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장-만남
계란의 노른자가 두 개일 때, 길을 가다가 떨어진 동전을 주웠을 때, 원하던 물건을 싼 값에 얻었을 때,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우리는 운이 좋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운이 좋다는 것은 곧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필자 역시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해 왔다. 만약 필자가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과 만났던 것은 대학교 2학년의 심화화학개론의 수업이었다. 어쩌면 그 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전공수업을 듣고 있었다는 것은 필자와 같은 학년의 같은 학부생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필자는 놀라울 정도로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필자와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사건은 그 수업의 기말 고사 시험 결과를 확인하던 날이었다. 다른 시험 결과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낮은 시험 결과. 한 번도 빠짐없이 수업에 출석했고, 레포트나 기말 시험의 결과도 상당이 괜찮았던 필자에게 있어서 그 결과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곧바로 담당교수의 연구실로 향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실험실에서 방금 내려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흰색 가운과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손. 무엇보다 충혈된 눈과 부스스한 머리는 그가 교수의 연구실에서 일하는 조교나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이번 1학기에 수요일 3교시와 4교시 연강이었던 심화화학개론 수업을 수강했던 학생입니다. 오늘 오전에 성적에 관해 공지를 받았는데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 성적이 너무 낮아서 혹시 성적평가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가능하면 교수님과 직접 만나서 성적이 낮은 이유를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서 그런데, 혹시 교수님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오늘이 힘들다면 면담이 가능한 날짜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필자는 최대한 친절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필자의 목적을 말했다.
“잠시만요 교수님께 지금 메일을 보내겠습니다. 전화가 빠르기는 하지만 아마 회의 중이셔서 전화는 안 받으실 것 같거든요. 메일은 자주 체크하시는 분이시니 아마 금방 답이 올 겁니다. 계속 서 계시기도 그럴 것 같으니 여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안내를 받은 자리에 앉았다. 결코 편안하다고는 할 수 없는 차갑고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였다. 의자에 앉아 잠시 방을 둘러보았다. 제목조차 읽을 수 없는 외국어로 된 책부터 번역되었지만 제목이 너무나도 난해해서 펼쳐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 책, 제목조차 적혀져 있지 않은 파일과 아무렇게 어질러진 A4용지더미, 수많은 실험기구와 잡다용품, 테이블 위에도 수많은 책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쓰레기통 옆에는 구겨진 티슈가 하나 놓여 있었고, 먼지가 쌓인 곳이 넘쳐났다. 정리가 되어진 것도, 그렇다고 아주 어지럽혀져 있는 것도 아닌 악간 불편한 상태였다. 책상 위의 동물모양의 인형들과 작은 주사위나 모형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짙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옆에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던 조교를 쳐다보았다. 그는 필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필자가 무엇을 해도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뒤에 먼지를 조금 닦아 내기 위해 인형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똑, 똑, 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손을 다시 움츠림과 동시에 시선은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의 창문으로 검은 모자를 쓴 데다가 그 위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게다가 마스크까지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창문이 먼지로 흐릿했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교수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들어오세요.”
조교가 대답을 하자 그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모자를 쓰고 있음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약간 긴 머리와 흰 피부, 눈이 크고 눈썹은 옅었다. 눈가에는 잔주름이 없었고, 마스크 너머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코가 높았다. 외모에 관해 잘 모르는 필자조차도 한눈에 미형의 외모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옷은 단정했고, 가방은 세련되었으며, 먼지의 향만이 가득했던 방 안에 희미하게 상큼한 향을 퍼뜨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조교는 필자에게 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말을 지금 막 들어온 남자에게 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성적 때문에 왔는데요. 그, 자세한 건 교수님과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아 그러시면 잠시 저쪽에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저기 저 분도 같은 이유로 오셨거든요. 아마 곧 교수님께서 답장을 해 주실 겁니다.”
조교의 목소리가 한층 밝았다. 아마도 일거리가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밝은 대답을 듣고 남자는 필자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필자는 그제서야 그에게서 눈을 거두었다. 하지만 지루한 방을 계속해서 관찰할 생각은 없었다. 인터넷에 접속되지 않는 휴대전화를 들여 보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방 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어제 밤 꿈에서 보았던 특이한 구조의 건물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스케치 중에 잠시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남자를 흘겨보았다. 딱히 그에게 흥미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랜 습관이었고, 목적이 있는 행동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필자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는 휴대폰을 보지도, 책을 읽지도, 그렇다고 잠을 자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우연히 눈이 마주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그를 흘겨보았지만 여전히 그는 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케치를 하던 손이 잠시 멈추었지만, 이러한 행동이 더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케치를 재개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 꿈 속에서 보았던 그 건축물의 모습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지 않았다. 왜 이 남자가 필자를 보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에게 되물을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추리력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오랜 시간을 생각해 보아도 아무런 답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교수님께 메일이 왔습니다. 아마도 1시간 정도 걸리실 것 같다고 하십니다. 혹시 다른 용무가 있으시다면 잠시 다녀오셔도 괜찮으실 것 같은데요? 돌아오신 뒤에는 오늘 오후 9시까진 여기에 계신다고 하시네요. 원하신다면 여기에서 계속 기다리셔도 되는데, 제가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 실험실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거든요. 그, 냉장고에서 원하는 음료수를 꺼내 먹어도 괜찮다고 하시니 필요하시면 마음데로 꺼내 드셔도 괜찮습니다. 혹시 급한 일이라도 생기시면 실험실은 바로 맞은편이니 찾아와 주세요.”
조교는 필요한 말을 쏟아낸 뒤에 밖으로 나갔다. 이제 이 방 안에는 필자와 필자를 쳐다보는 수상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이런 거북한 환경에서 한 시간이나 버틸 수는 없었다. 확인을 해야만 했다. 때문에 세번째로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마침내 그에게 말을 걸었다.