게, 네번. 어깨를 앞으로 하며 벽으로 밀치며,

다섯번.  이어서, 여섯번. 


 여섯 망령들을 순식간에 처치한 그는 첫 적에게 노획한 낡은 할버드를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그리곤 그들이 막고 있던 감옥의 

출입구 앞에 섰다.  


"......"


  두꺼운 문이었다. 문 사이 사이로 기형의 룬문자가 난잡하게 적혀 있었다. 문꼬리 쪽으로는 처음에, 그를 옥죄엿던것과 같은 

쇠사슬이 잔뜩 묶여있었다. 검은 죄수는 허리춤에 차고 있었던 자신의 칼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칼집과 칼이 부딧치며 나는 소리가 들렸고, 그와 함께 갑옷만큼이나 검은색의 검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검은 연기를 주변으로 내

뿜는 시커먼 칼. 남자는 칼을 천천히 두 손으로 잡고 두 손에 힘을 주어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서걱 하며 연한 부위를 잘라내듯이 메끄럽게  갈라지는 문. 문의 틈 새 사이로 연한 빛이 흘러 나왔다. 죄수는 어깨를 앞으로 하고 갈라진 문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


 바람이 불어왔다. 문 밖의 세상은 안개가 자욱히 깔린 높은 고성. 대저 바닥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아득히 높은 고성 위에서 죄수는 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투구 안의 눈알이 연신 주변을 오가며 길을 확인했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고성 위의 벽을 따라 지천에 즐비했다. 내려 돌아가는

계단 옆에도, 일직선으로 쭈욱 나와있는 직선형의 길에는 당연히도. 샛길로 나아가려는 배관 옆 길에도 병사들은 순시하며 돌아

다녔다. 


"....."


 적합한 길을 찾아 해매이던 죄수의 눈동자는 길을 정한 것인지 정면에 멈춰 섰다. 눈알이 멈춰섬과 함께 시커먼 갑옷은 앞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감옥 입구 옆으로 난 긴 샛길로 뛰어나갔다. 샛길 옆을 지키던 병사들은 방패를 치켜들고 칼 끝을 세워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애썻으나 저돌적으로 몸을 내던지는 검은 죄수의 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깨를 앞으로 하며 몸으로 밀쳐 낸 후 하나씩, 하나씩. 검은 죄수는 병사들의 목숨을 취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샛길의 다음번에는 일렬로 넓게 선 방패병들과 그보다 먼 쪽에 선 궁병들이 그를 기다렸다. 


  성의 중간 중간에 있는 감시탑에서 연거푸 활을 발사하는 병사들. 그들보다 조금 앞, 감시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철벽처럼 거대한 방패를 들고 그를 막아선 방패병들.  숙이고 구르고 뒤로 뛰었지만 날아오는 화살 세례를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앞으로 밀쳐내기 위해 아까와 같이 몸으로 밀어보려 하지만 몸이 다 가려지는 거대한 방패를 여럿 들고있는 병사들에 의해 쉽게 

밀리지 않는다. 날아오는 화살 세례에 죄수의 갑옷 여기 저기에 화살이 박혔다. 


"......"


박힌 화살을 손으로 걷어 낸 후, 검은 죄수는 다시한번 칼을 양손으로 잡고 힘을 주었다.  


 사방으로 번져 나가려는듯이 칼을 중심으로 퍼지는 검은 기운. 기운은 점점 커져 나가 곧 칼을 한참 넘어 설 정도로 커졌다. 마치 칼

밖에 또다른 칼이 씌워진듯한 거대한 형상. 검은 죄수는 눈 앞의 방패병들을 향해 검은 기운으로 가득한 칼을 휘둘렀다.


 견고하던 방패병들은 칼날이 휘둘러진 각도 그대로 조각났다. 여러 방패로 모자람 없이 공간을 채우던 방패의 벽이 속절없이 

한번에 무너져내렸다.  살아 남은자들은 사태를 수습해 다시금 남은 자들끼리의 벽을 만들기 위해 늘러붙으려 했지만 검은 죄수는

한번 벌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벌어진 틈을 향해 몸을 날렸고, 방패를 든 병사 사이로 들어가 칼을 휘둘렀다.  다급해진 것인지 조금 더 멀리 있던 감시탑의 궁수

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해 왔으나 검은 죄수는 죽은 방패병들의 시신을 들어 화살을 막아내었다. 


 궁수들은 화살을 다시 먹이고 죄수에게 발사해보려 하지만 죄수는 그 간극을 놓아두지 않았다. 계단에 가까운 쪽의 궁수부터 하나씩, 하나씩.  끝에 계단에서 가장 먼 쪽에 있는 궁수의 목까지 잘라내었다. 


"....."


 마지막 병사의 목에서 칼을 빼어낸 후 죄수는 숨을 한번 가파르게 몰아 쉬었다.  감시탑 밑에 길게 펼처진 길은 자욱한 안개에 

가려잘 보이지 않았고  스산한 바람만이 주변을 맴돌았다.  화살들이 꼽혔던 구멍이 나 있어야 할 자리는 어느세 재생이라도

된 듯이 처음의 그 모습으로 말끔히 되돌아 와 있었다. 


 감시탑 건너편에 난 긴 길로 남자는 몸을 날렸고 자욱한 안개쪽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비명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때 쯔음엔 검은 죄수는 감시탑에서 이미 저 먼 쪽까지 걸어 들어가있었고

그 앞에는  한 섹터의 끝을 알리는 거대한 문이 죄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 팔에 힘을 잔뜩 주고 앞으로 밀어내는 죄수. 양 끝에 걸린 이음쇠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거대한 문을 앞을 향해 연 그의

앞에는  갑옷을 입은 첫번째 기사가 그를 향해 길다란 칼을 뽑으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